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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75)화 (75/100)

75화

세완은 주저하면서 말문을 열었고, 이은은 세완이 입을 열어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길 기다렸다.

하지만 잠시 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그녀가 무엇을 상상했든 그 이상이었다.

‘소원이 백희경의 친딸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이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겠다.

친엄마인 줄 알고 찾아갔더니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남이고,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남인가 했더니 정보를 수집해서 추론한 결과 백희경은 이은을 버린 친모, 혹은 친이모였다.

그녀가 살인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후로 결혼하고 딸 하나 낳고 잘살고 있는 것 같았기에 그녀의 신분세탁은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친딸인 줄 알았던 사람이 친딸이 아니란다.

상황을 너무 꼬아놔서 개족보도 이런 개족보가 없었다.

이은은 이제 백희경이 자신과 정말 피가 섞이긴 했는지 그것이 정말 진심으로 궁금했다.

일말의 망설임이나 죄책감 없이 그녀를 섬으로 불러들여 죽이려고 한 것을 보면 이은과 백희경 사이에 피가 섞이지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은의 얼굴에 냉소가 감돌았다.

“물론 그 애가 백희경의 양딸이 아닐 수도 있어. 혈액형 검사가 잘못됐을 수도 있잖아.”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세완은 더듬더듬 소원이나 백희경의 혈액형이 잘못 적힌 것일 수도 있다며 이은을 위로하려고 했다.

하지만 방향을 잘못 짚었다.

세상천지 혈혈단신이라는 생각에 백희경과 그녀의 딸과 관련해서 마음이 약해져 수십, 수백 번 휘둘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쯤 되니 그놈의 피붙이, 이제는 정말 신물이 나왔다.

이은이 말없이 말간 눈으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세완의 눈동자에는 이은에 대한 걱정, 정말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피가 섞였든 섞이지 않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은의 진짜 가족은 백희경이 아니라 세완인 듯했다.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다만 너무 늦게 결심해서 세완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찬주 불러봐.”

숨을 고르며 마음을 굳힌 이은이 세완에게 말했다.

찬주라면 질색하는 평소의 이은을 알기에 세완이 의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찬주는 왜?”

“불법하면 박찬주잖아. 유전자 검사 해야지.”

이은이 당연한 듯이 말을 내뱉었다.

“유전자 검사는 원래 본인 동의가 필요하다며. 그런 거 없이 몰래 해주는 곳으로 좀 알아보라고 해. 신속‧정확한 곳으로! 우리 사실관계부터 정리하자.”

“안 그래도 백희경 집으로 직원 보냈어. 칫솔이랑 머리카락 같은 게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내일 안에 도착할 거야.”

빠르면 오늘 저녁 안에 도착할 수도 있다며 세완은 자신의 노력을 자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은이 말하는 사람은 백희경이 아니었다.

“백희경 말고. 검사할 사람 한 명 더 있잖아.”

이은이 위층을 고갯짓하면서 말했다.

“찬주한테 연락이나 해. 머리카락은 내가 가져올 테니까.”

이은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이은은 이제야 백희경과 백희경의 잔재를 그녀의 몸과 마음에서 털어낼 준비가 된 것 같았다.

* * *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나니 그 다음은 순식간이었다.

이은은 3층으로 올라가 소원의 것이 분명한 커다란 브러시 빗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그들은 그것을 들고 찬주가 소개시켜 준 유전자 검사 센터로 이동했다.

아는 사람이 많으면 좋지 않았기에 윤세를 떼어 놓고 세완과 단둘이서만 센터에 왔다.

이은은 센터에 자신의 머리카락과 소원의 머리카락을 함께 제출했다.

혹시 모를 시험의 오류 및 시료의 오염을 생각해 그녀가 들고 온 머리카락들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횟수로 검사해주길 요청했다.

그리고 오늘 당장, 지금 즉시 결과가 나올 수 있기를 청했다.

연구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지만 이내 가능하다며 그들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짧으면 두세 시간, 길면 네다섯 시간까지도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다섯 시간이 대수일까! 이은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검사 센터 1층에서 이은은 세완과 함께 결과를 기다렸다.

그리고 세 시간 뒤, 결과가 나왔다.

열두 개의 유전자검사 결과지를 든 이은은 세완과 함께 열성적인 손길로 하나하나 다 개봉을 했다. 결과는 열두 개의 검사 모두 동일했다. 혈연관계가 없음.

이미 예상을 했던 결과였기에 놀람도 없었다.

“백희경의 머리카락이랑 칫솔은 언제 온다고?”

“……오늘? 어쩌면 내일일 수도 있고.”

“올라오면 무조건 얘기해.”

그러면 지체 없이 검사해서 결과를 뽑아낼 거다.

이제는 그 무엇도 믿을 수 없었다. 이은은 철저하게 증거만 가지고 판단하기로 했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이은은 상념에 잠겼다.

세완이 힐끔힐끔 훔쳐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세완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쓸데없이 자기연민에 빠지고 싶진 않은데 지금은 이 일과 그녀 자신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새삼스레 내 신세는 왜 이러냐는 신세타령이 아니었다.

이 일이 어쩌다가 시작됐고, 어떤 형식으로 수습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그중에는 소원의 거취와 관련된 부분도 있었다.

이 회장은 진작부터 소원을 내보내자고 했다. 미련과 집착으로 그녀를 잡고 있었던 것은 이은이었다.

이은은 오직 그녀와 소원이 핏줄일 가능성, 그 하나만 생각하고 소원을 거둔 것이었는데 소원과도, 백희경과도 그 어떤 혈연관계가 없다면 소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라면서 내쫓는 것도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 바로 어제, 이은의 눈치를 보면서 맨밥에 말라비틀어진 김치 하나만 놓고 식사를 하던 그 아이가 생각났다.

처음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활발하고 당당하고 오만하게 사람을 대하던 그 아이가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엄청나게 작아진 모습이.

심지어 그 애는 깨진 유리를 서둘러 치우느라 손을 베이기까지 했다.

애는 나쁜 애는 아닌 거 같은데…….

도대체 소원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이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은이 세완을 힐끗 봤다.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그녀와 달리 세완은 꽤나 멀끔하고 고민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보니 네가 소원이를 데리고 오자고 했었지.

운전하는 중만 아니라면 이은은 세완의 뒤통수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세완의 생명을 위해 이은은 자신의 심란한 마음은 어떻게든 삭이기로 했다. 그러나 완전히 삭여진 것은 아닌지라 그녀도 모르게 불쑥 일을 열었다.

“세완아, 만약 네가 내 입장이라면 소원이는 어떻게 할 거야?”

“걔가 왜?”

“자매가 아니라잖아.”

애초에 소원을 옆에 둔 것은 그래도 그 애가 자매일 수도 있다는 가정 때문이었다.

세완이는 인질이니 어쩌니 헛소리를 해댔지만 이은의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녀가 세완과 지나치게 친분이 있는 모습을 보여 이은의 속을 뒤집었음에도 묵인했던 유일한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그런데 자매가 아니라니……. 헛웃음만 나왔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실소를 흘리고 있었는데 세완이 물었다.

“그게 중요해?”

“뭐가?”

“어차피 내보낼 애잖아. 그리고 걘 네 가족 아냐.”

낄낄대며 소원과 제법 친하게 지내던 세완이었기에 그가 뱉은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이은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데 그가 말했다.

“옛날에 내가 네 주변을 뱅뱅 돌던 거 기억나?”

“그건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아?”

이은이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건 맞는 말이지만…….

“지금 말고 초등학교!”

세완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일단 그렇다 치고!

이은이 이야기를 해보라는 듯 세완을 주시했다. 세완이 말했다.

“내가 너 때문에 국어사전 꽤 많이 뒤져봤거든. 가족이란 일상의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더라. 피만 섞였다고 다 가족인 게 아니라.”

“…….”

“그러니까 너한테 가족은 우리라고. 일상공유는 우리랑 했지 백희경이나 그 딸이랑 한 게 아니잖아. 그 사람들 네 가족 아니야. 그러니까 상처도 받는 거 아니다.”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어린 날의 세완은 꽤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고심했던 것 같았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머뭇거리던 이은이 메이는 목을 긁어내듯이 말했다.

“누가 그거 몰라? 내 가족이야 당연히 너랑 할아버지지.”

아주 오래전부터 그것은 이은 가슴 속의 신앙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고아에게 피가 섞인 가족의 의미는 남달랐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건강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이유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가족이 나에게만 없다는 사실을 고아들은 자라는 내내 가슴에 품고 성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유독 가족에게 집착을 했다.

20년 만에 나타난 부모님께 정착금을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된다거나, 피만 섞였지 남보다 못하다는 친척들에게 착취를 당한다거나 하는 사례들이 모두 그래서 발생하는 거다.

머리로는 안다. 이런 건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들이 내뱉는 달콤한 ‘가족’이라는 한 단어에 취해서 간이고 쓸개고 모두 내주고 만다.

이은은 고아들의 그런 선택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은도 그 흔한 고아들 중 한 사람이었나 보다.

똑똑하고 아이큐가 놓고 머리가 좋은 게 다 무슨 필요가 있담. 바보짓은 혼자서 다 하고 있는데.

하지만 섬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이은은 엄마와 통화가 됐을 때 잠깐이나마 행복했었다. 그녀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생각에.

그 달콤함이 마약 같아서 이은은 참 많이도 휘둘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깨어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은이 그렇게 결심을 하고 있을 때 세완을 말을 이었다.

“아무튼 결론은 백희경이랑 그 딸은 네 가족이 아니라는 거잖아. 그러면 뭐하러 끼고 있어? 내쫓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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