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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74)화 (74/100)

74화

성큼성큼 다가온 이은이 세완의 코앞에 섰다. 세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방황했다.

뒤에는 벽, 앞에는 김이은!

뒤에는 절벽이고, 앞에는 맹수가 입을 벌리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은이 세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세완의 키가 너무 컸다.

하이힐을 신고 있을 때와 달리 집 안이라 맨발이다 보니 쓸데없이 키만 큰 세완과의 키 차이가 적나라하게 느껴져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잠깐 고민한 이은이 세완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억!”

세완이 목 졸린 소리를 내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이은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눈높이가 좀 맞는군!

하지만 만족한 것은 이은뿐인 듯했다. 그녀의 과격한 손놀림에 세완이 항의했다.

“야, 인마!”

“뭐?”

“……아니, 그냥 목이 좀 아프다고.”

하지만 안 하는 것만도 못한 항의였다.

구시렁대는 세완을 야무지게 노려봐 그의 기를 죽인 이은이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근데 너 진짜 내 방에는 왜 들어오려고 했는데?”

“아, 안 그랬다니까?”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봐.”

이은은 이번에도 세완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있는 힘껏 당기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완력으로, 요령껏, 완급조절을 해서 잡아당겼다.

세완의 고개가 이은이 잡은 넥타이의 방향에 따라 움직였다.

이은과 세완의 눈이 마주쳤다. 어지간한 여자보다 더 긴 속눈썹이 깜빡이며 이은을 향했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세완의 이마에서 넘실거리고, 붉고 선명한 입술이 치명적으로 바들거렸다.

이은은 순간 세완이 잘생겼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긴. 아주머니가 전직 미스코리아셨으니까!

역대 미스코리아 중에서도 손꼽히게 아름다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정말 사람보다는 천사에 가까운 외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모친의 외모를 쏙 빼닮은 것이 세완이니 안 잘생기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그나저나 얘 정말 진짜 피부 좋네. 한 번 찔러 볼까.’

이은은 솟아오르는 욕망 속에서 갈등했다.

그리고 결국 욕망에 진 그녀가 세완의 볼을 찔러보기 위해 손가락을 그의 얼굴 근처로 갖다 댈 때였다.

“……!”

화들짝 놀란 세완이 몸을 뒤로 빼려다 또다시 벽에 부딪혔다.

손가락은 결국 세완의 볼에 안착했다.

세완은 그의 볼에 와 닿는 작고 동그랗고 말캉한 손가락을 온전히 느꼈다. 어쩐지 묘한 기분에 세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가까이에서 본 이은의 얼굴은 조금 많이 예쁜 것 같았다.

살짝 낮은 코와 살짝 날카로운 눈매,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앵두 같은 입술, 백옥 같은 피부…….

진부한 표현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은을 표현하기에는 그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없었다.

세완은 부족한 어휘력 속에서도 최적의 표현을 찾아낸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그리고 제가 떠올린 표현들을 곱씹으며 그 달콤함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러다가 지레 놀라 넥타이고 나발이고 서둘러 몸을 뒤로 뺐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이은의 손에서 넥타이가 사르르 빠져나왔다.

세완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이상해서 한 번 더 얼굴을 붉혔다.

“너는 왜 남의 볼을 마음대로 찌르고 그러는 건데!”

“찌를 수도 있지,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

세완은 수줍음이 많았고, 이은은 뻔뻔했다.

이은은 제 손에서 벗어나려는 넥타이를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도망 못 가게 손에 한 번 감아서 단단하게 붙든 뒤 그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내 질문 피하려고 말 돌리는 거 다 알거든? 빨리 말하지? 내 방 앞에는 왜 있었는데? 너 지금 무슨 일 벌이고 있는 거 맞지?”

이은이 또다시 세완의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를 협박하는데 어째서인지 그 모습도 예뻐 보였다.

안 예쁜데 예뻤다. 그게 참 기묘했다.

솔직한 이야기로, 힘으로 하자면 도망치지 못할 것도 없는데 왜인지 그게 참 어려웠다.

세완은 그냥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세완에게 이은이 물었다.

“내 통장 훔치려고 왔어? 자금 필요해? 주식? 암호화폐? 도박?”

“아니라고!”

세완이 발끈했다. 아니, 얘는 왜 사람을 의심해도!

“너 자꾸 사람을 이상한 쪽으로 의심하는데 아니거든?”

세상천지 뒤져봐라. 나처럼 건전한 재벌 3세 있나!

공부하고 일하기를 좀 싫어해서 그렇지, 그걸 제외하면 내가 그렇게 큰 사고를 친 것도 없지 않느냐고 세완이 말했다.

먹고 자고 숨쉬기만 하는 개 팔자를 부러워하던 외길인생 32년이었다. 한량만 부러워하느라 본의 아니게 바른생활 어른으로 살았던 세완의 항변에 이은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은 그걸 큰 사고라고 하거든……. 직책과 직위를 가진 주제에 무능하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이야.”

마약과 도박 등 개인적으로 사고를 치는 건 저 하나만 죽으면 그뿐이지만, 대기업 회장 주제에 무능해 아무것도 안 하면 그건 여러 인생 말아먹는 거다.

재벌의 손짓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대한민국의 특성상 그 상속자가 무능하다는 것은 직원들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제까지 휘둘릴 수 있는 큰 문제다.

이은은 담담한 목소리로 세완을 몇 초 만에 수만, 수십만의 목숨을 날려 먹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으로 만들었다.

“일단 우리 회사 직원들이 정리 해고를 당하고, 우리 회사만 보고 먹고 살던 자영업자들이 망하고, 그들의 처자식이 거리로 내몰리고…….”

급기야는 그 모든 사람들이 한강에서 만나 동반 자살을 시도한다는 막상 스토리에 세완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의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큰 죄악인 줄 몰랐다. 현재의 기분이라면 이은이 말하기만 하면 보다 적극적으로 경영을 배워보는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완은 그렇게 커다란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런 세완에게 이은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거야 뭐 있나. 내 방에는 왜 들어오려고 했는지 그게 궁금하다고.”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 모든 막장 스토리는 오직 너를 괴롭히기 위한 가상시나리오였을 뿐이라며 이은이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세완은 이은을 악마 보듯 바라보았다. 그래, 그게 바로 너지…….

그러고 보면 지난 25년 동안 세완은 질릴 정도로 이은에게 휘둘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손해 하나 안 보는 녀석, 바늘로 찌르면 바늘이 튕겨 나오면서 부러지는 녀석.

“……내 주제에 누굴 지키겠냐, 내 한 몸 챙기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잠깐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휘둘리느라 만신창이, 피투성이가 된 세완이 벽에 몸을 기대고 스르륵 주저앉았다.

짝다리를 짚은 이은은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세완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자, 무늬만 재벌 3세야! 얼른 네가 숨기고 있는 것을 불어라!

처량한 얼굴의 수려한 미남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듯 올려보았지만 이은은 온몸에 붕대며 깁스를 하고서도 어쩌면 그렇게 튼튼하고 단단해 보이는 것인지…….

“말해. 나 이미 감 잡았어.”

백희경, 그러니까 그녀의 피붙이와 관계된 문제라면 100번 중 99번을 휘둘리는 이은이지만 그를 상대로는 100번 중 200번을 승리하는 이은이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백전백승인 소꿉친구를 보며 세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더 이상 그가 물러날 곳이 없었다.

여전히 그녀가 걱정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조금 먼저 상처를 받느냐, 아니면 조금 나중에 상처를 받느냐!

이 또한 조삼모사일 수도 있지만 세완은 모쪼록 어느 쪽이든 이은이 둘 중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는 쪽을 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완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간, 눈앞에서 세완에게 이은을 빼앗긴 윤세는 1층으로 내려가 이 회장에게 세완의 등장에 대해 보고했다.

세완과 이은에게 조금의 변화라도 있으면 무조건 보고하라는 이 회장에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들은 이 회장은 대노했다.

“아니, 그놈이 이 시간에 집에는 왜 와?”

출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오전 10시도 안 됐는데 집에 있나!

해가 중천에 있을 때 귀가하는 것은 이 회장 자신도 여든이 넘어서야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것도 아예 쉬는 것이 아니라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로 하면 재택근무였다. 비서실장을 통해 집에서 대부분의 업무를 보고, 중요한 회의나 결정이 있으면 회사에 출근하는 것으로.

그런데 어디 새파랗게 젊은 놈이 해가 중천에 떴는데 회사 일은 안 하고 자꾸 집에 드나드나! 지가 TV 드라마 속 실장님인 줄 알아? 직장인 주제에 일도 안 하고 만날 싸돌아다니게!

“아니, 회사에 놀러 다녀? 이놈의 자식이!”

이 회장은 당장 몸을 일으켜 세완을 잡으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가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잠깐만. 실장님?”

TV 드라마 속 실장님, 주말 드라마, 연애 사업, 결혼 엔딩.

“…….”

이 회장은 위로 상승하던 엉덩이를 다시 아래로 하강시켰다.

젊은 사람이 연애 한번 해보자는 건데 집에 한 번쯤 올 수도 있지. 나이 든 사람이라고 그런 것을 하나하나 다 따지면 꼰대 소리 듣기 딱 좋지.

하지만 그래도 지가 명색이 직장인이고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데…….

양가 감정이 이 회장을 흔들리게 했다.

백수 한량 같은 손자 놈이 노는 것은 싫고, 그 손자 놈이 김이은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아내로 맞는 것은 매우 환영하고!

회사의 근본을 거는 매우 큰 거래 앞에서도 이렇게까지 마음 결정을 못 한 일이 없는데 오늘은 유독 결정이 쉽지 않았다.

이 회장의 노안과 노구가 고민과 갈등 속에서 쉴 새 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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