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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73)화 (73/100)

73화

집주인의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다녀와도 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세완의 모습에 박 팀장은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소원이 얼마나 완벽하게 사기를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소원에게 그녀가 사기를 당했음을 알리고 싶었지만 그의 코가 석 자였다. 박 팀장은 그냥 범죄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에만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세완은 너그럽게도 부하 직원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작은 여객선을 하나 전세 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오늘 안에 머리카락과 칫솔을 가져올 경우, 특별보너스도 약속했다.

배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신속하게 머리카락과 백희경 일가의 칫솔을 가져오라는 고용주의 의지였다.

‘우리 상무님이 그래도 능력은 있으시지!’

특별보너스의 액수를 들은 박 팀장은 세완의 사기꾼적 면모를 사업가의 능력으로 받아들였다.

박 팀장은 노예는 역시 대갓집 노예가 최고라는 불멸의 진리를 가슴에 새기며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같은 시간, 박 팀장에게 일을 미루고 자유를 즐기려던 전직 대갓집 도령 출신 노예 박찬주는 그가 노는 것을 보기 싫어하는 클라이언트의 명령으로 박 팀장이 탈 여객선을 수배했다.

몇 시간 만에 조각배도 아니고 여객선을 어떻게 구하냐고 찬주가 화를 냈지만 까라면 까라는 클라이언트의 지시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찬주는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세완과는 동업을 하지 않고, 투자도 받지 않을 것이라며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 * *

백희경 일가의 칫솔과 머리카락을 확보하기 위해 박 팀장을 포항으로 내려보낸 세완이 또 다른 유전자검사용 DNA 수집을 위해 집으로 향했다.

그는 아무도 몰래 욕실에 들어가서 이은의 머리카락과 칫솔을 들고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욕실로 들어가려니 큰 문제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은이 욕실은 방 안에 있었네!”

뒤늦은 깨달음에 세완이 탄식을 토했다.

이은이 이 집에서 살기로 확정한 이후, 이 회장은 이은에게 2층에서 가장 큰 방을 배정했다.

그 방은 원래 세완이 쓰던 방으로, 2층에 있는 방 중 욕실이 딸려 있는 유일한 방이었다.

이은에게 제 방을 주는 것이 싫었던 게 아니라 처음에는 이은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했던 이 회장이었기에 그런 그의 결정이 신기해서 세완이 그에게 물었다.

“왜 이은이한테 제 방을 줘요?”

“그 방에 욕실이 있잖니.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보다 더 개인적인 부분이 있기 마련이란다.”

지금이야 그 개인적인 부분이 뭘 뜻하는지 안다.

2차 성징과 생리, 사춘기적 감성, 기타 등등. 남자인 세완과 같은 욕실을 쓰려면 이은도 많이 불편했겠지.

그 당시 이 회장의 결정을 이제 나이가 든 세완은 백번 이해한다. 찬성했고, 동의하는 바였다.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는 이은에게 제 방을 줄 것이고, 이은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다 양보할 수 있었다.

김이은인데 뭐 어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회장의 결정에 대해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지…….”

이은의 방문 앞에 선 세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형제 같고 남매 같은 이은의 방이라고 해도 주인도 없는데 방에 함부로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상황인데 이은에게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서 그녀가 보는 앞에서 칫솔과 머리카락을 들고나올 수도 없었다.

세완이 이은의 방문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였다.

“언제 왔어? 지금 근무시간 아니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은이었다. 불쾌한 일이지만 옆에는 불청객도 하나 딸려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상무님.”

“아, 예!”

“이세와안?”

“좋은 아침입니다, 경호원 씨.”

이은의 중재로 세완과 윤세는 대충 부족하나마 아침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인사를 했으니 남은 것은 해명이었다.

“왜 내 방 앞에 있는 건데? 나 기다렸어? 1층에 있었는데 부르지. 전화하거나.”

“……하하, 그러게. 그럴 걸 그랬다.”

어색한 표정을 지은 세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은에게 동의하는 척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이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있는데…….

“나한테 할 말 있어?”

“아니.”

진실.

“내가 아니면 내 방에 볼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야, 말도 안 돼!”

거짓.

“내 방에서 뭐 하려고?”

“내가 네 방을 왜 들어가냐? 너도 없는데!”

거짓.

다년간 이세완 전문 비서로 살아온 그녀의 육감이 말했다. 뭔가 있다고.

세완을 2층에서 봤을 때부터 어딘가 찝찝했다.

팔짱을 낀 이은이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세완을 바라보았다. 세완은 선량한 척 하하,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왜 그래? 사람을 왜 그렇게 봐?”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다 거짓이었다.

한참 동안 세완을 보던 이은이 결심했다.

“너 일단 좀 들어와 봐. 윤세 씨는 좀 있다 봐요.”

세완에게는 도살장 가는 소 장수처럼 엄한 표정을, 윤세에게는 대외용 비즈니스적 얼굴을 내보인 이은이 세완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뭘 꾸미는 건데?”

“뭐, 뭐가?”

세완이 말을 더듬었다.

이은은 그녀의 확신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어제부터 자꾸 느낌이 싸하단 말이야. 이세완 씨? 우리 이실직고해서 광명 찾아보지 않을래? 무슨 꿍꿍이야?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데?”

그녀의 식스센스는 이세완과 관련된 부분이라면 백발백중의 성공률을 자랑한다.

“그러고 보니까 이상했어. 내가 복직한다는 이야기에 나보다 더 할아버지께 적극적으로 매달리고…….”

정말 사채나 도박이라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어린 눈길이 세완을 향해 쏟아졌다.

속이 시커먼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과 그건 다른 건데!

세완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넌 왜 나를 못 믿는 건데!”

“넌 나 믿어?”

“믿지.”

“네가 나라면 널 믿을래?”

“……믿을걸?”

처음에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는데 두 번째 질문에서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인가!

세완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나야 뭐 별거 있나. 속 시커멓지, 일 못 하지, 공부 못 하지, 노력도 안 하지. 

“…….”

세완의 얼굴이 심각하게 어두워졌다.

내가 그래도 몸이랑 얼굴은 괜찮은데……. 

김이은의 표현에 따르자면 허우대 하나는 멀쩡하다고 했다.

돈 버는 재주가 있는 건지 국내고 국외고 투자하는 족족 놀라운 수익률로 재산을 증식하고 있는 중이고, 침대와 소파를 지나치게 사랑해서 그렇지 문란한 이성 교제나 주색에 집중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또…….

세완은 자신의 장점, 믿음직한 부분을 떠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세완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아래로 쳐졌다.

그런 세완의 모습을 보며 이은은 헛웃음을 흘렸다.

“나, 참!”

반쯤은 장난으로 던진 생각 없는 말이었는데 세완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모습을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이걸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당혹스러워하는 이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완은 여전히 심각했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심각한 세완의 모습에 이은이 제 실책을 인정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바보야, 당연히 믿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이 넌데!”

그녀의 통장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세완이고, 같은 방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잠들어도 아무 일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 바로 세완이라며 이은이 세완을 위로했다.

이은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세완을 믿을 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세완의 얼굴은 어쩐지 점점 어두워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반부에서는 화사하게 피었던 얼굴이, 후반부로 갈수록 칙칙하고 어두워졌다.

“같은 방……. 그치. 아무 일 없었지…….”

실제로 섬에서 같은 민박집, 한 방에 있었을 때도 그들은 아무 일이 없었다.

아무 일만 없었나? 건강한 남사친 여사친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증명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데 세완은 왜 자꾸만 뭔가 서글퍼지는지 모르겠다.

그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세완이 머뭇거릴 때였다.

“근데 진짜 내 방에는 왜 온 건데?”

“아!”

그러고 보니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다시 현실로 멱살 잡혀 끌려 나온 세완이 조심스럽게 이은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뻔뻔하고 오만방자하게 굴 수가 있는데 어째 김이은이 주인공이 되면 그게 참 어려웠다.

세완은 머뭇거리며 머리카락과 칫솔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백희경과의 유전자 검사에 대해 이은에게 설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본인의 일이니만큼 이은에게 설명하고, 모든 것은 이은이 판단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데 그놈의 ‘가족’과 엮이기만 하면 약해지고 여려지는 이은의 모습 때문에 세완은 자꾸만 그녀에게 그의 행동을 숨기게 된다.

“……완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세완은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세…… 아…….”

저번에도 숨겨서 이은이 다친 것 아니었나. 그냥 다 밝힐까?

“세…… 완…….”

백희경이 그녀와 단 1할도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은이 상처받을 거 같은데…….

세완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이세완!”

천둥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대뜸 그의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깜짝이야!”

세완이 기겁하고 놀라며 뒤로 물러나다가 벽에 부딪혔다.

엉거주춤하게 벽에 기대있는 그를 보며 이은이 우습다는 듯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은이 성큼 그를 향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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