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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71)화 (71/100)

71화

서울대에 합격했고, 장학금을 받고, 학교 다니면서 쓸 돈을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대견하게 생각하다가도 그녀가 부모 없는 고아라는 말을 들으면 얼굴 표정이 바뀐다.

그럴 때마다 이은은 지독하게 상처를 입었다.

비단 그런 편견이 아니더라도 일 자체가 힘들기도 했다.

막 수시에 입학한 대학생에게는 괜찮은 과외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고깃집 불판 닦는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서 프랜차이즈 식당 주방 아르바이트, 호텔 예식장 서빙 아르바이트, 심지어 돈을 많이 준다는 이야기에 빵 공장 아르바이트까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평생 해본 적 없는 고된 일들이 그녀의 팔다리에 멍과 상처를 만들었고, 팔다리가 무거워서 집으로 돌아오던 그 어느 날에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했다.

더 이상 신세 질 수 없다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최소한으로 기댈 수 있는 부모만 있었다면 이은은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소원에 대해서도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소원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을 거다.

소원은 부모가 있으니 고아 계집애라는 소리까지는 안 들을지 몰라도 난생처음 해보는 막일이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발목을 다친 것 같긴 했어.”

이은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 회장을 설득하느라 바빠서 여사로 넘겼는데 어제 소원은 다리를 절룩이면서 귀가했었다.

“아파서 마음이 약해졌고, 마음이 약해져서 엄마가 보고 싶었나 보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그런 경험이라면 이은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많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경험들은 이상하게도 세월이 흘러도 퇴색 되지가 않았다.

부모 없어 겪는 설움을, 반쪽이나마 피가 섞인 동생이 겪는다는 생각에 이은의 마음이 약해졌다.

이은은 정말 스스로도 제 마음을 모르겠다.

백희경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소원이 싫고, 세완과 친한 모습을 보이는 소원이 정말 많이 싫다.

하지만 소원이 그녀와 같은 아픔을 겪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너무 싫었다.

아픈 건 그녀 하나로 족했다.

덕분에 이은은 오늘도 복잡한 마음을 품고 1층으로 내려갔다.

“……!”

그런데 주말이라 그런지 이른 시간인데도 웬일로 1층에 소원이 있었다.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소원이 이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거만 먹고 들어갈 거예요. 어제 밥을 못 먹어서…….”

넘어지면서 쟁반과 접시를 깨고, 손님의 옷에 음식물이 튀게 한 탓인지 어제는 혼나느라 바빠 저녁도 못 얻어먹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밥을 꺼내 먹었는데 공교롭게도 이은을 마주친 것이었다.

조금만 참을 걸, 밥 그게 뭐라고!

소원이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은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이 식탁을 향했다. 물에 만 맨밥 그리고 김치.

이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못된 모습을 보이면 마음 편하게 미워하기라도 할 텐데 소원은 이 집에 온 이후 그들의 눈치를 보며 지나치게 주눅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예전의 그녀 같아서 이은은 소원이 조금은 가여웠다. 반찬이나 좀 제대로 꺼내놓고 먹지…….

“냉장고 안에 먹을 거 많잖아. 굳이, 왜……. 하아.”

말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소원은 마음에 안 드는데 아직 성인도 안 된 어린아이가 눈치를 보는 것은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아무리 소원이 마음에 안 들어도 어린아이 먹는 거 가지고 타박하지는 않는데 내 집이 아니다 싶어서 뭐 하나 먹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기다려봐. 내가 반찬 꺼내줄게.”

이은이 냉장고로 걸어갔다.

소원이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말렸다.

“아니에요. 이거면 되는데!”

“되긴 뭐가 돼? 반찬이 있어야지. 말라붙어 있는 김치 쪼가리 하나 꺼내놓고서는. 김치라도 새로 꺼내든가.”

물에 만 맨밥 옆에 있는 김치가 어제 먹다 남긴 말라붙은 김치라 더욱 더 가슴이 시렸다.

이은이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다.

떡갈비나 보리굴비처럼 굽고 쪄야 하는 것들은 바로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본 밑반찬은 그녀도 충분히 꺼내줄 수가 있었다.

더덕무침, 호두멸치볶음, 꼬막무침 그리고 각종 나물무침들이 식탁으로 옮겨졌다.

“괜찮아요. 더 안 주셔도 돼요.”

소원은 연신 사양했다. 그리고 이은은 그 모습이 참 가슴 아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돌하고 당차던 아이가 부모의 보살핌이 없다는 이유로 참 많이 작아졌다.

그래서였다. 대충 반찬만 꺼내줄까 하던 그녀가 프라이팬을 꺼냈다.

“먹을 만한 건 있어야지. 잠깐만. 국도 데우고, 떡갈비 하나 구워줄게.”

혼자 먹어도 밥만큼은 황제처럼 먹자는 게 이 회장의 생활신조였고, 그래서 그들은 식사를 할 때마다 최소한 따뜻한 국과 따뜻한 반찬 한 가지는 식탁에 두었다.

이 모든 것은 소원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냥 이 회장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뿐이라며 이은이 자기 세뇌를 할 때였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안 하셔도 돼요.”

“할 만하니까 하는 거지. 해줄 때 먹어.”

이은의 말에 입술을 깨물던 소원이 앞으로 나왔다.

“그럼 제가 할게요.”

환자인 이은에게 밥을 얻어먹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이은이 괜찮다며 그녀를 만류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쨍그랑,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이었다.

이은과 소원이 실랑이를 하며 누군가의 몸에 부딪힌 것인지 내열유리로 된 편수 냄비가 바닥에 떨어져서 깨졌다.

막 인덕션에 올린지라 내용물이 뜨겁진 않아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소원과 이은은 그 자체로 매우 당황했다.

“제가 치울게요.”

“아니야. 내가!”

이은과 소원이 서로 유리를 치우겠다며 손을 뻗었다.

“아얏!”

그리고 소원이 비명을 질렀다.

이은이 만지기 전에 먼저 치우려고 서두르다 다친 것 같았다.

“세상에! 괜찮아?”

이은이 소원을 걱정했다. 그러자 소원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얼마 안 다쳤어요.”

하지만 그녀의 말과 달리 꽤 피가 많이 나는 것 같았다.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문 이은이 소원의 손을 키친타월로 대충 감쌌다.

부상 때문에 그녀가 직접 운전을 할 수는 없고……. 택시를 불러야 하나? 이은이 고민하던 그 순간이었다.

“뭐해?”

세완이었다.

순간 이은은 평생을 통틀어 세완이 가장 반갑게 느껴졌다. 그녀가 반색하면 세완을 반겼다.

“마침 잘 왔어. 우리 병원 가야 해. 차 좀 운전해라.”

“너 다쳤어? 괜찮아?”

걱정으로 가득한 표정을 한 세완이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니, 얘가 다쳤어. 넌 보면서도 그런 걸 묻나.”

이은의 말에 세완은 힐끗, 소원의 손을 봤다. 피가 좀 나긴 했지만 멀쩡해 보였다.

“괜찮아. 나중에 병원 가서 봉합 좀 하면 되겠다.”

“네가 의사야?”

“의사는 아니지만 많이 다쳐봐서 알지. 그런 걸로는 안 죽어. 괜찮아. 침 바르면 나아.”

이은이 다친 줄 알았을 때와는 달리 매우 시큰둥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세완!”

그 확연한 온도 차이에 이은이 짜증 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소원에게 잘 해주는 세완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소원은 환자였다.

이은은 세완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말고 차를 대기시키라고 명했고, 그 어떤 맹수보다 강력한 이은의 명령에 세완은 그 어떤 항변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가기 싫어 뭉그적거렸던 것과 달리 병원으로 가는 길은 그 어느 때보다 쾌적했다. 그러니까 세완의 기분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눈만 뜨면 이은의 옆에 있던 꼴 보기 싫은 위인을 떼버렸다는 생각에 세완은 그저 기분이 좋았다.

“윤세 씨랑 함께 가야 할 거 같은데…….”

“자게 내버려 둬. 피도 많이 나는 거 같은데 그 양반은 그냥 자게 내버려 두고 우리끼리 가자. 깨우고, 준비해서 병원 가려면 시간 많이 걸려.”

“그래도 할아버지가 같이 움직이라고 하셨잖아.”

“나 있잖아, 나! 나 못 믿어? 내가 지켜줄게.”

세완은 큰소리를 탕탕 치면서 이은과 소원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침 바르면 낫는다는 부상이 고작 몇 초 만에 병원에 빨리 가야 할 정도로 매우 위급한 상처가 되었지만 세완은 뻔뻔하게도 그 어떤 민망함조차 느끼지 않았다.

윤세의 부재로 인하여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세완을 소원이 말간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랑과 가난은 숨기지 못하는 거라고 하더니 세완의 마음은 정말 거울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저런 사람한테 혹시 나 좋아하는 거냐고 물었던 며칠 전의 스스로가 소원은 정말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든 세완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세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해야 ‘윤세가 있을’ 집에 늦게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세완은 그 궁리는 그들이 병원에 도착하고, 응급실에 들어가고, 소원을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계속됐다.

밥을 먹자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왕 나왔으니 드라이브라도 하고 가자고 할까?

이은이 알았다면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라고 호통을 쳤을 생각들이 세완의 머릿속에서 퐁퐁 피어났다.

하지만 세완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고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세상과 자신을 단절한 채로 고민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귀에 어떤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혈액형이 뭐예요?”

“O형이요.”

"RH-는 아니죠?“

“네, 아니에요.”

간단한 수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본 혈액형을 묻는 것이라고 했다.

평소였다면 백색소음이라 무시했을 이야기였다.

이은도 아니고 소원의 혈액형 따위!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백희경은 AB형인데?’

세완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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