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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68)화 (68/100)

68화

힘이 없어서 발걸음이 천근만근인 것은 똑같지만 평소와는 어딘가 달랐다. 도대체 어디가 이상한 것인가, 하고 유심히 살펴보니 다리를 절뚝였다. 어딘가 다친 것 같았다.

걸으면서도 손바닥으로 연신 얼굴을 문지르는 것을 보니 눈물을 닦는 것 같기도 했다.

희경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도대체 우리 딸,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우는 거니!

엄마 마음이라는 것이 다 똑같다.

내 자식이 눈물 흘리면 엄마는 피눈물을 흘리고, 내 자식이 아프면 엄마는 심장을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안전하게 지내다 신장 이식할 때 도움을 받으라고 이은의 옆에 붙여 놓은 건데 그것이 딸에게 이렇게 큰 아픔을 줄 것을 알았다면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을 거다.

엄마가 지켜보는지 모르는 딸은 절룩거리며 한참 동안 비탈길을 올랐고, 곧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희경은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 같은 딸의 뒷모습에 너무나도 가슴 시려서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 * *

소원이 막 집 안에 들어갔을 때는 가족들이 모여 이은의 복직을 논하던 순간이었다.

이 회장과 세완, 춘천댁이 주요 멤버이고, 더부살이인 윤세가 참관인으로 참석했다.

처음 이은이 휴가를 종료하고 복직하기로 결심했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은 수월할 거라고 예상됐었다.

“난 찬성! 무조건 찬성!”

그녀가 더 이상 윤세와 단둘이, 집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세완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도 있고, 춘천댁도 있고, 그 외에 다른 고용인들도 있어서 단둘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은이 그의 오해를 정정했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세완은 좁은 공간에 윤세와 이은만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마냥 행복했다.

“좁은 공간에 둘만 있다니…….”

세완의 왜곡에 이은이 재차 그의 표현을 정정했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은은 몇 번 시도를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래. 네가 내 말 안 듣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고 이은은 복직만 하면 된다.

많은 것을 내려놓은 이은은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그냥 세완의 동의 하나만 안고 가기로 결심했다.

가장 큰 난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세완의 동의를 얻었고, 그 다음에는 춘천댁의 동의를 얻었다.

“나는 회사에서 일하는 네 모습이 가장 멋있더라.”

할 줄 아는 것은 밥과 청소 같은 가사일 뿐인지라 이혼하고 정말 답답하고 막막했다는 춘천댁은 커리어 우먼 이은의 앞날을 응원하고 축복했다.

이은의 부상이 걱정되니 그래도 몸조심하고 건강 조심하는 것은 잊지 말라는 조언이 뒤따르긴 했지만 그 정도는 허용 범위 안의 일이었다.

이은은 그렇게 가장 큰 난관이었던 세완과 춘천댁이라는 거대한 두 산을 넘었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복직에 그 어떤 방해도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가장 큰 난관이 발생했다.

“아, 출근은 무슨 출근? 몸부터 나아야지!”

이 회장이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이은을 지지하고 그녀의 커리어를 응원하던 존재의 배신에 이은은 크게 당황했다.

이 회장의 배신에 당황한 것은 이은 만이 아닌 듯했다.

“할아버지, 왜요?”

“회장님, 이은이가 복직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세완이 가장 먼저 반발했고, 춘천댁도 세완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왜긴 왜야? 애가 아픈데 보내긴 어딜 보내? 아픈 애가 일 안 하면 우리 회사 망하나? 다 굶어 죽어? 그거 아니잖아!”

이 회장의 말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일을 안 하면 세완은 상당히 높은 확률로 망할 것 같았다.

물론 세완은 열심히 일을 한다.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현재 상무실 비서로 있는 윤 대리도 세완의 업무 능력이나 업무 처리 속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견을 달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윤 대리 개인의 영역이었다.

도대체 세완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얼마 전부터 거의 매일같이 전화 와서 복직을 해 달라고 매달리는 윤 대리를 떠올리며 이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애물단지 세완이, 누가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할까 봐 안과 밖에서 모두 동일하게 사고를 친다.

도대체 뭐 때문인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복직은 그들 모두에게 필요했다.

“할아버지, 저 잘할 수 있어요. 몸에 무리 가지 않게 잘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은이 이 회장을 달래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일만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제 몸 축나는 줄도 몰라 정신이 없으면서 무리를 안 하긴 뭘 안 해? 이 할애비 애간장 다 끓게 하지 마라. 복직을 해도 낫고 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에게 지금 가장 안전한 곳은 그들의 집이었다. 이 회장은 백희경의 존재를 걱정하며 어떻게든 이은의 복직을 미루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상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지라, 누구도 이 회장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백희경으로 인해 똑같이 마음을 끓이고 있는 세완조차 이 회장의 편을 안 드는데 그 누가 이 회장의 마음을 알아주나!

손녀 걱정에 이 회장이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을 때였다.

-띠띠띠 띠띠띠 띠

갑자기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문을 향했다. 소원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모습에 소원은 지극히 당황했고, 예상치 못한 소원의 등장에 가족들도 당황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춘천댁이 시계를 확인했다. 아닌 게 아니라 퇴근 시간이 맞긴 했다.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길 수는 없는 것이 소원이었다.

“왔느냐? 오늘도 고생했다. 수고했어.”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어서 이 회장은 소원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녀의 타이밍 좋은 귀가에 옳다거니, 하면서 기회를 잡아 몸을 일으켰다.

“어흠! 어쨌든 나는 반대야!”

그리고 대화를 종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세완이 다시금 잽싸게 이 회장의 말꼬리를 잡아 반발했다.

“제가 잘 보살피면 되잖아요. 출근할 때 모셔가고, 퇴근할 때도 모셔오고! 이은이가 무리하지 않도록 운전기사 노릇 톡톡하게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세완은 자신이 얼마나 충실한 일꾼이며 머슴인지에 대한 자기 PR 또한 서슴지 않았다.

“이은이 몸 약한 거 잘 알고 있어요. 잘할게요. 저 한 번만 믿어 주세요. 네?”

“…….”

“그리고, 아! 그래! 일도 있잖아요. 할아버지 저 모르세요? 백수 겸 한량! 저는 이은이가 있어야 사람 구실 하잖아요. 네? 제발요!”

세완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서라도 이은의 복직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 회장이 잠깐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디에다가 던져 놔도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을 것 같은 손자 놈보다는 역시 똑똑하고 예쁜 손녀 김이은이 훨씬 더 중요했다. 이 회장은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너 사람 구실이야 네가 알아서 하는 거고! 이은이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할 생각일랑은 꿈도 꾸지 마라!”

이 회장이 잘라 말했다. 그리고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세완이 이 회장을 쫓아 방으로 향했다.

이은도 세완과 함께 이 회장을 설득하기 위해 그의 방으로 향했다.

춘천댁은 그녀의 손으로 직접 키운 혈기왕성한 두 아이가 승리하기를 기도하며 그들을 위한 녹즙이라도 하나 준비해 주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윤세는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혼자 앉아 있기 민망해 몸을 일으켰다.

“안녕, 꼬마야! 퇴근 축하한다.”

소원에게 일방적인 인사를 건넨 윤세가 2층 제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소원은 자신의 등장을 기점으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을 보며 지독한 외로움을, 쓸쓸함을 느꼈다.

애초에 기대를 한 적도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많이 시렸다.

* * *

절뚝거리며 3층에 올라가서 샤워하고, 다친 발목에는 집에 올 때 산 파스를 붙였다.

혼자서도 잘해요, 그녀는 이제 곧 성인이니까!

소원이 씩씩하게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씁쓸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건지 모르겠다.

내 가족 없이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한다는 것이 이런 건가 싶고, 동시에 저들이 참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이은이 부러웠다.

“우리 이은이, 우리 이은이, 우리 이은이……. 누가 보면 세 살 어린애인 줄 알겠어.”

소원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입 밖으로 말을 뱉고 난 뒤에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말을 취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발목을 다쳐 절뚝거리는데도 아무도 걱정해 주지 않는 그녀와 달리 모두가 걱정해 주는 이은이 정말 부러웠다.

집에 얹혀사는 것은 이은이나 그녀나 똑같은데 사람들은 이은에게만 너그러웠다.

그녀가 더 어리고, 더 보호가 필요하고, 더 힘든데…….

아까 잔뜩 울었음에도 소원은 다시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우리 엄마, 백희경 씨! 소원이만 있으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피곤하지 않다고 하던 그녀가 자꾸만 그리웠다.

“나도 데리고 가지…….”

소원이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소원은 그녀의 엄마 아빠가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다.

이은을 따라가라는 엄마의 마지막 당부 때문에 이은을 따라오긴 했지만 아직도 그녀가 왜 이 집으로 와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원은 그냥 외로웠다. 그리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술과 도박으로 속을 썩였던 터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정신이 멀쩡할 때는 누구보다 소원을 예뻐해 줬던 아빠도 보고 싶었다.

소원이 제 가족을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을 때였다.

- RRR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는 한참 동안 울리다가 꺼졌다.

흔한 광고 전화겠거니 하면서 무시를 하려고 하는데 같은 번호로 또다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소원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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