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보통 사람들의 집 계약이 전세, 그러니까 연 단위로 이뤄진다고 하면 쪽방촌의 계약은 기본이 월 단위, 가끔은 일 단위로도 이뤄진다.
월세는 30만 원, 일세는 만 원, 보증금은 필요 없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니만큼 세를 낼 만큼의 돈이 있으면 사는 거고, 없으면 노숙을 하는 거고……. 그래서 살다가 쪽방을 떠나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바로 쪽방촌의 삶이라고 했다.
백희경은 바로 그런 곳에서 한 달을 머물다가 불과 얼마 전에 떠났다고 했다.
“그 뒤로는 전혀 보지를 못했고? 아니, 대한민국에 CCTV가 몇 개인데!”
주택가와 상가, 버스와 지하철, 회사 그리고 식당과 커피숍까지! 심지어 대로변에 있는 CCTV도 있다.
CCTV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CCTV가 많은데 그 수많은 카메라가 어떻게 백희경 하나를 못 잡아내나!
이 회장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그 수많은 CCTV는 유독 빈민가에서는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비서실장은 그 부분을 이 회장에게 피력했다.
“그러면 방법이 없다는 얘긴가?”
“현재로서는요.”
백희경을 잡는 것도 뭔가 실마리를 잡아야 가능하고, 실종된 시신들을 찾는 것도 뭔가 증거나 흔적을 찾아야만 가능했다.
현재로서는 경찰이나 BS그룹 시큐리티가 아니라 FBI나 CIA라고 해도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하는 비서실장의 이야기에 이 회장의 얼굴이 난색으로 젖어 들었다.
“정 방법이 없겠는가?”
“죄송합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을 신조로 삼고 살아온 이 회장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이 회장이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쉽게 생각했는데 갈수록 상황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슬슬 손자 녀석도 윤세에게 질투심을 품고, 앞으로 잘 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백희경이 이렇게 골칫덩어리가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애초에 이은을 처음 데려올 때부터 백희경과 관련한 부분을 잘 해결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순히 그녀에게 각서만 받을 일이 아니라 보육원 원장에게도 입단속을 시켜 놓고, 이은의 호적 자체를 아예 바꿔 버린다는 식으로…….
지나간 일들을 후회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냐마는 이 회장은 백희경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은을 생각하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원수지. 원수야. 세상천지 이런 원수가 없어. 사람 꼴을 하고 있다고 다 사람인 것도 아니고…….”
백희경과 이은을 떠올린 이 회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와 조카라는 매우 친밀한 관계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인간사를 다 아는 것은 아니라지만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나이가 듦에 따라 사는 방법과 삶의 법칙에 대해서 조금은 알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매번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다.
모쪼록 하루 빨리 이 일이 해결되어 아이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대저택들이 모여 있는 평창동에서도 이은이 살고 있는 이 회장의 저택은 꽤나 중심지에 가까웠다.
넓은 대지도 그렇지만 골목의 끝자락에 가까운 안쪽이라는 위치가 특히나 더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이 회장의 저택은 이 골목 어디에서 보든 잘 보이는 편이었다.
희경은 눈을 내리깔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 회장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대문 밖으로 몰려나와 여기저기에 CCTV를 추가로 달고 있었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정장 입은 사람들도 여러 번 줄을 지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저택에 사는 위인 중 하나의 몸뚱이 안전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개미 떼 같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희경은 저들의 월급이며 일당, 몸값 등을 주는 데 얼마나 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원이 떠올랐다.
“내 딸은 식당 밥순이를 만들어 놓고……,”
이러면 안 되지 싶어서 서둘러 입을 막긴 했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희경은 감출 수가 없었다.
인품? 개뿔이!
오갈 데 없는 고아를 남부럽지 않게 길러낸 인격자라는 평가를 듣는 이 회장이 어째서 소원이는 보듬지를 않는 것인지 그녀는 모르겠다. 이은이 같은 녀석보다 훨씬 나은 것이 그녀 딸인데!
그냥 이은이가 운이 좋았다고 하기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그녀의 딸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그리고 새삼 이은에 대한 미움이 밀려왔다.
그녀가 버려 준 덕에 좋은 집에 거둬져서 좋은 교육 받고,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제 동생도 거둬줄 줄 알아야지 남보다 못한 이은의 행동에 희경은 그저 화가 났다.
형님은 그래도 거둬 준 것이 어디냐며 그녀더러 마음을 좀 가라앉히라고 하지만 공부 잘하는 내 딸, 어떻게든 좋은 집 더부살이로 들어가 편하게 살길 원했는데 식순이도 그런 식순이가 없게 만들어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은을 죽이자는 남편의 말에 반대하지 말 것을!
희경은 제가 떠올린 무서운 생각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다시 그 생각을 이어갔다.
아닌 게 아니라 남편의 말을 들었으면 우리 소원이는 편안하게 병 치료하면서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소원의 행방을 묻기 위해 버스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굴러떨어진 이은을 잠깐이나마 걱정했던 스스로가 희경은 정말 바보처럼 느껴졌다.
귀하고 소중한 내 딸, 생각 같아서는 데리고 오고 싶은데 지금으로써는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희경은 창문 앞에 서서 온갖 상념을 다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 * *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 아니, 사실은 평소보다 조금 지친 하루였을 수도 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 만은 하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녀의 부실한 몸이 드디어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 쨍그랑!
벌써 세 번째 떨어뜨리는 접시에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소원이 서둘러 사과하며 접시를 주우려고 했는데 갑자기 핑, 하고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소원은 손으로 엉거주춤하게 바닥을 짚었다.
이렇게 2, 3분만 있으면 그래도 조금은 괜찮아지는데 식당 아주머니나 손님들을 그녀를 기다려 줄 의향이 없는 것 같았다.
“아, 진짜! 이 얼룩 어쩔 거야!”
하얀 원피스에 김치 국물이 튄 20대 어느 아가씨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소리쳤고, 주인아주머니는 득달같이 달려와 그런 손님에게 사과했다.
“아유, 죄송해요. 세탁비는 드릴게요. 아우, 이 옷을 어쩐대…….”
“그럼 세탁비도 안 주려고 했어요? 이거 오늘 처음 입은 새 옷이란 말이에요. 이게 얼마짜리인 줄은 알아요?”
여자는 소위 명품이라는 브랜드의 이름을 대며 주인아주머니에게 화를 냈다. 주인아주머니는 그녀에게 연신 사과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원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소원은 그걸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쳤네.”
소원은 바닥에 쓸려서 상처 난 그녀의 손바닥과 무릎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신장 기능이 떨어지면 적혈구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빈혈이나 어지럼증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통은 무기력함과 피곤함 정도만 느끼고 마는데 요즘 무리를 많이 했더니 빈혈 증세가 도진 모양이었다.
병원에 가야 하나? 하지만 돈은?
소원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 못 하고,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 못 하고! 어쩌다가 그녀의 신세가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철이 없는 생각이고 행동이라는 것은 알지만 아직 많이 어린 그녀는 자꾸만 모든 것을 그녀 입장에서만 생각하게 된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고, 모든 것이 다 싫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 하고 맺히려는 찰나였다.
“얘, 뭐하니? 바닥 안 치우고?”
“죄송해요. 지금 하려고…….”
“말만 하면 되니? 얼른 해! 빨리!”
주인아주머니가 그녀를 발로 툭 하고 차면서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소원은 그 순간 너무 서러워져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주인아주머니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그녀가 계속 실수를 하니 화도 나겠지.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를 한다고 해도 마음이 너무나도 서러웠다. 나도 우리 엄마한테는 귀한 딸인데…….
너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하던 엄마, 설거지라도 한 번 하려고 하면 냉큼 뺏어 들고서 너는 이런 험한 일 하지 말라고 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소원은 지독하게 외롭고 힘들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어머, 얘! 내가 뭘 어쨌다고 울어? 실수는 네가 했잖니! 얘! 소원아!”
“크흡, 크흡…….”
울지 말라고 말하는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마저 너무 서러워서 소원은 크흡, 크흡, 애써 삭이던 울음을 결국 터트려 버렸다.
“엄마아!”
엄마가 보고 싶었다.
만약 엄마를 볼 수 없다면 며칠 전, 식당 주변에서 봤던 엄마를 닮은 그 여자라도 보고 싶었다. 그녀가 정말 엄마면 좋겠다.
엄마를 부르며 목청 높여 우는 그녀의 모습에 주인아주머니와 가게에 있던 손님들 모두가 당황하며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소원은 이 순간만큼은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그냥 엄마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희경은 고개를 빼고 이제나저제나 딸이 오려나 그녀의 귀가를 기다렸다.
그녀는 매일 똑같은 시간이 되면 이 회장의 저택 주변을 훔쳐본다. 그리고 절여진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는 딸을 확인한다.
보면 속상하리란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귀한 내 딸, 집에 잘 들어가는지 궁금해서 희경은 매일 이 시간이 되면 저 아래 골목길을 내려다보고, 이 회장의 저택 주변을 훔쳐봤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흔들거리며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한 인영이 보였다.
희경은 그 모습이 반가워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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