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누가 그랬나, 대한민국이 공정하고 공평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대한민국은 공정하고 공평한 민주주의 사회일지 몰라도 재벌 그룹은 그렇지 않았다.
BS그룹의 시큐리티 정보보안팀 소속인 박 팀장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찬주나 그가 운영하는 사설정보업체 ‘태산’ 사람들이면 모를까 세완의 조부인 BS그룹 소속인 박 팀장은 세완의 존재를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협업 때문에 ‘태산’에 와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박 팀장에게는 세완이 직속 상사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직속 상사의 전화를 무참하게 무시하고서 멀쩡한 직장인은 없었다.
“하하, 하하하…….”
울지 못해 웃는다는 말이 지독하게 잘 어울리는 표정을 한 박 팀장의 머뭇대는 모양새에 찬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오, 진짜!
몰랐던 사실은 아니지만 그 녀석이 정말 회사까지 뛰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자료를 분석하고, 그곳에서 정보를 뽑아내는 것이 그들의 일인 것은 맞다. 하지만 정보를 뽑아내려면 자료가 충분해야지!
빈약하다 못해 거의 없는 것에 가까운 자료들을 붙들고 어떻게든 분석해 자료를 캐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고용주의 지나친 독촉은 그 자체로 짜증만 일으킬 뿐이었다.
“망할 자식!”
돈만 있었으면 그놈의 투자금 따위는 냉큼 다 뽑아 버리고 쫓아냈을 텐데!
찬주가 마음의 소리를 뱉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닦달을 하려면 괜찮은 떡밥이나 주고서 성질을 부릴 일이지 누가 봐도 개털 같은 자료들을 들이밀면서 결과물을 뽑아내라고 한다.
생각 같아서는 쌍욕을 퍼부어 주고 싶은데 그런 망할 자식도 클라이언트이자 투자자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서비스직이 어려운 거라던 어느 제3금융권 대표의 말을 떠올리며 찬주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잔소리를 퍼부어 대려나,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찬주가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였다.
“……?”
박 팀장의 모니터가 눈에 보였다. 어제자 이 회장의 저택 주변 CCTV인 듯했다. 그런데 낯선 인물이 보였다.
찬주를 전화를 걸려다가 말고 다시 핸드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네?”
“저기, 집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애요.”
찬주가 알기로 이 회장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 중 저만한 나이대의 여자애는 없었다.
수행 기사인 김 기사나 박 기사의 아이들은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했고, 입주 가정부인 춘천댁에게는 아예 가족이 없었다.
아이를 못 낳아 소박을 당해 쫓겨났고, 이후 이 회장에게 고용되어 세완과 이은을 자식처럼 길렀다는 것이 그가 알고 있는 춘천댁의 가족사였다.
그 외의 다른 고용인들은 모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다.
가정부며 정원사, 집사, 수행기사들을 줄줄이 비엔나로 엮어 십수 명씩 거느리고 사는 여느 재벌 집과 비교하면 이 회장의 집 구성원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든 것이 번잡스러운 것을 질색하고, 낯선 존재를 집 안에 들이는 것을 싫어하는 이 회장의 성품 때문인데 그런 그가 중년의 여성도 아니고 굳이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를 고용인으로 들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새로 들인 고용인의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고등학생 아이가 있을 정도면 그 부모 되는 사람들의 나이가 50대라고 봐야 하는데 이 또한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게 있었다.
재벌가 사람들은 젊었을 때부터 그들의 옆에서 일하며 오랫동안 신뢰로 다져진 존재가 아닌 이상 쉽게 옆에 두지 않는다.
특히 가장 돈이 필요할 인생 주기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나!
어떻게든 재벌가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기자들과 산업스파이들을 떠올리며 찬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때 박 팀장이 말했다.
“아! 상무님이 데려온 여자애네요.”
“세완이가요?”
“예, 그 섬에서…….”
“아!”
찬주가 알겠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완이 섬에서 백희경의 딸을 데려왔다는 것은 찬주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택 주변을 맴돌던 백희경의 동선을 쫓고, 백희경과 관련된 외부 기록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어서 CCTV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직원들을 믿었다. 그가 모든 것을 전부 다 직접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얼굴이나 한번 보죠.”
찬주가 말했다.
소원의 영상을 보지 못했다면 굳이 CCTV를 뒤져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일단 그의 눈에 뜨였으니 찬주는 이번 기회에 백희경의 딸이, 그리고 김이은의 반쪽짜리 동생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나 얼굴이나 한번 보자 싶었다.
찬주의 명을 받아 박 팀장이 모니터를 조작했다.
확대, 확대, 확대, 선명하게!
찬주가 집중하고 여자아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소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백희경의 딸은 중단발의 머리를 질끈 묶은 평범한 모습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유별날 정도로 옷이며 화장에 신경을 쓴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착하고 순해 보이는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범생 같아 보이는 아이!
하지만 이은과는 별로 닮지 않았다.
“아빠가 달라서 그런가…….”
찬주가 중얼거렸다.
“혹시 다른 영상 있어요? 이 영상 말고 다른 각도에서 찍은 영상이요.”
“아, 네! 있습니다.”
찬주의 말에 박 팀장이 다른 CCTV 영상을 화면에 띄웠다.
이번에는 머리를 풀고 있는 모습이었다.
옷은 방금 본 CCTV 영상과 동일하고, 도대체 뭘 하다 온 것인지 피곤에 쩔어 몸이 축 늘어진 모양새였다.
“확대해 보세요.”
찬주가 말했다.
박 팀장은 영상을 확대했다. 아까보다는 좀 더 선명한 화질의 동영상이었다.
찬주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 영상을 관찰했다.
이렇게 보니 더 안 닮은 것 같았다.
이은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것은 세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원한 것은 아니지만 세완과는 집안끼리 아는 사이였던 찬주도 그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공유했다.
그리고 그런 찬주의 기억 속에서 이은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똘망똘망함을 자랑했다.
‘세상아, 덤벼라! 나를 건드리면 너의 멱살을 따 주마!’
찬주가 바라본 10대 후반의 이은은 그런 모습이었다.
남녀의 차이를 떠나 김이은은 태생이 전투종족이었다. 체력이 저질 체력이어서 그렇지 그녀에게는 체력 그 이상의 깡다구가 있었다.
이은도 단발머리이니만큼 헤어스타일이 비슷하면 대충 얼굴이 비슷해 보일 법도 한데 참 이렇게 안 닮은 자매도 처음이었다.
“세완이 얘는 도대체 뭘 보고 닮았다고 한 거야?”
찬주가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섬에서의 마지막 날, 폭우를 뚫고 찾아와 세완과 이은에게 우리 엄마한테 나쁜 말 하지 말라고 대거리했다는 것을 보면 성질머리는 김이은과 얼추 비슷한 거 같은데 외적인 부분은 정말 안 닮았다.
찬주는 혹시라도 닮은 구석이 있나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뭐, 아빠 닮았겠지.”
할 일이 태산인데 남의 얼굴 보고 있으면 뭐하나!
소원이 누구를 닮았든 그건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백희경의 행방이고, 그날 섬에서 죽은 두 남자의 시신의 행방이었다.
찬주는 박 팀장에게 CCTV 창을 끄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두 번도 울리지 않았다.
세완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클라이언트 겸 투자자와 함께하는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 * *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누군가는 바쁘게 움직였고, 또 누군가는 그런 그들을 관찰했다.
세완이 이은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 이은과 윤세가 함께 있는 모습, 윤세가 세완을 약 올리는 모습, 심지어 세완이 찬주를 들들 볶아 어떻게든 백희경을 잡으려고 하는 모습까지 이 회장은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젊다는 것은 좋은 거지. 젊은이들은 활기찬 게 가장 좋은 법이야.”
이은의 옆에 있는 윤세를 노려보는 세완의 눈빛에 살기마저 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회장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허허, 웃음을 흘렸다.
이러다가 세완이 자신의 마음 깨달으면 좋은 거고, 그렇게 연애해서 손녀가 먼저 생기면 그건 더 좋은 거고!
이 회장이 허허실실한 웃음을 토했다. 인생 뭐 별거 있나,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지!
하지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를 외치며 득도한 것처럼 행동하는 이 회장에게도 아직 세속에 묶인 부분은 분명히 존재했다.
비서실장이 은밀히 이 회장을 찾았다. 이 회장은 이은과 세완 그리고 윤세가 모르게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
이 회장이 눈을 반짝이며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뭐 알아낸 것은 있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회장이 원하는 결과는 없는 모양이었다.
윤세가 입주한 뒤로는 언제나 해맑았던 이 회장의 얼굴에 슬쩍 먹구름이 꼈다.
“백희경은…….”
“죄송합니다.”
비서실장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뱉어냈다.
비서실장의 말에 따르자면 그가 알아낸 정보들이 세완이 알아낸 것보다 많지는 않다고 한다.
“어쩌면 상무님이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찬주의 사설정보업체까지 돌리고 있는 정황을 보면 그의 추측이 거의 100% 맞을 거라고 말했다.
이 회장이 물었다.
“청장이 별로 도움이 안 된 모양이지?”
공권력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백희경이 벌집촌으로 숨어들어 간 것을 알게 된 이후, 이런 일에는 공개적인 권력이 좀 더 유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좀 더 합법적으로 벌집촌, 그러니까 쪽빵촌을 뒤지기 위해 이 회장은 경찰청장을 움직였다.
그라면 경찰들을 움직여 백희경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예측은 틀렸다.
“이미 거취를 옮긴 듯합니다.”
“이미 옮겼다고?”
“네. 형사들이 범인 수색을 핑계로 동네를 샅샅이 뒤져서 백희경이 계약한 집을 찾아내긴 했는데 보름 전부터 집에 들어오지를 않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