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잘 안 잤으면 어쩌시려고?
윤세는 그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종종대며 이은의 뒤를 쫓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이은을 재워 주거나, 최후의 수단으로는 자신이 대신 잠들어 줄 것 같은 모습인지라 윤세는 세완의 답변이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윤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궁금증을 가지고 있든 세완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완은 마이웨이로 이은만 쫓아다녔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찬물 마시는 거 별로 안 좋대.”
“…….”
“그, 뭐라더라? 내가 기사에서 봤거든. 체온보다 약간 낮은 30도 전후?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
“…….”
“그렇게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몸속 노폐물과 독소를 제거하고, 피부 건강을 개선하고, 소화가 잘되고, 배고픔을 덜 느끼게 되고, 음식에 대한 욕망을 줄여서…….”
세완이 기사에서 봤다는 내용을 책 읽듯이 읊어 댔다.
이은이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는 순간에도, 물을 다 마시고 냉장고를 여는 순간에도, 화장실로 이동하는 그 순간에도 이은을 따라다녔다.
방금까지 윤세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던 맹수가 어미 새를 따라다니는 아기 새와 비슷한 모양새로 변했다.
윤세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재밌는 것은 오직 윤세만이었나 보다.
뒤에 인간형 고양이 한 마리를 매달고 돌아다니던 이은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짜증이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좀!”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졸졸졸 이은을 쫓아다니던 세완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이은이 그런 세완에게 소리쳤다.
“어디까지 따라올 건데? 나 화장실 갈 거거든!”
“그…….”
세완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잠깐 방황했다.
그의 오른손 검지도 방황했다. 잠시 허공을 뱅글뱅글 돌던 세완의 오른손이 얌전히 멈춰서 화장실을 가리켰다.
“가. 얼른. 비어 있다. 지금 들어가면 되겠네. 우리 이은이 내가 화장실 문 앞까지 데려다주려고 그랬지.”
해사하게 웃은 세완이 얼른 화장실로 가라는 듯 성큼 한발 먼저 걸어가 화장실 문을 열어 줬다.
잘생긴 외모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세완이 웃는 모습은 정말 같은 남자인 윤세가 보기에도 화려하고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윤세는 자신도 모르게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외모에 감탄한 것은 윤세뿐인 듯했다. 이은은 짜증 난다는 듯이 그를 한 번 노려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는 큰 소리가 이은의 현재 심정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 앞에서 세완은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2층에도 화장실이 있는데 왜 굳이 1층 화장실은 간다고 해서…….”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매너를 지키려는 듯 화장실에서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그는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화장실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윤세를 경계하면서.
그 모습을 보며 윤세가 생각했다.
‘참 재밌는 위인이란 말이야.’
생긴 것만 보면 의자왕이 대수냐, 여자란 여자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거느리고 다니면서 인생을 즐기게 생겼는데 하고 다니는 모양은 어떻게든 짝사랑하는 소녀에게 말을 걸려고 노력하는 사춘기 소년이었다.
30대 초반이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윤세의 동료나 후배들 중에는 아이 아빠인 사람들도 제법 되는데 저 정도로 순진하고 순수한 인사는 보기 힘들었다.
윤세는 기이한 동물원의 동물을 보듯 세완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세완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그를 노려봤다.
“뭘 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한 공격성을 보이는 세완의 모습에 윤세가 울지 못해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볼 때면 독살스럽기가 그지없는데 어찌하여 이은 앞에만 서면 순진하고 착실하고 수줍기가 그지없는지…….
윤세는 그것이 너무 궁금해서 자신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습니까?”
“뭐가 말입니까?”
“그…… 김이은 씨 말입니다. 많이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
윤세가 화장실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온몸으로 이은을 좋아하는 마음을 뿜어내고 있는 세완이니만큼 윤세는 세완이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데 네가 뭐 보태 준 거 있냐는 태도로 뻔뻔하게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다.
어쩌면 내가 이만큼 그녀를 좋아하니 너는 김이은에게 접근하지 마라, 이렇게 선전포고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 모든 예상이 빗나갔다.
“그, 아니, 누가, 누, 누구를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그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대답이 튀어나왔다.
윤세는 놀라서 눈만 끔벅였다. 세완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자신의 대답에 대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그냥, 뭐 친구니까! 친구로서! 친구로서…….”
말이 막혔는지 세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윤세는 이제 정말 진짜로 웃음이 나왔다.
아니, 나잇살도 먹은 양반이 어쩌면 이리도 순진한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거면 말이나 더듬지 말든가! 그것이 아니라면 얼굴이나 빨개지지 말든가!
30대 중반인 윤세와 비교하면 많아 봤자 다섯 살 정도 차이 날 거다. 그런데 이건 뭐…….
윤세가 인생의 산전수전을 모두 다 겪은 인물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눈앞의 청년은 적어도 제가 좋아하는 여자와 관련해서는 지독할 정도로 순진했다.
“그래. 뭐, 친구로서 친구를 걱정하는 거죠. 이상한 사람이 붙을까 봐 경계도 하고!”
드디어 할 말이 생각난 것인지 한참을 더듬거리던 끝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변명을 문장으로 뱉어내긴 했는데 이미 세완의 속내는 만천하에 다 밝혀진 이후였다.
“아! 그렇습니까? 친구?”
“그렇죠. 친구! 우리가 이래 봬도 일곱 살 때부터 함께 자랐거든요.”
세완은 윤세에게 이은과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관계인지에 대하여 피력했다.
세완의 마음은 그를 며칠 보지 않은 윤세도 다 알겠는데 세완만 모르고 있었다.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까?
윤세는 정말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래서 미끼를 하나 던졌다.
“특별한 친구 사이, 좋네요. 부디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죠? 그래야죠. 뭐, 그런 거죠. 친구니까. 친구죠.”
잠깐의 머뭇거림 뒤에 세완은 떨떠름하게 윤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은 것인지 끝에 자꾸 부연설명이 붙었다.
윤세가 보기에는 머리와 가슴의 인지 부조화로 생각과 말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기도 했고.
윤세는 그 모습을 동물원 앵무새 구경하듯이 바라봤다.
그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남자의 풋사랑이 윤세는 퍽이나 신기했다. 그리고 문득 이은에 대한 호기심도 피어났다.
과연 저 여자가 재벌가의 유일한 후계자가 저렇게 온 마음을 바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여자일까, 라는.
세상의 편견이 깃든 속물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모습을 보이든 세상에 받아들여진 적 없었던 윤세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분명 대한민국에 연좌제는 없을 텐데, 한때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윤세는 그 어떤 곳에서도 사람들의 뒷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도 그는 살인범의 아들이었고, 국시에서 수석을 해도 살인범의 아들이었다.
보험금을 노려 부모와 아내, 자식을 모두 죽인, 그리고 죽이려고 했던 아버지의 범죄로 인해 윤세 또한 피해자 중 하나였음에도 사람들을 윤세를 가해자의 자식으로만 봤다.
의사였던 윤세가 모든 것을 던지고 프랑스 외인부대의 용병이 되고, 시큐리티의 경호원이 된 것은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윤세는 세완이 그리고 이 집이 꽤나 신기했다.
재벌가의 유일한 후계자이면서 배경 상관없이 마음 하나만 가지고 이은을 좋아하는 세완도 신기하고, 그런 이은이 자신의 예비 손자며느리라면서 그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이 회장도 신기하고…….
내가 이상한 것일까, 아니면 이 집 사람들이 이상한 것일까? 윤세는 자신이 마치 낯선 세상에 빠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이은이 화장실에서 나오고, 이은을 발견한 세완이 득달같이 그녀에게 달려간 이후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됐다.
* * *
그들의 매일매일은 언제나 똑같았다.
윤세에 대한 경계로 하루를 시작해서 윤세에 대한 경계로 하루를 종료하는 세완의 하루처럼, 찬주의 하루도 자료 분석으로 시작해서 자료 분석으로 끝났다.
없는 자료를 쥐어짜서 어떻게든 유의미한 정보와 결과를 뽑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찬주가 하는 일이다.
요즘 회사 직원의 절반은 어떻게든 새로운 자료를 구하러 뛰어다니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어떻게든 자료를 분석해 정보를 뽑아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회사 직원들 중 마음 편하게 노는 인력은 아무도 없었다.
단순한 의뢰여도 그렇게 했을 텐데 심지어 그 의뢰인이 여자 때문에 눈이 뒤집힌 공동대표여서야! 누구도 범인이나 그 범인의 흔적을 잡기 전에 쉴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 해가 뜨고 출근 시간이 되면 어느 미친 자의 연락이 온다.
- RRR
전화벨이 울렸다.
“대표님…….”
박 팀장이 그를 불렀다.
“무시해요.”
찬주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찬주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찬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시 후, 찬주의 핸드폰이 조용해지고 박 팀장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박 팀장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 벨 소리가 끊기고 나니 이번에는 메신저와 문자가 미친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 팀장이 찬주에게 진지하게 질문했다.
“대표님,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러다가 찾아오시면…….”
“출근해야지 오긴 어딜 옵니까?”
찬주는 당연한 듯 세상의 상식을 이야기했다. 직장인 놈이 오긴 어딜 와?
하지만 찬주의 당연한 질문을 들은 박 팀장은 어설픈 웃음만 흘려댔다.
“하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분이 회장님의 하나뿐인 손자라서요.
박 팀장의 뭉개진 말끝에 그가 정말 하고자 하는 말이 담겼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그들이나 결근을 하면 단두대행이지, 그룹 회장의 유일한 손자에게는 단두대 따위는 그냥 애들 장난감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