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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64)화 (64/100)

64화

샤워를 하고 방 안에 들어온 소원이 침대 위에 걸터앉아 화장대 너머 거울을 보며 토너와 로션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러다가 멈칫했다.

“엄마 같았는데…….”

검은 티에 청바지인 평범한 차림인 데다가 모자를 푹 뒤집어써서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왠지 그녀의 감으로는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예감이 그리고 직감이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엄마면 어서 그녀를 데리러 와야 할 텐데 도대체 왜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상황에 소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쨌거나 만약 그 사람이 엄마가 맞다면 엄마가 정말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서 엄마가 그녀를 데리러 오면 좋겠다.

사실 소원은 며칠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목표는 독립! 그리고 경제적 자립!

부모님 둘 중 그 어느 누구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의 유산을 받을 수는 없다고 했다.

온통 빚투성이인 가계부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지라 그쪽으로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실종 신고를 했음에도 부모님의 통장에서 10원 하나 빼 올 수 없다는 것은 조금 충격이었다.

이래저래 더부살이 신세, 얹혀사는 신세를 못 벗어나는 제 모습에 소원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좋은 곳으로 구해서 참 다행이다.

제 몸이 그리 건강하지 않아서 못 버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팔다리가 안 아픈 곳이 없이 피곤하긴 하지만 아르바이트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밥을 각자 알아서 사 먹어야 하는 곳도 많다는데 소원이 일하는 식당은 밥도 공짜로 줬다.

한 달 월급이 180만 원인데 세완이 다달이 25만 원씩 월세를 달라고 했으니까 한 달 수입은 155만 원!

다섯 달 정도만 눈 꼭 감고 버티면 775만 원이라는 큰돈이 생긴다.

변기가 싱크대 바로 옆에 있던 그 집이 보증금 7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이라고 했으니까 그 돈이면 충분히 독립이 가능할 거다.

집에서 가져온 화장품도 다 떨어져 가고, 차비라든지 이런저런 걱정되는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돈을 많이 쓰는 편이 아니니까 어떻게든 버티면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집을 구하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엄마와 함께 살 거다.

생각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소원이 배시시 웃어 버렸다.

누구도 대놓고 눈치를 주지는 않지만 그녀도 사람인데 자신이 불청객이라는 사실을 왜 모를까!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소원은 이 집에 있는 것 자체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세완이 그녀를 편하게 대해 줬지만 기본적으로 이 집 사람들은 모두 다 그녀를 싫어하는 느낌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은이 다친 이후로는 사람들이 더더욱 날카로워진 느낌이다.

“내가 다치라고 했나?”

왠지 모를 억울함에 소원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 사람들은 소원이 숨 쉬는 공기조차도 아까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도 우리 엄마 있다, 뭐.”

동그랗게 몸을 모은 소원이 서럽게 중얼거렸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돈이 없긴 하지만 평범하니 괜찮았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다 이은이 그녀의 집에 온 이후부터 망가졌다고 잠시 이은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녀가 납치되고 공격을 당했던 정황이 너무 뚜렷해서 이은을 더 원망하지도 못하겠다.

명색이 재수생인지라 공부를 해야 하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고, 공부도 안 된다.

엄마가 걱정되고, 아빠가 걱정되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수능 공부나 대학입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그녀 자신도 걱정되고…….

“하아.”

소원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처음에 이 집에 올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공부를 하겠다면서 문제집이란 문제집은 전부 다 바리바리 싸 들고 들어왔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로는 더욱더 힘들었다.

선생님들이 그녀에게 이렇게만 하면 연‧고대는 수월하게 가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인서울은 가능하려나 모르겠다.

제 미래를 떠올리니 불안하기 그지없어서 소원은 드러누워 코를 훌쩍였다.

괜찮다고, 그리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왜 매번 자꾸 이렇게 불안하기만 한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다 지독한 악몽 같았다.

“엄마, 어서 와…….”

식당 근처에서 본 여자가 정말 엄마라면, 어서 그녀를 데리러 와 주면 좋겠다.

와서 이은과 이 회장, 세완 등 이 집 사람들에게 그 모든 일이 다 오해였다는 것을 밝히고 그녀를 데리고 가 주면 좋겠다.

소원은 그렇게 자신의 이 서러운 열아홉 살 여름이 하루빨리 끝나길 소원하다 저녁도 먹지 않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같은 시간, 희경은 딸이 있을 담장 너머 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요즘 이상하게 이 회장의 집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가까이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식 둔 엄마 마음이라는 것이 애달프고 간절하기 그지없어서 희경은 이 집의 주변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은에게 소원을 갖다 붙인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 회장의 인품과 재력!

오갈 데 없는 고아 계집애인 이은을 맡아서 키워낸 정도의 인품을 가진 위인이니 소원이도 맡아 주지 않을까 하는 가느다란 희망이 그녀에게 남은 전부였다.

아이를 돌보는 돈이 그들에게나 거액이지 재벌 회장 정도 되면 푼돈이나 다름없을 것 같았다.

이은이 가족을 퍽이나 그리워했다는 보육원 원장의 이야기나, 와 달라는 이야기에 냉큼 달려온 그녀의 여린 마음을 믿기도 했다.

이은을 속여서, 혹은 죽여서 재산을 빼앗자는 남편의 이야기에 솔깃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보다 질긴 게 정이라고 그래도 그녀 손으로 키운 세월이 있다 보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떻게든 좋게 해결을 하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그 믿음을 배신당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제 동생이니 옆에 있으면 당연히 정을 주고 챙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방을 알아보러 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 식당 아르바이트라니…….

파김치처럼 절여져 있던 딸을 떠올리는 희경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처음에는 몰랐지. 그게 그녀 딸인 줄.

하지만 엄마의 촉이라는 게 참 신기하기 짝이 없어서 멀리서 보이는 그 서글픈 존재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상할 정도로 자꾸 눈이 갔는데 알고 보니까 그녀의 딸이라 희경은 스스로가 더 놀랐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곱게만 키웠던 딸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을 알고 어찌나 많이 울었는지……. 

몸이 좋지 않아 바람 불면 날아갈까 손에 쥐면 깨질까 온갖 정성을 다해서 키운 아이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희경 자신이 험한 일을 하는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소원이는 달랐다. 아직 성인도 안 된 데다가 아픈 아이였다.

희경은 이은의 모짐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우리 소원이……!”

희경은 자신도 모르게 딸의 이름을 읊조리고,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닦아냈다.

지금 당장이라도 소원이를 데려가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아직 산적해 있는 문제들이 문제였다.

“사람이 참 나쁘다. 너 참 모질어.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이은은 그녀에게 빚이 있었다. 그녀가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소원이 하나 잘보살펴 달라는 거 그뿐이었는데…….

희경이 입술을 깨물고 저 멀리 저택을 바라보았다. 높은 담장 너머로 으리으리한 저택의 끄트머리가 살짝 보였다.

“아, 대기업 상무 비서람서! 그르믄 돈이야 많것지!”

그때 갑자기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애가 참 야무져요. 마포에 오피스텔도 사다 놨고, 우리 보육원에도 매년 못해도 기천만 원은 기부를 하더라고요. 참 바르게 잘 컸어요. 피해 안 끼칠 거예요. 마지막이라면, 만나 봐야죠. 그래야 모녀간에 한이 없잖아요.”

이은에게 이래저래 모아 놓은 재산이 많다는 보육원 원장의 말도 떠올랐다.

“…….”

무언가를 생각하던 희경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마냥 말도 안 된다고 하기에는……. 희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려웠다. 정말로 많이.

* * *

아침 해가 밝았다.

세완은 눈을 떴고, 이은도 눈을 떴을 거고, 정말 불쾌한 일이지만 윤세도 눈을 떴다.

눈을 떠서 1층으로 내려갔는데 눈엣가시 같은 윤세가 또 보였다. 윤세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밸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윤세의 모습에 세완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예, 뭐……. 좋은 아침입니다.”

첫날에도 그렇지만 세완은 날이 갈수록 감정을 못 숨기는 것 같았다. 윤세는 그런 세완이 재밌어서 더 환하고 싱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

세완은 눈으로 욕을 했다.

입술을 살짝 달싹이려다가 다무는 것은 보니 말하려던 것이 발음이 굉장히 강한, 쌍시옷이 들어가는 그 무엇인가 본데 참 솔직한 사람이었다.

섬에서 그를 경계했을 때도 그랬지만 어지간히도 이은이 좋은 모양이었다.

세완은 첫 번째로는 그를 경계했고, 두 번째로는 눈으로 이은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가 보이지 않으니 세완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했다.

“어디에 있습니까?”

“누구 말입니까?”

“그쪽 경호 대상이요.”

“글쎄요.”

윤세가 목소리를 낮게 잡아끌었다.

그러자 세완이 표정을 순간 딱딱하게 굳히면서 말했다.

“뭡니까? 지금 경호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마냥 해맑던 청년이 놀라울 정도로 차가워졌다. 윤세는 그 모습에 섬에서 봤던 세완의 모습이 착각은 아니구나, 싶었다.

놀려먹는 것은 그만해야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용주의 손자이고, 미래의 고용주가 될지 모르는 몸이었다.

짐작건대 이은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싶다는 말이 윤세의 입에서 나오려는 찰나였다.

“또 왜 윤세 씨한테 시비 걸고 있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은이었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말했다.

“지금 일어났어?”

세완은 윤세를 버려두고 냉큼 이은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

벌써 몇 번째 겪는 일이지만 여전히 어이가 없어서 윤세는 헛웃음을 흘렸다.

시골집 똥개가 인간으로 변한다면 아마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윤세를 대하던 딱딱하고 차가운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세완은 순식간에 그가 지난 며칠간 봐왔던 해맑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

“잘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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