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툭탁거리며 신경전을 벌이던 상황이 소원의 등장과 함께 일시에 소강상태가 되었다.
“아, 어! 그래.”
이은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를 아는 듯 소원이 고개를 꾸벅이더니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빠르게 사라지는 소원의 뒷모습을 보며 세완이 물었다.
“쟤가 왜 여기에 있어?”
“왜 여기에 있긴? 네가 데려다 놨잖아.”
섬에서 올라오던 날, 네 손으로 직접 창고방에다가 밀어 넣지 않았느냐며 이은이 반문했다.
이후, 이은이 그녀의 방을 3층 게스트 룸으로 바꿔 주긴 했지만 어쨌든 소원을 직접 데리고 온 것은 세완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손사래를 친 세완이 계단을 보며 목소리를 낮추고 질문했다.
“할아버지가 내보낸 거 아니었어?”
아닌 게 아니라 이은이 다친 이후, 세완은 소원을 오늘 처음 보았다. 그래서 진작에 소원을 내보낸 줄 알았다.
이은이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반문했다.
“아직 성인도 안 된 애를 내보내긴 어딜 내보내?”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고는 말 못 한다. 하지만 아직 미성년자인 소원의 나이와 부모의 죄와 그 자식은 별개라는 것이 이은의 마음에 걸렸다.
수도 없이 많이 고민했지만 그래도 반쪽이나마 피가 섞인 동생이라는 게 결정적으로 이은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더불어 소원이 아르바이트를 구해 상당 시간 동안 집을 비운다는 것 또한 이은을 좀 더 너그럽게 만들었다.
애초에 그녀가 소원의 존재에 날카롭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던 것이 친밀해 보이는 세완과 소원의 모습인 만큼, 그 원인이 제거되니 이은도 사람을 대하는 데에 유연해진 것이다.
이런저런 복합적인 이유로 이은은 일단은 소원이 최소한의 독립 조건을 갖추기 전에는 그녀를 데리고 있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 이은의 결정을 이 회장은 혀를 차면서도 존중해 줬다.
하지만 세완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자꾸만 시선을 피하는 이은의 모습에 눈치 빠른 세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혹시 너야? 네가 보내지 말라고 한 거야?”
“아니야. 그리고 그게 뭐가 중요해?”
말을 돌린 이은이 세완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내친김에 몸도 일으켰다.
“아주머니,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이은이 냅다 주방 안으로 도망갔다.
“아니, 다 했는데 뭘 도와줘? 그리고 손도 못 쓰고 팔도 못 쓰는 애가 무슨.”
“그래도 옆에 있다 보면 뭐라도 도와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가끔 고양이 손도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춘천댁은 의아해하고, 이은은 배시시 웃으며 그런 그녀에게 애교를 부리며 매달렸다.
세완은 멀리서 그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은이 윤세 옆에서 떨어지는 것을 원하긴 했지만 그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길 원하진 않았는데…….
그때 세완과 이은의 다툼을 구경하던 윤세가 슬쩍 입을 열었다.
“저 아이는 누굽니까? 누구기에…….”
윤세가 말끝을 흐리며 소원이 올라갔던 계단 쪽을 보았다.
그 모습에 세완은 윤세가 경호를 담당하고 있긴 하지만 이은이 그에게 모든 것을 오픈하지는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조금 친해 보여서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긴 했지만 역시 낯가림의 대명사인 김이은이었다. 명불허전 내 친구라며 세완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답했다.
“더부살이입니다. 그쪽 같은.”
이 말을 이은이 들었다면 또다시 등짝을 때리려고 들겠지만 때릴 테면 때리라지. 세완은 윤세가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윤세가 다소 당황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알게 뭐람? 이참에 기분 상해서 사표 내라!
사표까지는 안 내더라도 보직 이동 정도는 신청해라!
이은이 안다면 너는 도대체 언제쯤 철이 들 거냐며 짜증을 내겠지만 세완은 영원히 철 안 든 피터팬으로 살지언정 더 이상 윤세와 동거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은도 자리를 떴겠다, 이은과 함께 있지 않은 윤세에게는 먼지 한 톨만큼의 관심도 없는 세완이 마음 편하게 몸을 일으켰다.
3층에는 살인자 딸, 2층에는 눈엣가시 같은 더부살이 경호원!
이 두 명의 불청객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내보내기 위해 세완은 퇴근 후 자체 재택근무를 결심했다.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본업이 아니고 공동대표로 이름만 올려놓은 찬주와의 사업체가 그 대상이긴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세완은 아주 오랜만에 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 * *
고용주의 손자는 윤세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윤세는 그런 세완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재밌을 거라고 하시더니…….”
정말 조금 흥미가 있어지려고 한다.
기약 없는 입주 경호원이라는 이야기에 윤세는 이 회장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차라리 사건이 터지고 해결책으로 투입되는 것이 낫지 하릴없이 경호 대상 옆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는 것은 윤세의 취향이 아니었다.
섬에 간 것이야 겸사겸사 낚시 겸 휴가 겸해서 갔다지만 집 안에 반감금 상태로 있는 것은 사정이 달랐다.
그래서 윤세는 이 회장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이 회장은 상당한 액수의 보수와 파격적인 특진을 미끼로 윤세를 유혹했지만 윤세도 돈이라면 모자라지 않았다.
애초에 돈이 필요했다면 의사를 그만두고 이쪽 업계로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이 회장이 그랬다.
“자네 부하 중에 윤경원이라고 있지?”
조실부모하고 어렵게 자란, 힘든 형편에도 열심히 사는 후배였다.
후배의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생명을 잃었고, 그 후배의 아이는 작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매우 흔하면서도 구질구질하고 청승맞은 스토리였다.
그런데 이 회장이 책임지고 그 후배의 아이에게 골수를 구해 준다고 했다.
“어렵지 않네. 자네만 동의하면 한 생명이 살 수 있어.”
이 회장은 그에게 제안했고, 윤세는 수락했다.
이건 거절할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 회장은 윤세의 수락이 떨어지자마자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있는 지사 직원들까지 모두 동원해 적합한 골수 기증자를 찾아냈다.
체코에 있는 어느 40대 동양인 남자였다.
몇 년을 노력해도 어려웠던 골수 기증이 사흘 만에 확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회장은 빠른 이식을 위해 그에게 적잖은 대가를 지불했다고 했다고 했지만 그 어떤 대가인들 한 생명보다 소중할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배는 무릎 꿇고 오열하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감사…… 합니…… 다.”
유리와 비닐로 뒤덮여 있는 무균실 너머에서 다섯 살 꼬마가 그에게 쌕쌕거리는 숨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윤세는 그것으로 그의 보직 변경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입주 경호원이 아니라 집 안에 갇혀서 팔다리가 묶인 채로 있어야 한다고 한들 기꺼이 그 위치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입주 경호원의 삶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옆으로 가 봐. 같이 좀 앉읍시다.”
“굳이, 경호대상의 옆방에서 잘 필요는 없지 않나?”
“복귀하고 싶으면 얘기해요. 내가 무조건 밀어 줄 테니까.”
그를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세완이 윤세는 퍽 재미있었다.
험하게 자란 것은 윤경원, 그러니까 그의 후배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경찰이었던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은 범죄자에게 온 가족이 살해당한 뒤 죽고 싶어서 이 일에 뛰어든 선배, 계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죽든지 살든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 보겠다던 동료, 어린 동생들과 아프신 부모님을 위하여 오직 돈이 필요해 이 길에 뛰어든 후배…….
그가 소속되어 있는 시큐리티 1팀에는 단 한 명도 평탄한 삶을 산 존재가 없었다.
그것은 윤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세완은 퍽이나 신기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평범하게 산 사람의 모습은 저렇구나!’
세완은 마치 윤세가 어렸을 때 상상한 동물원 속 동물 같은 느낌이었다.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유쾌하고, 당당한…….
물론 이 회장의 손자 또한 그리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어릴 때 그 부모 되는 존재들을 모두 교통사고로 잃었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세완에게는 그들에게는 없었던 든든한 보호자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윤세는 세완이 퍽이나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들이 평탄하게 자랐다면, 그러니까 사건과 사고가 있었다고 해도 사회가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면 세완과 비슷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그에게 세완을 동생 비슷한 것처럼 보게 만들었다.
“더부살이입니다. 그쪽 같은.”
때문에 세완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려 해도 그는 그저 재미있을 뿐이다.
세완을 놀리는 데에는 별다른 것이 필요 없었다. 경호 대상 옆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됐다. 그것 하나면 세완은 발작하듯 윤세를 미워했다.
“뭐, 마음껏 놀려 먹어도 된다네. 이은이를 좋아하지만 않는다면. 명심하게. 그 앤 내 손자며느리야.”
이 집에 입주하기 전, 이 회장의 한 말이 그에게 면책권을 안겨 주기도 했다.
윤세가 씩 웃으며 세완이 사라진 계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은이 있는 주방을 향해서도 고개를 돌렸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참 신기한 존재들이었다.
세완도 그렇고, 저 아가씨도 그렇고.
얼핏 들은 이야기로는 저쪽 인생도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듯한데 잘도 멀쩡하게 살고 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그가 이상한 것일까, 아니면 신산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저들이 이상한 것일까?
윤세는 정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한동안 재밌기는 하겠다.
그는 이 집과,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이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흥미로움과 재미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윤세가 몸을 뒤로 젖혔다. 소파는 그 고급스러운 모양새처럼 쿠션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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