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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61)화 (61/100)

61화

아는 것도 없고, 배울 의지도 없다며 이은과 이 회장에게 오랜 시간 구박을 받은 세완이지만 딱 하나 아는 건 있다.

잘못했으면 내 잘못, 네 잘못 따지지 말고 그것을 인지한 순간에 그 즉시 사과할 것!

갑작스런 세완의 뜬금없는 사과에 이은이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고 이내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녀와 살짝 떨어져 있던 세완이 이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한 손으로 정돈하려 낑낑거리던 이은의 가르마를 곱게 정리했다.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소리 질러서 미안하고.”

“너…….”

“내가 생각이 짧았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벙긋거리는 이은에게 세완이 말을 덧붙였다.

그가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머리가 나빠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그가 잘못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누군가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에 미숙하기 때문인 거다.

그가 이해를 하든 못하든, 그로 인해 이은의 감정이 상했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맞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잘못의 주체, 사과의 주체를 찾는 것이 이은과의 불편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좀 바보잖아. 똑똑한 김이은 씨가 나 좀 봐줘라.”

아주 많이 미안해하고 있다는 듯 눈썹을 여덟 팔(八)자로 모아서 처량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세완을 보며 이은은 입만 벙긋거렸다.

“용서해 줄 거지?”

세완은 해사한 얼굴로 연신 사죄의 표현을 하면서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 진솔해 보여서 화도 낼 수가 없었다.

사실 어리석고 잘못한 것은 이은인데…….

바보처럼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화를 내고, 그녀의 몸을 걱정해 주는 세완에게 공연한 화풀이를 했다.

소원이랑 장난치느라 그녀에게 신경 좀 덜 쓰는 거 그게 뭐라고…….

이은은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입술만 잘근거리는데 세완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용서해 주기 싫어서 그래? 나 무릎 꿇을까?”

세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꿇을 생각도 없잖아.”

“꿇으라면 꿇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

이은이 질색하며 말했다. 그 모습이 싸우기 전인 예전의 그녀 모습 같아서 세완은 그냥 웃었다.

냉랭하던 며칠간을 떠올리면 사과 그게 뭐라고, 역시 이세완은 김이은이 옆에 있어야 사람이 된다.

‘저거 언제 사람되나’할 때의 그 사람.

한 깍지 속의 완두콩처럼 너무 오래 붙어 있어서 어느 순간 친남매보다 더 친숙해진 그의 친구에게 세완이 말했다.

“미안해.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그래.”

다음부터는 기분이 상할 때마다 혹시 이야기를 해주면 안 되겠느냐며 세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은은 조금 전보다 더 미안해졌다.

“넌 잘못한 거 없어. 미안해. 내가, 내가…….”

열등감에 빠져서, 자격지심에 빠져서, 그녀가 어리석어서…….

이은은 치부를 드러내듯 고백을 늘어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자존심이 뭐라고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다.

혼자서 고민하면서 극단적으로 치달은 생각들,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쌓아왔던 ‘부모가 없어서 그래’, 혹은 ‘고아라서 그래’가 그녀의 자존감을 정말 많이도 갉아 먹었나 보다.

말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는 이은의 모습에 세완은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일곱 살 그 어느 날에 그랬던 것처럼 외로운 소년은 그보다 더 외롭고 고독한 소녀의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어설프게 다독거리는 그 행동이 지독하게 익숙해서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울면서 웃는 그녀를 보며 세완이 그녀를 놀리려는 듯 움찔거렸다.

“야, 울다가 웃으면…….”

“뭐?”

“아니 뭐, 그냥 울다가 웃을 수도 있다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그럼, 그럴 수도 있지.”

세완은 이은의 눈치를 보며 어떤 말로 자신의 실수를 무마해야 하나를 고민했다. 그리고 수많은 후보군 중에서 꺼낼 말을 선택했다.

“뭘 좀 먹을래? 사람이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보통 배가 고파서 그런 거래.”

세완의 말을 들은 이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밥 먹었잖아.”

세완을 신경 쓰느라 거의 먹지도 못했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식사를 끝낸 지 10분도 되지 않았다.

“그러게. 그러네?”

세완이 이은을 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얼핏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순박한 농촌 총각처럼 웃는 세완의 모습에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래. 그게 너지…….

처음부터 세완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녀가 잠시 이상했었다.

언제나 해맑고 착하고 순진한 친구의 가슴에 이은이 머리를 박았다.

“미안해. 정말로.”

“내가 미안하지.”

“아니, 내가 미안해.”

내가 못나서.

어리석고 자격지심에 가득 차 있어서, 열등감 덩어리라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그런데 소원의 존재 하나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못나게 만들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버림받은 일곱 살 어린아이 김이은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짙었다. 아직까지도 어른이 되지 못한 스스로를 생각하며 이은은 뜨거운 숨을 토했다.

이은은 한참 동안 힘들어했다. 세완은 그 옆에서 어릴 때처럼 이은의 등만 토닥여줬다.

세완이 스스로의 무력함에 진절머리를 낼 즈음 그녀가 말했다.

“넌 이제 네 방 가. 나도 내 방 갈 거야.”

씩씩한 김이은은 혼자서 감정 정리를 끝내고, 세완을 쫓아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함께 방을 나와서 세완을 버려두고 그녀의 방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세완은 닫힌 이은의 방문을 보면서 생각했다.

상황 참 거지 같다.

이은이 제 방으로 간 그 사실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처해있는 바로 이 상황이 그렇다.

모든 것이 내 죄로소이다, 라면서 납작 엎드리는 것은 김이은이 상대일 때뿐이었다.

볼 거 못 볼 거 다 보이면서 함께 자랐는데 사과 그까짓 게 뭐라고!

싸우고 데면데면 날 선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야 조금 모자란 푼수처럼 굴더라도 예전처럼 지내는 게 훨씬 더 좋은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은이 울었다.

처음에 그의 사과 이후에 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어깨에 기댄 이은이 한껏 지치고 힘든 얼굴로 입술만 깨물고 있었던 때를 이야기한 것이다.

“차라리 한 대 얻어맞는 것이 낫지.”

입매를 비튼 세완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공연히 신경전을 하면서 이겨 봤자 득 될 것도 없는 싸움을 하느니 일찌감치 사과하고 마음 편하게 지낼 생각이었지만 저런 얼굴을 봤는데 어떻게 평소처럼 지낼 수가 있을까!

꽉 닫힌 문 너머로 조금 전에 봤던 이은의 지친 얼굴이 떠올랐다.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지금 당장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세완을 너무나도 짜증 나게 했다.

* * *

지난밤은 지나치게 길었다.

빈말이라도 누군가의 울음소리나 그 비슷한 것 하나 들리지 않은 밤이었지만 세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환청까지 들리는 것 같던 밤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눈을 뜨자마자 좋은 아침, 을 외치면서 이은의 방을 기웃거렸는데 웬걸? 이은이 없었다.

2층에 없으면 1층에 있겠지!

세완은 차라리 더 잘됐다면서 신이 나서 1층으로 내려갔다.

데면데면하던 것이 두 달 전 일도 아니고 세 달 전 일도 아니고 불과 어젯밤의 일인데, 아무래도 이 회장과 춘천댁이 함께 있는 것이 좀 더 이은에게 친한 척하기 쉬울 것 같았다.

그렇게 세완이 신나게 내려갔는데 정작 1층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

계단을 내려오던 세완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저 남자가 있었지?

이은과 세완의 옆방을 차지한 남자를 보는 세완의 눈빛이 공격성을 띠었다.

그 어느 때보다 유쾌하고 즐거웠던 세완의 기분이 부침개 뒤집듯 뒤집혔다. 멈춰선 세완이 삐딱한 자세로 계단 난간에 기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꽤나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지난밤은 편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글서글하게 생긴 선 굵은 남자가 이 회장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잘 잤다면 다행이네. 앞으로 신세를 좀 져야 할 거 같은데 잘 부탁하지.”

“저도 잘 부탁드려요.”

이 회장과 이은은 남들이 보면 저 남자가 무슨 지구를 구할 히어로인 줄 알 것처럼 그를 대했다. 저 남자만 있으면 이은이 매우 안전할 것처럼.

섬에서 도움을 받은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경호원이 있으면 좋기야 하지. 그도 익히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하지만 그것이 그를 이은과 세완만의 공간에 들여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다시 경호원을 구하게 된다면 세완은 이은이 어디를 가든 따라갈 수 있는 여성 경호원을 구할 거다.

그런 의미에서 저 경호원은 이은의 옆에 두기에 별로 적합한 존재가 아니다.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린 세완이 성큼 계단을 내려가며 입을 열었다.

“둘 다 그런 부탁 같은 거 하지 마요.”

세완이 남자에게 불쑥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반갑습니다. 어제도 뵙긴 했지만, 이세완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윤…….”

세완의 통성명에 윤세도 세완에게 자신을 소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세완에게 중요한 것은 윤세의 이름이 아니었다.

세완이 윤세의 말을 끊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보다, 입주 경호원으로 들어오는 거 싫으면 싫다고 말해요. 막아 줄 테니까.”

“네?”

“입주근무 말입니다. 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된다고요.”

윤세의 반문에 세완이 자신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말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이 그냥 지금 바로 종료하죠. 하! 21세기에 입주 근무는 무슨!”

세완이 이 회장을 향해 노골적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물론 그가 선택한 경호원은 입주 경호원이 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럴 수 없을 거다.

다른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이은의 편의 때문이라며 세완은 스스로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뒤이어 숨도 쉬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잠만 주무시기야 하셨지만 어쨌든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금 바로 퇴근하시고, 오늘내일은 쉬시고, 내일모레부터 원래 출근하시던 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어디로 출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내 놓으면 나머지는 시큐리티 문익 대표가 알아서 하겠지!

누군가는 세완에게 무슨 근무지 변경을 왜 니 마음대로 하느냐며 욕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멀쩡하게 회사 잘 다니던 사람 근무처를 자기 마음대로 바꿔 놓은 것이 이 회장이다.

세완은 이 회장의 제멋대로 근무지 변경을 원상 복구시키는 것뿐이라며 자신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때 윤세가 말했다.

“싫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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