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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60)화 (60/100)

60화

옷을 벗고 샤워를 한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세완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은 찬물을 퍼부어 머리를 좀 맑게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옷 입은 그대로 머리를 샤워기에 갖다 댔고, 한참 동안 머리를 적시고 나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잠을 못 자서, 그리고 효과 없이 쓸데없는 짓만 했다는 생각에 살짝 돌아 버리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그가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부릴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내내 이은의 안전이 걱정이었으니 세완은 윤세의 채용을 분명 기꺼워해야 마땅했다.

30분 동안의 냉수욕을 통해 차게 식은 머리로 이성적 판단을 내렸고, 세완은 맑은 이성으로 일단 몸을 닦고 1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경호원 하나 고용한 게 별일인가?

별일 아니니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대해야겠다. 세완이 결심했다.

그런데 그 결심을 하고 막 방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어떤 존재가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여기가 머물 방이에요.”

이은과 윤세가 보였다. 이은이 윤세에게 방 하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란히 붙어 있는 이은과 세완의 바로 맞은편 방이었다.

예의 바르게, 평소처럼 싱글대는 모습으로 윤세와 이은을 대하기로 한 것도 잠시였다. 세완이 한껏 날 선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여기서 머무셔?”

“어.”

여전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이은이 답했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이은을 보고 급속도로 더 안 좋아졌다.

세완이 까칠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뭐가 왜야?”

“이 집에 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굳이 2층이야? 그리고 출퇴근하면 되지 않나? 집 멀어요?”

세완은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소원의 방도 3층이다. 굳이 이 집에 살게 할 것이라면 윤세도 소원처럼 3층에 묵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세완이 물었다.

1층은 공용 공간 및 이 회장의 공간이었고, 2층은 세완과 이은의 공간, 3층의 방들은 손님용 게스트 룸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별채는 춘천댁을 포함해 고용인들이 묵는 곳이었다.

세완이 이 집에 살게 된 이후 그리고 이은이 이 집에 오게 된 이후 그 규칙에는 단 한 번의 변동도 없었다.

물론 그가 소원을 손님방이 아닌 지하 창고방에 던져놓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거야 걔가 제대로 된 손님이 아니라서 그런 거였고!

누가 뭐래도 2층 126제곱 미터는 십수 년간 온전히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거대한 대형 TV와 베이지색 소파가 놓인 거실은 잠이 안 올 때마다 나와서 머리를 맞대고 블루레이를 틀어 젖히던 두 사람만의 안식처였고, 그 거실과 연결된 테라스 및 정원은 그들이 때때로 자연을 향유하던 휴식처였다.

“방 남잖아.”

2층에 있는 방이 네 개이다 보니 물론 쓰지 않는 방도 있다. 하지만 그게 윤세에게 그 방을 줘도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영역을 침범당한 세완의 날 선 반응에 윤세가 서글서글하게 말했다.

“저는 뭐, 어느 층이든 상관없습니다.”

세완이 뚫어지라 이은을 바라보았다. 이은이 낮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할아버지가 하라고 하시면 다 해?”

“뭐라는 거야?”

이은이 짜증 섞인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윤세만 없었다면 그들이 싸웠거나 말거나 세완의 등짝부터 내리쳤을 폼새였다.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먼저였던 이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녀 딴에는 윤세의 눈치를 봐서 꽤나 자제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세완은 그게 더 짜증 났다. 아니, 저 남자가 뭐라고 눈치를 봐?

짜증 낼 상황이나 계제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냥 세상만사가 다 짜증 났다. 날 선 세완의 반응에 이은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애써 웃으며 윤세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시면 돼요. 저 사람은 신경 안 쓰셔도 되고요.”

“야!”

세완이 짜증을 내려는 찰나였다.

“넌 나 좀 보고!”

이은이 이를 악물고 세완에게 말했다.

그리고 세완의 팔을 잡고 눈에 보이는 방으로 일단 끌고 들어갔다.

* * *

문이 열리고, 이은과 세완의 몸이 들어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이은이 짜증이 가득한 눈으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이은의 눈이 온전히 세완을 향했다. 그리고 똑바로 그를 노려봤다.

경험상 한 대가 아닌 열댓 번은 등짝을 후려칠 정도로 짜증이 났을 때 이은은 이런 모습을 보인다.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짜증이 나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와 마주 본 순간, 세완은 어쩐지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모든 짜증과 울화와 분노가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야, 너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어떻게든 좋게 말하려고 했는데…….”

“응, 미안.”

이은이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세완은 자동적으로 사과를 뱉었다.

이은은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세완의 반응이 이상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한껏 날이 서서 까칠하게 굴더니 지금은 이보다 순할 수가 없었다.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이은의 눈빛에 세완이 재차 사과했다.

“짜증 내서 미안해. 저 사람이 좀 마음에 안 들었어.”

“미쳤니? 처음 보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들 게 뭐가 있어?”

“처음 보는 건 아니지.”

“그래, 두 번. 기억 하나 보네. 우리가 섬에 있을 때 봤던 사람. 우리 도와줬던 사람!”

이 회장의 지시였든 어쨌든 간에 그들은 도움을 받았고, 윤세 덕에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얘는 도대체 저 사람의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기에 보자마자 날부터 세우나!

식사를 하기 전까지 이은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내 세완을 구박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녀의 구박이 정말 세완이 잘못해서 한 게 아닌, 어쩌면 그녀의 이기심으로 그를 나쁘고 멍청하고 바보 같은 존재로 몰기 위해 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이은은 일단 스스로를 돌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오늘의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때린 매는 모두 이세완이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고!

윤세는 우리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라며 이은이 조목조목 하는 이야기에 세완이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알지. 내가 네 말 다 알지. 그런데 난 어째 저 사람 싫다.”

하지만 바보처럼 기계처럼 끄덕이는 고개와 달리 그의 입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야, 너 지금까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이은이 지금까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더 꺼내려고 했다. 그때 세완이 말했다.

“너는 괜찮아? 다른 사람 있어도.”

이은이 멈칫했다.

“나는 우리 공간에 다른 사람 있는 거 싫은데.”

낯선 사람이 싫은 까칠한 도련님의 까탈일 수도 있었다.

덜떨어진 호구처럼 하고 다니긴 해도 명색이 부잣집 도련님인지라 식당이나 펜션 등을 잡을 때 세완은 아무 곳에서나 자거나 먹지 않았다.

솔직한 이야기로 그는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 연장선으로 생각하면 윤세의 존재를 싫어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하는 말에는 뭔가 이은이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했다. 이은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세완이 말을 이었다.

“여기에 저 사람 들어오면 이제 우리 밤에 영화 못 봐. 커피도 그렇고.”

“셋이서 하면 되잖아.”

“난 모르는 사람이랑 내 시간 공유하는 거 싫어해.”

아예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면 공유를 할 수도 있다. 커피숍에서 커피 마시는데 옆 테이블에 누가 앉았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런데 옆 테이블에 적당히 신경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면 세완은 차라리 커피 마시는 걸 포기하면 포기했지 그 자리에서 꾸역꾸역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난 네가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어.”

이은이 말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완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사실은 모르겠다.”

세완이 이은의 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야!”

이은이 단말마를 내질렀다. 그때 세완이 이은의 머리 위에 턱을 올렸다.

연인이라면 허리에 팔을 감겠지만 그들은 친구니까 이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세완이 말했다.

“그냥 분명한 건 내가 저 사람을 싫어한다는 거야.”

“……많이 싫어? 3층으로 옮기라고 할까?”

이은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할아버님이 2층에 머물게 하라시긴 했지만 세완의 말을 듣고 나니 그녀도 윤세가 2층에 머무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아니, 됐어. 다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거겠지. 너랑 동선이 겹치게 하려고. 그런데…….”

꽤나 신경에 거슬린단 말이지.

세완이 미처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응? 뭐라고 했어? 못 들었는데.”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어.”

세완이 그냥 씩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이은의 머리를 한 번 더 벅벅 문질렀다.

“야, 너 진짜!”

단정한 단발머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이은은 투덜거리며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리했다.

세완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굉장히 짜증 났는데 지금은 또 제법 기분이 좋았다.

감정이 널뛰기를 해도 유분수지 이 정도면 자아분열이나 다중인격이라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은은 종종 그에게 영원히 아이로 사는 피터팬을 운운하며 도대체 언제 철이 들 거냐는 말을 내뱉곤 했다.

그래서 그런가? 유아 퇴행 현상으로 인한 주양육자에 대한 독점 현상인 것인지 세완은 이은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저 경호원 양반이 적잖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폐쇄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세완은 생각보다 더 낯선 사람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세완은 물끄러미 머리를 정리하는 이은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그게 그거인 것 같은데 이은에겐 다른 모양이었다.

깁스며 붕대로 인해 어디 하나 멀쩡한 구석이 없으면서도 머리의 가르마를 열심히 정리하는 이은을 보며 세완이 툭 하고 또 하나의 사과를 던졌다.

“미안해.”

“뭐가?”

“내가 소리 지르고 화냈잖아. 변명 같지만 걱정돼서 그랬어. 미안해. 백희경 딸 문제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네가 기분이 상했던 그 모든 부분에 대해 사과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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