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이은이 퇴원을 했다는 이야기는 춘천댁에게 이미 들었다. 때문에 이은에게 경호원을 붙이기 위해서라도 세완은 집에 가야 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한 그 순간조차도 세완은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이은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냉랭하던 이은의 모습이 마치 열상처럼 가슴에 남았다.
세완은 한참을 집 밖에서 서성였다. 하지만 고민을 해 봤자 그가 해야 할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은과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 보는 것!
세완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
문을 열어 준 춘천댁이 가장 먼저 그를 반겼다.
“네. 할아버지랑 이은인…….”
두리번거리며 두 사람의 행방을 묻던 세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춘천댁은 세완의 반응을 여사로 넘기며 다이닝 룸으로 이끌었다.
“식사 중이셔. 얼른 와. 식사하자.”
세완은 춘천댁을 따라 다이닝 룸으로 들어섰다.
기다란 식탁에 네 사람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은 이 회장, 한 명은 김이은, 또 한 명은 BS그룹 시큐리티 문익 대표.
문익 대표야 종종 보는 인물이니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오셨어요?”
“이 상무,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문익이 인사를 되돌렸다. 그런데 문익 대표 외에 낯선데 낯익은 존재가 한 명 있었다.
“……이윤세라고 했던가?”
세완이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이름을 뱉었다.
“맞습니다.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뭐, 저도 제 기억력이 이렇게 좋은 줄 처음 알긴 했습니다. 크게 반갑진 않네요. 우리가 또 만나서 반가운 사이는 아니니까.”
그래도 일단 내민 손이니 잡아 주긴 했다.
남자와 악수를 한 세완이 싸늘한 눈으로 그를 훑었다. 남자는 섬에서나, 지금이나 꽤나 멀끔한 모습이었다.
의사 출신 직장인이라고 했었나? 조부인 이 회장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건 직후도 아니고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지금 왜 그의 집에 있느냐가 의문이었다.
그들을 구해준 것에 대한 인센티브며 상여금은 이미 진작 나갔을 텐데 왜 굳이 집에 불러서 밥까지 먹고 있지?
미간에 주름을 새긴 세완이 의문에 찬 눈으로 이 회장을 바라보았다. 이 회장은 싱글거리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평소였다면 세완의 불퉁한 언사를 보고 한마디 정도는 잔소리를 했을 법한 위인이 수상한 작태를 보이자 세완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좀 더 깊어졌다.
이 남자가 어째서 우리 집에 있는 거냐고 묻기 위해 세완이 입을 열려는 시점이었다.
“앞으로 계속 얼굴을 봐야 하니 잘 지내 보게.”
이 회장이 폭탄을 터트렸다.
세완은 놀라 윤세를 바라보았다. 윤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여상스러운 반응이었다. 세완이 고개를 돌려 이 회장을 바라보았다.
이 회장을 보는데 문익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 회장은 뻔뻔하게 손자를 보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전에 이야기했던 이은이 경호원이야. 아무래도 불안해서 말이지.”
세완이 이은을 바라보았다.
깻잎들깨무침을 먹고 있던 이은이 세완의 시선에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놀란 것도 놀란 것인데 세완은 어쩐지 그 행동이 상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거고, 세완이 조부에게 물었다.
“이렇게 갑자기요?”
“갑자기는 무슨 갑자기야. 며칠 전에 네가 얘기를 했지 않느냐. 이은이한테 경호원을 붙여야겠다고. 그래서 내가 겸사겸사 이 사람을 불러들였지.”
이 회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윤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사람이 이래 봬도 대단한 사람이야. 어디 하나 모자란 구석이 없어. 너도 기억하지? 섬에서 너희 도와줬던 사람이다. 아는지는 모르겠는데 의사 출신이라…….”
“아니, 그건 아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은이가 괜찮대요? 김이은, 너 경호원이 따라 다녀도 괜찮아?”
누군가 뒤를 따르는 것을 거치적거린다며 질색하는 이은이었다.
어릴 때 세완의 뒤를 따르던 경호원이 부담스럽다면서 이은은 같은 집에 살면서도 그와 따로 등교를 했었다.
어미 새 만난 아기 새처럼 쫄쫄 따라다니던 세완을 세차게 내친 이유가 경호원 때문이었는데 김이은이 경호원을 받아들인다고? 처음 그가 경호원을 이은 몰래 붙인 이유가 뭔데!
세완이 따지듯이 이은에게 질문했다. 이은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시선을 피하며 마른 입술만 적셨다.
“할아버지, 전 싫어요. 경호원이라니요. 그런 유난이 어디에 있어요? 제가 뭐라고!”
불과 방금까지 이은이 발작하듯 거부하긴 했었다.
“다친 건 그냥 제 실수였어요. 버스에서 그냥 놀라서 그런 거라고요.”
이은은 자신만 조심하면 괜찮을 거라면서 경호원이 필요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그때 이 회장이 건넨 말이 그녀의 마음에 걸렸다.
“세완이가 네가 걱정돼서 일을 못 하겠는 모양이더라. 다 제 탓이라고 자책해서 집에도 못 들어오고 있는 것을 봐라.”
“…….”
“괜찮은 사람이야. 섬에서도 너희들을 구해줬다면서.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니라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이 사람이 별로면 다른 사람으로 붙여 줄까?”
이 회장은 세완이 사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다 이은을 걱정해서 그런 것이라며 세완을 생각해서라도 경호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네가 경호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네 걱정에 세완이가 아무것도 못 한다. 나도 그렇고. 나는 내 귀한 손녀 다치는 게 싫다.”
이 회장은 겸사겸사 세완이 얼마나 이은을 생각하는지에 대해 어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은은 어쩐지 그 말이 자신이 경호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완에게 짐이 된다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 회장의 의도가 그게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녀의 어리석은 마음이 자꾸 그런 쪽으로만 흘렀다. 그래서 그랬다.
“……응. 그래야 안심이 된다고 하시니까.”
세완의 질문을 들은 이은은 앉은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나쁜 건 없다. 그냥 한집에 사는 사람 하나가 더 느는 것뿐이다.
소원과도 함께 사는데 위급한 상황에서 그녀를 구해준 경호원과 함께 못 지낼 이유가 없었다.
이은은 이것이 세완이 원한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이 회장이 갑자기 경호원을 들이밀어 놀라긴 한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세완도 이은에게 경호원을 붙이고, 더 이상 그녀를 걱정해야 하는 일이 없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은이었다면 그랬을 거니까.
싸운 뒤라 데면데면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은이 세완을 걱정하듯, 세완 또한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이다 보니 아무런 잘못이 없는 세완에게 뾰족한 티를 내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걱정하고 아낀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은은 세완을 위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세완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하!”
세완이 어딘가 삐딱한 실소를 내뱉었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세완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처참하게 구겼다.
그 모습이 이상한지 이 회장이 물었다.
“뭐냐,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올라가요.”
세완이 종이를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냉기를 뿌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평소 같지 않은 그의 모습에 이은은 당황했고, 문익 대표는 왠지 모를 미안함을 세완의 뒷모습에 보냈으며, 이 회장은 이유 없이 낄낄댔다.
“어머나, 식사 안 하니?”
뒤늦게 춘천댁이 세완을 잡았지만 세완은 안 먹는다며 손만 허공에서 휘저을 뿐이었다.
이 회장은 그런 세완의 뒤에서 대놓고 낄낄거렸다.
“크흠! 회장님, 체통을 좀!”
문익 대표가 이 회장을 말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 회장은 꽤나 기분이 좋은 듯했다.
“뭐 이 나이에 체통을 따지나. 기분이 좋으면 그냥 표현하면 되는 거지. 춘천댁 손맛이 점점 더 좋아져. 이거, 이거! 이거 김치가 아주 꿀맛이란 말이지.”
“아까 아침에는 니 맛도 내 맛도 아니고 물맛만 난다고 싫다고 하셨잖아요. 젓갈 맛이 하나도 안 난다고. 갈치젓 좀 팍팍 넣으라고요.”
춘천댁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평생 서울 김치라고는 드시지 않고 남도식 김치만 드시는 분이 별일이라는 말투였다.
“아, 그랬나? 아니야. 서울 김치도 좋지. 내가 서울 김치 참 좋아하지. 모두 식사합시다. 자네도 들고!”
이 회장이 윤세를 특별히 챙기면서 말했다.
미스코리아였던 며느리를 닮아 눈에 띄게 곱상한 세완과 달리 윤세는 남자답게 굵직굵직하게 생긴 외모였다.
각진 얼굴형에 까무잡잡한 피부는 총각 시절 마나님을 두고 경쟁하던 돌골 물레방앗간집 둘째 아들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저런 외모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은이 저렇게 생긴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 회장은 그의 존재가 그저 기꺼울 뿐이었다.
이 녀석아, 그러게 진작 네 마음 좀 깨닫지!
이 회장은 거칠게 제 방으로 올라가던 세완을 떠올리며 낮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언젠가는 생길 손주를 생각하며 그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 * *
방에 들어간 세완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거칠게 내던졌다. 그 종이는 이은에게 보여 줄 예정이었던 경호원들의 프로필이었다.
여성 경호원 다섯에, 남성 경호원 두 명!
모두 엄선되고 검증받은 존재들로 성별을 떠나 누구를 택하든 위기와 위험으로부터 이은을 잘 지켜 줬을 거다.
아래층에 있는 남자가, 그러니까 윤세가 경호를 못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는 그도 모르게 이은에게 경호원이 붙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을 뿐이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들이는 이은의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고, 그러니까 좀 짜증이 나고…….
“미쳤군.”
세완이 헛웃음을 토했다.
이은에게 경호원이 생긴 건 분명히 잘된 일인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이은과 나란히 앉아 있었던 그 남자가 꽤나 신경에 거슬렸다.
……섬에 있을 때 그가 이은에게 너무 친한 척을 해서 그런가?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지고 보면 그가 이은에게 특별히 친한 척을 한 것이야 없었지만 삐끗한 이은의 발목을 치료하던 그의 모습이 뒤늦게 생각나 그를 짜증 나게 했다.
“잘된 거지. 경호원이 있으면 이은이도 안심할 수 있고. 잘된 건데……. 아니, 할아버지는 왜 경호원을 남자로 붙여서 애가 안심하고 화장실도 못 가게 하셨대?
경호 받는 이은은 여자고, 경호하는 윤세는 남자!
화장실을 가거나 옷을 갈아입거나 할 때는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어설프게 일 처리를 하느냐며 세완이 투덜거렸다.
“아! 진짜!”
머리를 벅벅 긁은 세완이 넥타이를 거칠게 풀며 욕실로 향했다. 찬물 샤워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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