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백희경이 지속적으로 그의 집 주변을 맴돌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완은 크게 분노했다.
찬주를 통해 붙인 경호원이야 이은 개인을 경호했던 터라 백희경의 잠복을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그룹 차원에서 저택의 주변을 경호하는 경호원들도 있었다.
이 회장을 통해 집 근처 경호에 신경을 쓰라고 언질까지 줬는데 백희경의 존재를 허투루 넘겼다니!
시큐리티를 소환한 세완은 경호의 허술함에 대하여 크게 화를 냈다.
백희경이 저택 근처가 아닌 두어 채의 저택을 더 지나 도로 초입에 잠복했다. 보니 억울한 부분이 적지 않았지만 보안팀의 팀장은 일단 사죄했다.
보안팀의 팀장이 소환된 상황이다 보니 회사에도 일이 일부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비서실장의 보고를 들은 이 회장은 일단은 침묵하라고 지시 내렸다.
“뭐, 허술했던 것은 사실 아닌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억울한 부분도 적잖습니다.”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다소 방만했던 것도 사실이니 크게 억울할 것 없네.”
보안경호팀을 대신해서 이야기하는 비서실장의 변명에 이 회장이 말라서 말했다.
“그나저나 세완이는 어떻게 하겠다고 하던가?”
“전원 시말서 제출하라고 했답니다.”
“……물러 터졌긴!”
그 정도면 감봉조치를 했어도 됐지 않느냐며 이 회장이 불퉁거렸지만 비서실장 생각에는 최소한 직원들의 처분에 대한 부분만큼은 세완이 맞았다.
이 회장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비서실장이 이 회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희 쪽도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황이 조금 골치 아프게 굴러가는 것 같은데요.”
사실 세완과 달리, 이 회장과 비서실장은 백희경과 관련해서는 크게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
뒷배가 없는 여자 한 명, 개인이라고 생각되어 그런 것이기도 했다.
섬에서 위급한 상황이 있긴 했지만 백희경 혼자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돈을 주지 않으면 본사에 폭탄을 설치한다느니, 경쟁사와의 M&A 인수합병 결정을 무르지 않으면 차를 폭파시키겠다느니 하는 협박이며 시도가 심심찮게 들어오는 입장에서 백희경이라는 존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세완이 나서서 얻는 결과와 이 회장이 나섰을 때 얻는 결과는 달랐다.
제 딴에는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크게 실권이 없는 재벌 3세였다.
쉽게 말해 세완이 나섰을 때 나오는 것이 경찰서장이라면, 이 회장이 나섰을 때는 경찰청장은 물론이고 서울중앙지검 검사장이 직접 팔을 걷어붙인다. 그것이 이 회장이 가지고 있는 힘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백희경을 개미와도 같은 존재, 그저 세완과 이은의 사이를 붙이기 위한 접착제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고의든 실수든 간에 이은을 다치게 했다면 이제부터는 상황이 달라진다.
“지금이라도 경찰청장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비서실장이 질문했다.
그는 언제나 당당하고 당차던 후배가 붕대투성이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요 근래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버림받은 아기 새처럼 의기소침해 있는 모양새였다.
그의 기억에 따르자면 그건 아주 오래전, 이은이 이 집에 처음 오게 되었을 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데 정말이지 그놈의 ‘부모’, 그것 하나가 흠결인 이은을 떠올리며 비서실장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뭐, 얘기를 하긴 해야 하지.”
하지만 이 회장의 반응이 조금 뜨뜻미지근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뭐…….”
이 회장이 먼 산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비서실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세완보다 이은을 더 아끼는 평소의 이 회장이었다면 누가 감히 내 손녀를 건드리냐며 비서실장보다 더 길길이 날뛰었어야 정상인데…….
“그, 뭐시냐, 거시기, 위기가 조금은 필요하지 않을까?”
이 회장이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비서실장이 눈을 세모로 떴다.
“회장님!”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했기에 그가 내뱉은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놈의 중매! 그놈의 손녀! 그놈의 결혼!
이 회장은 그 망할 놈의 것들을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한 것이었다.
“깜짝이야.”
이 회장은 가식적 표정과 말투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서실장은 속 시커먼 영감님의 음흉한 속내에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은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겁니까?”
“말도 안 되긴 뭐가 말도 안 돼! 그럴 수도 있지!”
두 사람 모두 어디 하나 모자란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청춘남녀가 붙어 있다 보면 서로 사랑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이 회장이 항변했다.
“…….”
비서실장이 말없이 이 회장을 응시했다.
“아, 그래. 내 손자가 좀 부족하긴 하지. 그래서 회사를 주겠다잖아! ……그, 그 뭐시냐! 요즘 젊은 아가씨들은 성을 여자 쪽 성으로 하기도 한다는구먼. 그래! 데릴사위!”
대를 잇는다는 욕심은 애초에 없었다. 그냥 저 하나 잘 살면 되는 거지 제사며 차례는 개뿔이!
성씨, 그깟 놈의 것도 엄마 성을 따르나 아빠 성을 따르나 그게 뭐가 중요한가! 핏줄 이어진 손주면 그뿐이지.
“나 말고! 요즘 젊은 사람들이 거기에 신경을 쓰니 하는 말이야.”
“……하아.”
비서실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회장이 조금 더 작아졌다.
“그래도 우리 애가 얼굴이며 몸은 쓸 만하잖나. 걔가 또 이은이를 기가 막히게 좋아해요. 여자는 저 좋아하는 남자랑 결혼해야 행복하다고 하네.”
“…….”
“내가, 내가 손주도 봐 줄 거네. 요즘 맞벌이 부부들 믿을 만한 육아 도우미가 없어서 걱정이라며!”
비서실장은 재차 침묵했고, 이 회장은 점점 더 작아졌다.
“당연히 분가도 해야지. 주식이며 건물은 모두 이은이 앞으로 넘겨주고……. 세완이를 성형이라도 시킬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곱상한 외모의 가수며 배우들을 예시로 들며 이 회장이 간절하게 말했다.
평생 봐온 그 어떤 모습보다 간절해 보이는 모습에 비서실장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회장님, 그거 집착이고 미련입니다.”
“아, 누가 몰라?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봐야지!”
하면 된다!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대규모 간척사업에 착수했을 때도, 한겨울에 잔디밭을 만들어내라는 오더를 받았을 때도 그는 모두 성공시켰다.
모두가 그에게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최대 난관이었던 물막이 공사에서는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물살을 약화시켰고, 잔디밭은 잔디 대신 새파란 보리싹을 심어 그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건 비지니스가 아니잖습니까.”
지금까지 이 회장이 만들어낸 성과들은 모두의 비관에도 불굴의 의지로 이뤄낸 신화적 성공이었다. 그 성과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업무적 성공과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감정과 관계된 일이라며 비서실장이 항변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의지를 밀어붙였다.
“기다려 보게. 내가 하는 일이잖나. 다 되게 되어 있어!”
“……하아.”
“그런 의미에서 질투하기 좋은 괜찮은 남자 하나 없나?”
적당한 장애물과 고비가 있어야 사랑이 이뤄지는 법이라며 이 회장이 비서실장에게 요구 조건을 들이밀었다.
“경호도 좀 잘하고.”
겸사겸사 이은도 보호할 수 있는 남자를 원한다고 했다.
“이은이 취향은 아니어야 하고.”
조건이 점점 늘어났다.
“이은이 취향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압니까?”
“이은이가 어릴 때 좋아한 가수가 있어.”
이 회장이 오래된 자료를 꺼내놓았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구한 겁니까?”
비서실장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며 물었다. 이 회장이 답했다.
“춘천댁!”
아주 오래전, 이은의 방을 청소하다 보았다며, 춘천댁이 이은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며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두 노인네가 오래전부터 작당을 한 게 분명하다고 구시렁거리며 이 회장이 건넨 사진들을 보던 비서실장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닮았지?”
“예, 좀 닮았습니다.”
이 회장이 반색하며 건넨 질문에 비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수도 하얗고 곱상하고, 세완도 하얗고 곱상했다.
‘잘생긴 외모’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다 거기에서 거기인지라 누구를 가리지 않고 눈, 코, 입 위치가 비슷비슷했다.
“내가, 내가 그래서 세완이 녀석 밥그릇도 뺏었다네!”
이 회장이 뿌듯하게 말했다. 비서실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꽤 오래전, 한참 성장기이던 세완이 밥을 두 그릇씩 먹으며 쑥쑥 클 때 이 회장이 살찐다며 밥그릇을 뺏은 적이 있는데…….
“……회장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비서실장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이 회장이 답했다.
“그러믄. 이건 내 오래된 소망이나 다름이 없다네. 어때? 가능성 있어 보이지?”
재계의 늙은 여우라 불리는 이 회장답지 않은 해맑음에 비서실장은 순간 세완이 누구를 닮은 것인지 30년 만에 깨달았다.
“뭐, 그러게 말입니다. 가능성도 있을 수도 있겠네요.”
이 회장은 비서실장의 대답에 반색하며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그 즉시 문 대표를 소환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BS그룹의 경호보안계열사인 시큐리티의 수장은 이은에게 붙일 경호원 리스트를 들고 이 회장의 저택에 방문했다.
* * *
백수 한량이라며 잦은 구박을 받은 세완이었지만 정말 진심으로 기가 죽거나 의기소침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적성과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 적성과 재능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니까.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세완은 언제나 그가 얻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늘 얻고자 하는 만큼의 성취를 얻어왔다.
국가대표와의 펜싱경기에서 승리하고, 해외기업투자로 웬만한 계열사의 연간 매출을 넘는 수익을 얻고, 소소하게 작곡가로서 이름을 얻는 그 모든 것에 세완의 성취가 있었다.
그게 타인이 이야기하는 공부나 일이 아니었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제법 의기소침한 상황이었다. 사흘에 걸친 노력에도 세완은 백희경과 관련해서 그 어떤 수익도 얻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가리봉동 쪽방촌, 벌집촌 그 어딘가에 백희경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 세완은 백희경이 이은을 위협하는 데 있어 방어하고, 그녀를 경찰에 집어처넣을 그 어떤 수단도 갖추지 못했다.
이제 남은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은 이은에게 그녀가 지금 위험에 빠져 있음을 알리고 경호원을 붙여 주는 것이다.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데면데면한 사이, 이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세완은 어렵게 그녀에게 말을 꺼내 볼까 했다.
그것을 위해 찬주가 추천한 여성 경호원 다섯과, 남성 경호원 두 명의 프로필을 손에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