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세완이 백희경의 존재에 대해 좀 더 긴장했다면, 이은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경호원을 붙였다면, 아니 세완이 이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사고였다.
말로는 복직 때문에 회사에 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이은이 회사에 가는 날이 ‘오늘’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소원을 집에 들이지 않았다면, 백희경도 이은을 찾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의도는 좋았을지 몰라도 그 결과가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그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 사소한 가정들이 세완을 자꾸만 자책을 하게 만들었다.
“미친놈.”
그 미련의 흔적을 조금씩 꺼내 놓은 단상에 찬주가 욕설을 내뱉었다. 세완은 씁쓸한 표정만 지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고개를 돌리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던 이은의 모습이 있었다.
뭐가 뭔지 그도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정리가 안 되는 기분이었다.
당장 나서서 뭔가를 하기에는 각 상황마다 퍼즐이 몇 개씩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있기에는 그가 미칠 것 같아서 뭐라도 조사를 하려고 하는데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래서 조사하는 것인데……. 하!
빌어먹을 섬! 빌어먹을 백희경! 처음부터 가는 게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서로에게 화내 본 적 없는 상대와의 싸움은 세완을 지독하게 힘들게 했다.
철없는 한량으로 살며 이은에게 등짝을 맞던 불과 몇 주 전이 세완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그리웠다.
“맞는 걸 좋아하는 건 변태라니까.”
찬주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변태라도 좋으니 세완은 이은과의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할 수 없어서, 세완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영상 분석이나 해.”
새벽 1시 40분, 세완은 기어코 찬주를 컴퓨터 앞에 끌어다 앉혔다. 찬주는 상당히 유능한 일꾼이다.
* * *
하루, 이틀, 사흘.
처음에 병실에서 세완이 뛰쳐나갔을 때까지만 해도 바쁜 일이 있어서 그랬을 거라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틀, 사흘째가 되도록 병원에 안 오는 것은 물론이고 집에도 안 들어왔다고 하니 이은은 조금씩 세완이 걱정됐다.
화낸 건 화낸 거고, 걱정되는 것은 또 별개다.
다 큰 성인 남자에게 할 걱정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밥이라도 굶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녀가 너무 속이 좁았다. 소원과 친해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세완에게 말도 안 되는 화를 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늘 퇴원해서 집에 오는데도 나타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이은이 그녀의 침대에 눕듯이 앉아 몸을 동그랗게 모았다.
모든 것이 다 그대로인데 어째서 옆방에 세완이 없다는 것이 자꾸 이 공간을 낯설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원래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 아닌데 요즘 그녀의 모습은 그녀 자신도 참 낯설었다.
낯선 스스로의 모습에 흠칫하고,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면서 자학에 가까운 자기성찰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불안한 건 알겠어. 내 잘못이네. 그런데 이은아, 나는 네 아들이 아니야. 네 아들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며칠 전 세완과 다퉜을 때, 그가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맞는 말이다.
남매처럼 자라 남동생처럼 휘두르고, 막 굴리긴 했어도 이은에게 동갑내기 아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은 세완의 목소리며 표정이 꽤나 답답하고, 짜증 나고, 울화에 차 있었던 것 같아서 이은은 어쩐지 그 말을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바보 같아, 정말.”
아들이면 엎어놓고 등짝이라도 팡팡 때리지!
“…….”
아니다. 사실 세완이 잘못한 건 없었다.
소원과 친하게 지낼 수도 있지 뭐.
걱정이 되니까 소리 정도는 지를 수도 있다. 그녀는 안 그랬나? 백수 한량 같은 세완이 걱정돼서 쫓아다니면서 잔소리했었다.
연예인과 정치인, 재벌 2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질긴 게 정이라고 ‘우리 세완이 사람 구실은 해야지!’ 그러면서 뭘 하듯 엄마처럼 쫓아다니며 잔소리했었다.
“……내 잘못인가?”
그러고 보니 엄마는 아니지만 살짝 그 비스무리한 정도로 걱정을 하긴 했던 것 같다. 정작 도움을 받고, 정서적으로 기대고 있었던 것은 이은이었으면서.
어쩌면 그녀는 세완을 구박하고 챙김으로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를 만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필요한 존재예요.
제가 세완이를 챙기는 것을 보세요. 저는 이 집에 꼭 필요한 존재예요.
“약아 빠졌어, 정말.”
어린아이였는데도 그녀는 아마 본능적으로 그렇게 계산하고 움직였나 보다.
“……질릴 정도네.”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밀려 왔다.
생각이 지나쳐 너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냥 어린 날의 이은은 세완이 좋아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은은 어째 자신이 그렇게 순수하고 착한 존재였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모두 그랬다.
“앤데도 영악해요. 애가 순수한 구석이 없어.”
초등학생 때 담임이다. 3학년이었나, 4학년이었나?
그녀는 그냥 담임선생님이 좋아서, 예쁨을 받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심부름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담임은 그런 그녀에게 영악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애들은 장난도 치고, 사고도 치고 그래야 하는 건데 눈치를 너무 봐.”
“부모 없이 자라서 그런가?”
“에이, 세완이 봐요. 걔는 뭐 부모가 있나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할아버님이 혼자 키우시잖아요. 그런데 걔가 뭐 누구 눈치 보는 거 봤어요? 그냥 천성이야, 천성!”
“어머나! 비교군이 너무 하잖아. 세완이 할아버님은 BS그룹 회장님이신데!”
“그건 그렇다. 내가 너무 했나?”
“그래요. 너무 했다! 너무 극과 극이잖아.”
두 선생은 그렇게 깔깔대며 웃었다.
그 후로도 이은은 애가 영악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애가 고아라서 그런가 봐. 너무 독해. 어떻게 전교 1등을 안 놓쳐? 인간미 없이!”
“독하다, 독해. 무슨 여자애가 이래? 5개 국어가 다 웬 말이야? 우리 학교 남자애들 기죽어서 어디 살겠나…….”
“이은이 또 상 받았대요? 걔는 무슨 애가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 하긴. 고아니까. 영악하게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해야지.”
처음에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상처를 입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덤덤해져서 이조차 칭찬이려니 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다는 같은 학원, 다른 학교에 다니는 어떤 여자애는 똑똑하고 영리하다는 말을 듣는데 그녀는 고아라서 그런지 애가 독하고 모질어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억울했고, 나중에는 그녀에게 부모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녀의 천성이 정말 영악하고 되바라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부모가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세완에게는 재벌 회장이라는 든든한 친조부가 있었다. 그 재벌 회장에게 후원을 받을 뿐인 이은과는 사정이 달랐다.
그래서 어린 날의 이은은 세완을 구박하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든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이만큼 쓸모 있는 존재니까 버리지 말아 달라고, 어쩌면 그래서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한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세완이 속상했겠네.”
이은이 작게 중얼거렸다.
별거 아닌 고아 계집애한테 등짝 맞아가면서 구박을 당하던 세완은 걔 나름대로는 잘 살고 있는데 억울하게 구박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사실 세완은 그녀가 아니더라도 잘 먹고 잘 살았을 거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물려받을 재산이 말 그대로 어마어마하니까.
걔는 마냥 해맑게만 살아가도 됐을 거다. 뇌가 얼마나 깨끗하고 순수하든 간에 보호자가 워낙에 든든하니까.
옆에 변호사며 유능한 비서들,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자꾸만 생각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이은은 고슴도치처럼 모난 가시를 뾰족뾰족 세우며 타인을 상처 입히고,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
“못났다, 진짜.”
그리고 그 결말은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다.
이은은 어쩌면 세상에서 그녀 자신을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그 반대편 극단에 있는 세완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너무나도 영악해서 그녀의 머리는 제 감정을 그녀 자신도 모르게 능숙하게 다듬고 포장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세완에게 느끼는 이 친숙함과 좋아함이 세완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세완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더 이득이라 머리로 계산해서 결정을 내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 소망이 있다면 세완을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길 바란다.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을 머리로 계산해서 옆에 두는 것이라면 너무 슬프니까…….
“영악한 애들은 정말 너무 싫어.”
이은은 스스로를 욕했다.
그 언젠가 어른들이 뱉었던 그 말을 스스로에게 내뱉으며 이은은 스스로를 가시로 찔렀다.
* * *
결과적으로 말하면 동선 파악은 실패했다.
대중교통을 타거나, 도보로 걸었을 때의 동선은 모두 파악이 됐지만 문제는 백희경이 쪽방촌, 일명 벌집촌이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했을 때부터였다.
성인 한 명 누울 만한 크기의 방이 벌집처럼 어지럽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쪽방촌의 생태상 건물의 대부분은 불법 구조물이었고, 무엇보다 일단 그곳에 도심처럼 촘촘하게 CCTV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도심이야 도로변 CCTV가 없다면 상가 CCTV도 있었고, 하다못해 차량의 블랙박스조차 있었지만 벌집촌에는 그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사흘에 걸친 추적은 실패했다. 그들이 알아낸 것은 딱 하나, 백희경이 일주일에 서너 번은 저택의 주변에 와서 그들의 집을 살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