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네 아들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세완이 재차 강조했다.
“누가 너보고 내 아들이래?”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그렇잖아. 아파서 자기 몸 하나도 건사를 못하면서 어떻게 회사에 찾아올 생각을 해!”
언제나 이은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말이 신앙이고 종교인 것 따르는 세완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났다.
이은이 챙겨 주는 것이 좋았고, 그녀가 잔소리를 하는 것도 좋았다.
일이나 공부를 싫어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은이 그를 쫓아다니는 모습이 좋아서 더 농땡이를 부렸다는 것이 솔직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은의 부상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다.
지금 현재를 사는 서른두 살의 세완도, 회사에 입사한 스물일곱 살의 세완도, 어쩌면 그녀가 첫사랑이었을 열일곱 살의 세완도, 이은을 처음 만난 일곱 살의 세완도! 그 어느 누구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다.
세완이 화를 내는 모습에 이은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가 다쳐서 화를 내는 거니 세완의 심정은 이해한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에게 화를 내는 세완이 이은은 서운하고 속상하고 야속했다.
너무 속상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던 아침의 일까지 떠올랐다. 언제는 백희경 딸이랑 노는 데 바빠서 내가 밥을 먹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더니!
속상해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그런 이은에게 세완이 질문을 던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야?”
“버스에서 굴러떨어졌다니까.”
세완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는데 오는 말이 곱지 않으니 가는 말도 곱지가 않았다.
“가만히 있는데 버스에서 굴러떨어지진 않았을 거 아니야?”
원인 제공자가 누구든, 버스 회사까지 고소하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세완에게 이은이 짜증 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몰라. 누가 밀었는지, 내가 알아서 굴러떨어졌는지!”
그녀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이은이 내세운 이유는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었고. 다른 것도 아닌 이은의 몸과 관련된 핑계가 등장했기에 세완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두 시간 뒤, 세완에게 연락을 받은 이 회장과 춘천댁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사실 처음에는 집에서 걱정할 것을 우려해서 이은의 부상을 비밀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를 부딪친 이후, 이은이 장시간 정신을 잃었던 데다가 경미하긴 하지만 일부 출혈소견이 보여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쉽게 퇴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지라 세완은 결국 집에 연락할 수밖에 없었고, 예상대로 이 회장과 춘천댁은 대경실색하며 달려왔다.
“늙은이 심장 떨려 죽는 것을 보고 싶은 게야?”
이 회장은 걱정 섞인 역정을 부렸고, 춘천댁은 눈물까지 흘렸다.
“죄송해요.”
세완에게는 한껏 모진 말 해가면서 뻗대던 이은이지만 부모와 다름없이 그녀를 키워 준 두 사람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이은의 사과에 춘천댁이 말했다.
“죄송은 무슨 죄송이야? 아픈 사람은 넌데! 몸은 좀 괜찮니?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야?”
세완을 통해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지만 춘천댁은 이은의 입으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은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야기는 그들 모두를 대경실색하게 만들었다.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어요. 저한테 한 말이 아닐 수도 있고요. 소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디 그 애 하나뿐이겠어요?”
세 사람이 너무나 놀라자 이은이 그들의 동요를 가라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말 한마디로 가라앉기엔 그 전에 내뱉은 말의 여파는 지나치게 컸다.
“그런 말은 안 했잖아!”
세완은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소원이가 뭐 어쨌는데?”
춘천댁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별거 아니에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애써 그녀를 진정시킨 이은이 세완을 보며 말했다.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어.”
“퍽이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소리치려던 세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이은을 보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런 세완을 다독거린 이 회장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도 너는 분명히 들은 게지?”
“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네가 들은 게 맞다. 네가 잘못된 이야기를 할 리가 있나!”
이 회장이 상황을 정리했다.
“하지만…….”
머뭇거리던 이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들은 이상한 말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얼떨결에 튀어나온 거지 처음부터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은은 별것 아닌 일로 세완과 이 회장을 번거롭게 하는 것일까 봐 그것이 가장 걱정스럽다.
입술을 벙긋거리다 다시 닫고 고개를 숙이는 이은을 보며 이 회장이 혀를 찼다.
부실한 손자 녀석과는 결을 달리할 정도로 똘똘하고 당찬 녀석인데 고아인 줄 알았던 이전에도, 백희경의 존재를 안 지금도, 제 피붙이와 관계되면 꼭 이런 모습을 보인다.
친손녀와 다름없이 키웠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이 회장은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은을 향한 안타까움을 애써 감추며 이 회장이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 집구석은 왜 애먼 너를 잡고 늘어져? 염치도 없이!”
딸이든 조카든 간에 제 손으로 버린 아이가 혼자서 이만큼 잘 컸으면 장하다고 칭찬을 해야 마땅한 것을, 어떻게든 이은에게 똥물을 튀기려고 하고 있었다.
이유도 말 안 해주고 섬으로 내려오라 그러더니 급기야는 납치해서 죽이려고 하고, 이제는 애를 버스에서 굴러떨어지게 만들어 죽이려고까지 했다.
제 딸이 걱정되면 직접 와서 자기 딸을 만나든지 데려가든지 할 일이지 뻔뻔하게 남의 귀한 손녀를 자꾸 다치게 만든다며 이 회장이 노골적으로 쌍시옷 욕설을 내뱉었다.
“소원이 그놈 내보내라. 나도 내 자식이 더 중허다. 남의 자식 때문에 내 새끼 다치는 꼴을 어찌 보누!”
불똥은 소원에게 튀었다. 이 회장은 소원이도 꼴 보기 싫다며 얼른 내보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오갈 데 없는 아이인지라 이 회장의 말처럼 소원을 지금 당장 내보낼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그녀의 일에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 주는 이 회장의 모습에 이은은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기뻤다.
유치한 행동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녀도 누군가에게 귀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이은은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이은을 세완이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바라보았다.
* * *
이 회장의 등판 이후 응급실에서 검사를 받던 이은은 그 즉시 VVIP 병실로 옮겨졌다.
하룻밤만 경과를 보면 되는 거라고 이은이 말렸지만…….
“하룻밤은 입원이 아니냐? 괜찮다. 할애비 돈 많다.”
이 회장은 특급호텔 스위트룸보다 비싼 VVIP 병실로 이은을 옮긴 것으로도 모자라 병원장부터 시작해서 각 분과의 과장들까지 일렬로 줄을 세웠다.
이미 끝난 진료이고 검사이고 치료임에도 뒤에 레지던트들을 우르르 매달고 다니는 높으신 분들이 야밤에 불려 와서 브리핑을 했다.
그 높으신 분들은 친절하기 그지없었지만 이은은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참으로 송구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손녀분은 괜찮으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손녀분이 회장님을 닮아 참 미인이십니다.”
성도 다르고 외모도 다른데 이분들은 어째서 이은을 망설임 없이 이 회장의 손녀라고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우리 손녀가 날 닮았어!”
주책맞은 이 회장의 언사에 오해와 관련한 책임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이 회장의 친손자가 옆에 있다 보니 참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혹시라도 세완이 불쾌해할까 봐 눈치를 보는데 마침 그녀를 보고 있던 세완과 눈이 마주쳤다.
“……!”
이은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왜 고개를 돌렸지?’
눈이 마주치면 마주치는 거지 왜 시선을 피한 건지 스스로도 모르겠다며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세완을 보려는 그 찰나였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세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놈아, 이은이가 아픈데 어딜 가?”
“이 시간에 어딜 가게?”
이 회장과 춘천댁이 그를 말렸지만 세완은 아랑곳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생각나서요.”
“이 야밤에?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다고!”
너 한량인 거 누가 모르냐며 이 회장이 그를 불렀지만 세완은 무섭게 굳은 얼굴로 말없이 병실을 나섰다.
“아니, 저놈이 도대체 왜 그래?”
이 회장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세완을 타박했다.
이은은 어쩐지 그게 친손녀도 아니면서 친손녀인 척을 했던 자신의 탓인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잘못했다.
* * *
병실을 나온 세완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금 갈게. 회사에서 보자.”
찬주에게 전화를 건 세완이 다짜고짜 본론부터 던졌다.
「인마, 앞뒤 없이 무슨 소리야?」
느긋한 저녁 시간을 보내던 찬주가 당혹스러워하며 반문했다.
「지금 몇 시인지는 알아? 내가 지금 어디인지 알고…….」
아닌 밤중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세완의 강압적 언사에 찬주가 발끈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이은의 이름에 찬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은이한테 붙였던 사람들도 다 불러들여.”
「……김이은한테 무슨 일 생겼어?」
조심스러운 찬주의 질문에 세완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가서 얘기해.”
전화로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야, 그…….」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찬주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세완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은의 부상, 갑자기 튀어나온 소원의 이름, 도대체 나는 백희경이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게 뭐가 있나,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기 싫어하던 이은의 모습…….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유쾌하고 해맑은 모습을 잃지 않는 세완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