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53)화 (53/100)

53화

자려고 한 것은 아닌데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비몽사몽으로 눈을 떴는데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낯선 존재들이 보였다. 뭔가하고 방문을 연 이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비닐봉지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는데 그 안의 내용물들이 특이했다.

김밥, 만두, 족발, 닭강정, 잔기지떡, 샌드위치, 블루베리 롤케이크…….

이은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옹기종기 다양하게 모여 있었다.

“이세완?”

미간을 찌푸린 이은이 누가 봐도 범인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예 그녀의 방문 앞에 뷔페를 차려 놓았다. 이은은 쪼그리고 앉아 비닐봉지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단순히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을 파는 가게도 그녀가 좋아하는 곳으로만 골라서 사다 놨다.

하지만 양이라도 좀 적게 사 오지 한 메뉴당 3, 4인분은 족히 될 듯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아니, 이걸 누가 다 먹으라고…….

이은은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짓다가 세완의 방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혀 있었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는 게 대순가? 세완이 사고를 칠 때면 언제나 늘 그랬듯 잔소리를 하기 위해 그녀가 세완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회사겠네.”

세완의 방에 있는 시계가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속상해서 방으로 돌아가 누웠었다. 그리고 속이 상한 이유는 소원과 세완의 모습 때문이었다.

속이 상했던 이유까지 한순간에 다 기억이 났다. 세완에게 잔소리를 할 셈으로 기세등등하게 방으로 찾아왔던 이은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이은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녀의 방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옆인 그녀의 방이 마치 천릿길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은은 세완의 방문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 세완이 갖다 놓은 것이 분명한 비닐봉지들이 보였다.

이은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바빴겠네. 출근은 안 늦었으려나 모르겠네. 또 할아버지한테 혼나겠다. 바보 같긴.”

이은이 무릎을 모아 그 위에 팔을 올렸다. 고개를 모로 세운 이은이 팔뚝에 얼굴을 기대고 비닐봉지를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착해, 아무튼.”

잘못한 것은 그년데 이은의 세완이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려 한다.

아주 어린 날, 우는 그녀에게 제가 아끼던 로봇과 팽이, 장난감들을 떠넘기던 그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한결같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먹지도 못할 음식을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타박을 해야 하는데 그 음식들을 보고 있노라니 오전의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저 음식들은 세완에게 이은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은에게 세완이 소중하듯, 그에게도 이은이 소중하다는 증거인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보같이.”

이은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눈을 감아도 머리는 여전히 복잡했다.

사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도 말도 안 되는 거다. 세완의 집이고, 세완의 집에 누구를 들이든 그의 마음대로인데 그녀가 뭐라고 거기에 말을 얹는단 말인가.

“그래도 백희경 딸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침에 소원이 했던 그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아저씨 저 좋아해요?”

당돌하고 맹랑한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귓전을 맴돌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것은 안다. 세완도 기겁하면서 부정했고.

하지만 왜 자꾸 생각나나 모르겠다.

만약 소원과 세완이 만나고, 사귀고, 결혼하게 된다면 그들의 관계는 생판 남인 이은과 달리 ‘가족’이라는 무엇인가로 엮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구보다 끈끈한, 가족 같은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가족과 같다는 것이 진짜 가족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머리로는 언제나 알고 있었던 그것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가슴에 새겨진 적은 처음이다.

물론 25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 가볍지도 않고, 세완이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그녀가 이 집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에이. 아니야, 아니야.”

이은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친김에 손으로 머리도 두어 대 때렸다.

요즘 사건과 사고가 너무 많아서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는 듯하다. 어쩌면 다쳤다는 핑계로 할 일 없이 집에서 백수 생활만 해서 자꾸 이런 헛생각이 드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마 그럴 테다.

하지만 자꾸만 나중에 세완이 결혼하면 그녀의 자리는 미래의 세완의 부인이 차지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할아버지의 말벗이나, 바둑친구, 세완의 가장 친한 친구……. 이은이 존재했던 모든 공간에 그녀 대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한 일이고, 익숙해져야 하는 일인데 왜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이렇게 복잡한지 모르겠다.

이은은 비닐봉지들을 보다가, 천장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아무리 해도 머리가 맑아지지 않아 세완의 방문에 머리를 박았다.

하지만 뒤통수를 탕탕, 수차례 박았는데도 머리는 여전히 복잡하고 가슴도 답답했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 *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길고 지루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그랬다. 이은의 화가 좀 풀렸으려나 싶은 궁금증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그가 생각이 모자랐다. 이은이 백희경과 그 딸에게 어떤 감정을 지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소원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다니…….

그는 이은을 달랠 수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을지로에서만 파는 계란지단 가득 달걀 김밥, 미슐랭에도 올랐다는 파주의 200년 전통 눈꽃 만두, 연예인들의 단골집이라는 서울 3대 족발집 중 하나인 오향족발 등, 이은이 좋아하거나 한 번이라도 괜찮다고 했던 음식들은 모두 기억을 짜내 구했다.

입맛이 없다는 이은이 그 음식들 중 뭐라도 먹고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이 반 그리고 그 음식을 보고 그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화를 풀어 줬으면 하는 마음 반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오픈하지도 않은 매장에 전화해서 닦달하는 과정을 수차례 거친 결과물이 이은의 방문 앞에 전시되었다.

물론 전부 다 그가 직접 가서 픽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춘천에 있는 닭강정을 그가 무슨 수로 픽업을 하나!

퀵서비스와 배달 기사님들을 적절하게 활용했고, 서울 시내의 몇 군데는 그가 직접 가서 픽업했다.

그래도 점심시간에 집에 가서 음식들을 이은의 방문 앞에 늘어놓은 것은 그가 한 일이다.

“그 정성을 이은이가 알아줘야 할 텐데…….”

세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점심도 굶고 뛰어다녔던 저를 불쌍히 여겨서 이은이 용서를 해 주면 좋겠다.

용서라는 평화로운 결과가 아니라,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샀느냐는 잔소리 폭탄이라는 폭력적인 결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뭐가 됐든 상대도 안 해 주던 아침의 모습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이은은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때문에 세완은 애먼 핸드폰을 타박했다.

“……고장 났나?”

합리적인 의심 끝에 사무실 전화로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핸드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김 비서한테 연락 온 거 없죠?”

비서실의 윤 대리를 닦달해 보기도 했지만 이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전화기가 고장 난 건 아니겠죠?”

비서실 전화기가 고장 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해보기도 했지만 미친놈을 바라보는 듯한 윤 비서의 눈빛에 세완은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세완은 휴대전화를 붙들고 피 마르는 기다림을 이어가야 했다. 하지만 오후 6시, 퇴근 시간까지도 이은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언제나 속전속결 폭행으로 마무리하는 그녀답지 않은 반응에 세완은 반나절 사이 부쩍 지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패라.”

취향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세완은 진지했다.

맞을 땐 맞더라도 그는 이 바늘방석 신세를 하루빨리 끝내고 싶었다.

언제나 칼퇴근을 추구하는 그답지 않게 사무실에서 한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세완은 일단 부딪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무릎? 꿇으라면 꿇지, 뭐.

이은이 좋아하는 스트레스 해소용 매운 떡볶이와 닭발을 구매한 세완이 조심스럽게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음식이 든 비닐봉지를 가슴 앞으로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은이 보이면 일단 음식부터 상납하고 사과하려고.

얼핏 비굴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와 이은이 자존심을 따질 사이도 아니고, 그의 잘못으로 이은의 기분이 상한 것은 사실이니 세완은 우선 납작 엎드릴 준비를 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기분이 풀리면 다행이지.

그는 그렇게 양손을 무겁게 해서 집으로 향했다. 이은을 보면서 읊을 대사와 지을 표정을 준비하면서 포부도 당당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눈썹은 아래로 끌어내리고 촉촉한 눈동자를 위해서 안약에 넣었다.

공부는 못했어도 불쌍한 척하는 것은 그의 전공이었다. 비록 그 대상이 김이은으로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25년간의 경험은 그를 준연기자 정도로는 만들어줬다.

그런데 집에 들어선 그에게, 춘천댁 아주머니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왜 혼자만 들어와? 이은이는 안 들어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