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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52)화 (52/100)

52화

이은은 밤새 세완이 소원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려는 의도에 대해 고민했고, 세완은 어떻게 하면 이은 몰래 백희경 일당을 퇴치할 수 있을까 대해 고민했다.

이 회장은 25년 동안 묵혔던 손자의 성적으로 인한 울화가 새삼 치밀어 올라 밤을 새웠다.

그렇게 누구 하나 단잠을 잔 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말없이 아침 식사를 했다.

그 가운데에서 소원은 눈동자를 데굴거리면서 눈치만 살폈다.

어제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은데 아무도 소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세완조차 소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소원은 주저하다가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일동의 눈이 모두 소원을 향했다.

세완과 이 회장, 이은, 춘천댁까지!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들 앞에서 소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제 아저씨가 이야기한 거 있잖아요. 그 월세……. 진짜 여기에서 살아도 돼요?”

“아!”

그러고 보니 그 부분이 아직 해결이 안 되긴 했다.

소원의 거취는 이은도 궁금했던 부분이라 세완을 바라보았다.

세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진짜로 살지 그러면 가짜로 살게? 월세나 제대로 내. 월세는 매달 내 통장으로 넣고.”

중요한 건 월세가 아니었지만 세완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금전적인 관계를 명확하게 했다.

이 회장은 왜 월세를 네 통장으로 받느냐며 세완과 티격태격했지만 소원이 이 집에 머무는 일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것 같았다.

“…….”

이은은 그런 조손의 모습을 보며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 집은 이 회장의 집이자 세완의 집이고, 그러니까 이 집에 누가 머물든 그것에 대해서 가타부타할 권리가 이은에게는 없었다.

이은 또한 소원처럼 저들의 호의로 이 집에 살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야속하고 속이 상한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없던 입맛이 더더욱 없어졌다. 이은이 말없이 밥그릇의 밥알 숫자만 헤아리고 있는데 소원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저 좋아해요?”

“……!”

누가 더 많이 경악한 것인지 모르겠다.

소원의 난데없는 질문에 이은은 깜짝 놀라 세완을 바라보았고, 이 회장은 경악하는 눈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완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

“밥맛 떨어지게 무슨 소리야? 돌았냐?”

한 치의 고민이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소원이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갑자기 저보고 이 집에서 살라고 하길래…….”

“넌 불우이웃돕기도 좋아해서 하냐?”

물론 불우이웃돕기보다는 좀 더 복잡한 상황이긴 했지만 세완의 머릿속에 소원이라는 존재는 정말이지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심전력으로 부정하고 거절하는 모습에 소원이 입을 삐죽이면서 말했다.

“나도 아저씨가 저 좋아하는 거 별로거든요?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여자주인공을 좋아해서 자기 집에 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얘가 꿈과 현실을 구분 못 하네. 네가 그 여자주인공들처럼 예뻐? 거울 안 보냐?”

얼굴에 ‘혐오’라는 단어를 새긴 세완이 세상을 현실적으로 살라면서 소원을 구박했다. 소원이 불퉁한 표정으로 세완을 노려봤다.

아님을 알면서도 물어본 이유는 하도 의외의 제안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 부끄럽게 만드나!

“아니면 아닌 거지 무슨 말이 그래요? 그리고 나 정도면 괜찮지!”

내가 이래 봬도 인기가 많았었다는 소원의 말에 세완은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며 소원을 비웃었다.

소원과 세완은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은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평소였다면 저 자리엔 이은이 있었을 것이다.

이은은 세완에게 생각 없는 백수, 한량이라며 구박을 했을 거고, 세완은 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들리면서 투덜거렸을 거다.

“아, 좀! 이 백수 한량아, 너 정말 일 안 할 거야?”

“너 있잖아. 우리 김 비서 씨! 네가 있는데 내가 일을 왜 해?”

헤실헤실 웃으면서 일을 떠넘기던 세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은데 왜 그게 벌써 몇 년은 더 된 것 같은 아주 오래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은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허전하고 뻐근하게 느껴졌다.

뭔가 꽉 막힌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목이 멨다.

“아, 그만하고 밥들 먹어!”

이 회장이 시끄럽다며 타박을 해도 세완은 연신 낄낄대며 소원을 놀렸다.

만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나이 차이가 얼만데!

분명히 세완은 소원을 여동생처럼 대하는 것이리라. 아는데, 참 잘 알고 있는데…….

“못생긴 게! 알지? 너 못난인 거? 못생겼는데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너 공부도 못하지?”

세완의 목소리가 이은의 신경을 자꾸 거슬리게 했다.

탁!

이은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춘천댁과 이 회장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입맛이 없어서요.”

이은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입맛이 없어도 먹어야지. 밥을 굶으면 어쩌누!”

“그러게. 이은아, 입맛이 없어도 좀 먹자. 응? 아니면 내가 뭐 해 줄까?”

춘천댁은 이은에게 혹시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반면 세완은 여전히 소원을 놀리느라 바빴다.

평소였다면 누구보다 먼저 이은에게 신경 썼을 세완인데 소원을 놀리는 것이 퍽이나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거리가 100미터, 200미터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바로 코앞, 같은 식탁에서 이뤄지는 온도차 큰 대화에 이은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괜찮아요.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요. 조금 있다가 먹을게요.”

이은이 애써 웃으며 사양했다. 그러나 그 웃음을 오래 유지할 자신은 없었다.

“죄송해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진지 맛있게 드세요.”

고개를 꾸벅인 이은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이은이 일어나자 그제야 세완은 그제야 이은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녀를 불렀다.

“이은아, 어디가? 식사는?”

하지만 그녀는 대답은 하지 않고 세완을 한 번 바라본 뒤 그대로 고개를 돌려 바람처럼 다이닝 룸을 벗어났다.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 세완이 놀라서 눈을 끔벅였다.

“이은이 왜 저래요? 밥 안 먹는대요?”

세완이 주변을 향해 질문했지만 이 회장은 말없이 혀만 찼고, 춘천댁은 세완 앞에 있던 반찬 접시를 뺏어서 이 회장 앞에 내려놓을 뿐이었다.

“회장님, 식사하세요.”

반찬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온 가족의 냉담한 모습에 세완은 정말 진심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그보다 그를 더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약 먹으려면 식사해야 하는데…….”

세완은 이은의 방이 위치할 2층 그 어딘가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소원은 숟가락을 물고 그런 세완을 바라보며 동그란 눈을 깜박거렸다.

* * *

이은이 갑자기 냉담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리라.

그의 유일한 장점은 자기객관화가 잘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은은 언제나 옳고, 그녀가 화가 났다면 세완이 잘못한 거다. 이 회장과 춘천댁 아주머니의 반응을 보니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그가 잘못한 게 맞나 보다.

그리고 잘못했으면 빌어야지!

지난 25년간의 경험이 세완을 현명하게 만들었다.

세완은 아침 식사를 들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가볍게 노크한 그가 방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웅크리고 있는 이은이 보였다.

그는 단순히 잘못한 게 아니라 아마 죽을죄를 지은 것인가 보다.

쟁반을 든 세완이 입으로 노크 소리를 냈다.

“똑똑! 식사 배달 왔습니다.”

“…….”

“똑똑?”

“…….”

“이은아, 식사 가져왔는데 안 먹을 거야? 약 먹어야지.”

세완이 재차 불렀지만 이은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세완은 이은이 자나 싶어서 식사를 담은 쟁반을 책상에 내려놓고 침대로 다가갔다.

자는 애를 깨우고 싶지는 않은데 약을 안 먹으면 좀 있다 많이 아플 텐데…….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세완이 슬쩍 이은의 이불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이은을 깨우기 위한 소심한 몸짓이었다.

그때 이은이 세완의 손가락에 잡혀 있던 이불을 잡아채서 자신의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가. 나 피곤해.”

“안 잤어? 그러면 말을 하지.”

“피곤하다고.”

못된 행동인 것은 안다. 세완은 죄가 없고, 식사를 챙겨온 그에게 도리어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이은이 혼자서 괜히 제풀에 심술이 나서 짜증을 부리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세완의 얼굴을 보고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도 안다. 그런데 이은의 마음이 생각처럼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많이 피곤해? 밥도 못 먹겠어? 한 숟갈이라도 먹자. 약 먹어야 하잖아.”

“…….”

세완이 쓸데없이 착해서 더 속상했다.

“밥맛이 없어서 그래? 뭐 사다 줄까?”

세완이 재차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더 가슴이 답답했다.

세완의 잘못은 분명히 아닌데, 그가 소원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친하게 지낸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가 상관할 부분이 아닌데, 자꾸만 이은은 속이 상한다.

“나중에 먹을게. 잘 거야. 나가.”

그래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은 건재한지라 이은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감정을 억제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듣는 세완의 입장은 다를지 몰라도 그것은 이은의 최선이었다.

한껏 자제를 했음에도 그녀의 말투에서 차가움을 느낀 것인지 이은의 축객령을 들은 세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책상 위에 식사 올려놨으니까 일어나면 멀어.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하고. 바로 사다 줄게. 그리고…….” 

세완이 잠시 머뭇거리며 이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자라. 나갈게. 잘 자.”

뒤이어 문소리가 들렸다. 이은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아래로 내렸다. 문은 닫혀 있었고, 책상 위에는 밥과 국, 반찬 몇 개를 담은 쟁반이 있었다.

그 와중에 이은이 좋아하는 반찬으로만 담아왔다. 세완이 신경을 쓴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이은은 말없이 쟁반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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