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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50)화 (50/100)

50화

이은에게 떠넘기려는 그 모자란 놈이 등장했다. 그런데 도움은 커녕 방해만 된다.

이 회장은 거슬리는 바퀴벌레 보듯이 손자를 보며 말했다.

“너는 왜 오자마자 이 할애비를 방해해? 도움 안 될 거면 저기 방에 가서 잠이나 자!”

“할아버지가 말을 꺼내게 하잖아요. 왜 자꾸 멀쩡한 애한테 모자란 놈을 갖다 붙이려고 해요?”

잘나고 똑똑한 놈으로만 골라서 중매를 해도 모자랄 마당에 도대체 이은이한테 왜 그러냐며 세완이 발끈했다.

차마 네가 그 모자란 놈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 회장이 짜증 담긴 시선으로 손자를 노려보았다.

그때 이은이 슬그머니 세완에게 말했다.

“나 말고 너야. 장가보내려는 사람. 전 재산이랑 같이 너를 넘기신대. 손자며느리 될 분한테.”

“나를 왜?”

아니, 왜 잘 사는 사람을 똥값, 떨이 품목으로 만드느냐며 세완이 질색했다.

“증정품으로라도 가져가 주면 다행이지…….”

이 회장이 혀를 찼다.

함께 있으니 더 비교가 됐다. 한쪽은 한우 투 플러스고, 한쪽은 폐급 수입산이다. 이 회장은 미래의 증손자를 위해 양심은 잠깐 쓰레기통에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이은을 사이에 둔 조손이 서로를 보며 으르렁대고 있을 때, 춘천댁 아주머니가 허공에서 박수를 쳤다.

“그만 싸우고 이제 밥 좀 먹읍시다.”

그러고 보니 도대체 언제 갖다 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식탁에 밥이며 국, 반찬이 모두 세팅되어 있었다.

이 회장과 세완은 서로를 향해 크게 콧바람을 내뿜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 * *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이 회장과 세완 사이에는 찬바람이 감돌았다.

이 회장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망가뜨리려는 세완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세완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이상한 결혼 계획을 세우는 이 회장이 불만이었다.

나이 들면 주변에 있는 모든 젊은 남녀에게 짝을 지어 주려고 한다더니 정말 그랬다. 하지만 짝을 지어 주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먼저 해 줘야지!

여기에도 젊은 남녀가 있는데 왜 꼭 먼 데서 그들의 짝을 찾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구시렁거리던 세완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다 찬주 탓이다. 공연히 이상한 말을 해서!

“니들이 퍽이나 친구겠다.”

우리가 친구가 아니면 뭐냐고, 일곱 살 때부터 함께 자란 남매 같은 사이인데 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하게 만든다며 세완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별 해괴한 잡생각이 다 든다고 세완이 꿍얼거렸다. 그리고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회사 일부터 시작해서 백희경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백희경과 그녀의 공범이 과연 또다시 이은을 노리겠는가? 만약 노린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노릴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방어를 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리고 그러던 중 생각났다.

“야, 꼬맹이!”

세완이 소원을 불렀다.

이 집 사람들, 특히 이 회장 조손의 개싸움은 그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기에 동네 개싸움만큼의 신경도 쓰지 않고 식사를 하던 소원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요?”

“너 집 구했어?”

“아니요.”

변기가 부엌 싱크대 옆에 있기는 하지만 월세가 25만 원이었던 그 원룸을 보러 가려고 했는데 네가 못 가게 하지 않았느냐며 소원이 볼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찬주의 전화를 받고, 장물아비를 만나러 가느라 소원과 이은의 모든 일정을 정지시켰던 스스로를 떠올리며 세완이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싱크대 옆에 변기가 있는 건 좀 아니지. 너 그냥 월세 내고 이 집에서 살래? 25만 원에 해줄게.”

“네?”

소원이 놀라 반문했다. 이은과 이 회장, 춘천댁 아주머니도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지만 세완은 소원만 바라보았다.

그는 만약 그녀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 강제해야 하나를 궁리했다.

반지를 판 사람이 백희경일 가능성이 있는 이상, 세완은 소원을 내보낼 수 없었다. 인질이든 미끼든 그들도 무기 하나 정도는 쥐고 있어야지.

그때 이 회장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집이냐?”

집 가진 유세를 부리는 것도, 조손 간에 재산 다툼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지만 손자가 그의 집 일부를 세 놓아서 월세를 받는 것은 조금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 그 대상은 백희경의 딸이었다. 이은이 불편해하는!

“세를 놓고 싶으면 네 집에다가 해!”

거주를 이 회장의 집에서 해서 그렇지 알기로는 전국에 세완 소유의 집이 몇 채 있었다.

세완이 죽은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았던 한남동의 단독주택도 그의 명의이고, 야근할 때 사용하는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도 세완의 명의다.

서핑하러 가면 쓰는 양양의 고급빌라, 부산 해운대에 있는 마린뷰 아파트,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할 때 매매한 단독주택도 세완의 것이었다.

굳이 본가가 아니어도 되지 않느냐는 이 회장의 말에 세완이 조금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소원에게 그의 집에서 지내라고 한 이유는 그녀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소원을 감시하고, 백희경과의 접촉을 최소화해 그녀를 인질, 혹은 미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녀 혼자만 다른 집에서 지내게 한다면 그가 소원의 거취를 정해 주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소원이 있는 곳에서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이 회장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중요한 거냐?”

“네.”

“따라오너라.”

두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식사를 하다 말고 방에 들어간 두 사람 덕분에 저녁 식사는 그대로 흐지부지되었다.

차린 음식이니 그대로 들어도 되지만 이은은 왠지 입맛이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긴 했지만 밥 자체는 맛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밥 생각 자체가 사라졌다. 

이은이 좋아한다고 특별히 구매했다는 어느 맛집의 홍어회무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밥이 모래를 씹는 듯 더없이 까끌거렸다.

더 이상은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은은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은아, 왜? 더 먹지 않고?”

춘천댁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냥 입맛이 없어서요. 진통제 먹을 때가 됐나 봐요. 어깨가 좀 아파서…….”

“아유, 그럼 어서 올라가 봐. 약 꼭 챙겨 먹고!”

어깨는 괜찮았지만 핑계 댈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춘천댁 아주머니는 그것이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이은을 걱정하며 배려했다. 이은은 그것이 고맙고 감사하면서도 죄송해 그냥 고개만 꾸벅 숙였다.

“올라가 볼게요. 죄송해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런데 방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소원이 눈에 보였다.

소원에게도 세완의 제안은 뜻밖이었는지 언제나 전투적으로 식사를 하던 아이가 밥을 먹는 둥 하는 둥 하며 연신 이 회장이 방이 있는 곳을 힐끔거렸다.

이은은 안 그래도 없던 입맛이 더더욱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도대체 세완은 왜 그런 제안을 한 거지?

이은은 정말 궁금했다.

* * *

단둘이 들어온 방 안에서 세완은 이 회장에게 어쩌면 이은이 조금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가볍게 생각하고 자리에 앉았다가 심각한 이야기를 들은 이 회장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뺀질이 이세완이 책잡히지 않기 위해 회사 일까지 해가면서 죽어라 이은을 쫓아다니는 것을 보며 뭔가 일이 있음은 짐작했지만 섬에서 일어난 일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들었다.

“아니, 이 녀석아! 그럼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지!”

“기우인 줄 알았죠.”

설마 범인들이 서울로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철천지원수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뭔가 얻어내야만 하는 특수한 관계가 아니고서야 범행 피해자를 따라 가해자가 이동을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상황이다.

사실 이은의 재산이든, 보험금이든 간에 돈을 탐내 이은을 포항으로 불러들여 죽이려고 했다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다.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뭐가 됐든 간에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보통 그 1차 시도가 실패하고, 타깃에게 꽤나 든든한 보호자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 피해 대상을 바꾸는 것이 일반적인 범죄자들의 패턴이다. 초범이든 재범이든 동일하다.

때문에 사실 세완은 만에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은이 정말 위험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 붙여놨던 경호원이 이은에게 미행이 붙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장물아비에게서 반지를 찾으니 자꾸만 ‘혹시나’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물론 아직 벌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정확한 것도 없고. 모두 추측이고, 가정일 뿐이에요.”

굳이 따지자면 누군가가 이은을 미행했다는 것, 그것 하나만 분명했다.

그 외에는 모두 심증일 뿐이다.

그의 생각이 지나치게 그 영역을 확장한 것일 수도 있다. 가해자들이 그들을 따라서 서울에 온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단순히 경찰을 피해서 서울로 올라온 것일 수도 있고, 생활비로 쓰기 위해 반지와 시계를 팔았던 것일 수도 있다.

장물아비를 찾아간 일도 그냥 우연히 누군가에게 장물 처리 방법을 들어서 찾아간 것뿐, 범인들에게는 실제로 전과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게 문제다.

게다가 세완의 촉이 자꾸만 불안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도 가지고 싶은 거다.

“이은이는 모르고?”

“알리고 싶지 않아요. 불안해할 게 뻔한데…….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아직 뭐 하나 분명한 것이 없지 않느냐며 세완이 말했다.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몇 명인지도 모르고, 그들 중에 백희경이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백희경이 범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소원을 집에 데리고 있는 것도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완은 뭐가 됐든 간에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모두 김이은의 방패막이로 쓰고 싶다.

세완의 심장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왔다. 이 회장은 그런 세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 *

같은 시간, 이은은 방문을 반쯤 열어놓은 상태로 침대에 기대앉아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인적 없는 복도를 슬쩍슬쩍 훔쳐보며 아직 이 회장과 세완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음을 짐작하고, 과연 이 회장과 세완이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완이 어째서 소원과 함께 살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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