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세완이 찬주의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이은은 내내 그가 신경 쓰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딱딱하게 굳어 얼어붙었던 모습도 그렇고, 전화를 끊자마자 일이 생겼다며 서둘러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모습도 그렇다.
찬주와의 통화가 제법 의심스러움에도 군소리 없이 그를 보내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세완에게 안 해도 될 고생을 시키고, 무엇보다 돌아가신 사모님의 반지까지 잃어버리게 해서 이은은 정말 많이 미안했다.
헌데 그 와중에 저녁이 되었는데도 귀가를 하지 않으니 이은의 걱정이 깊어질 수밖에!
물론 대화를 하다 보면 시간이 늦어질 수도 있다지만 평소 세완의 생활 패턴을 생각하면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지라 이은은 자꾸만 세완이 걱정됐다.
그 걱정은 춘천댁 아주머니를 도와 저녁 식사를 차릴 때까지도 계속됐다.
“이은아, 그쪽에 접시 좀 꺼내 줄래?”
“네? 네!”
어깨를 다치긴 했지만 손은 사용할 수 있는지라 사소한 잔심부름 정도는 도우려고 했다. 그런데 실패인가 보다.
이은이 꺼낸 접시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은이 당황하며 사과했다.
“어머,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
서둘러 접시를 치우려는 이은을 춘천댁이 만류했다. 그리고 물었다.
“괜찮니?”
“네?”
“오늘 좀 안 좋아 보여서 말이다.”
“……네,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어요.”
언제나 빠릿빠릿, 눈치 빠르게 움직였던 이은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오후 내내 정신을 빼놓고 멍하니 있자 춘천댁 아주머니는 걱정스러웠던 듯하다.
걱정을 끼친 것이 미안해서 이은은 또다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죄송할 게 뭐 있어. 사람이 그럴 때도 있지. 이은이 너는 매사에 너무 열심이라 문제야. 좀 쉬어.”
춘천댁 아주머니가 이은을 다독거렸다. 그녀는 이은을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혼자서 접시를 치우고,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뚝딱뚝딱 여기저기에서 음식이 만들어지고,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때마침 부엌으로 내려온 소원도 춘천댁 아주머니를 도왔다.
이은의 빈자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은은 소원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춘천댁 아주머니에게는 다행일지 몰라도 이은에게는 아니었다.
소원이 춘천댁 아주머니를 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이은은 그녀가 있던 자리에 서서 그녀보다 훨씬 더 일을 잘하고 있는 소원으로 인해 조금 전보다 조금 더 복잡한 마음이 되었다.
“파는 다 다졌고, 양파도 깠어요. 콩나물도 다듬었고요. 또 뭐 할까요?”
“어머, 벌써?”
“집에서 식당을 했어서 이런 건 잘해요.”
만능 일꾼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부지런하기까지 했다.
춘천댁 아주머니는 새로 생긴 도우미가 꽤 흡족해 보였다. 사실 이은이 봐도 그녀보다는 소원이 훨씬 더 일을 잘했다.
하지만 굴러들어온 돌이 너무 잘하는 것도 박혀있던 돌에게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닌 듯하다.
알 수 없는 섭섭함과 허전함 속에서 이은은 멍하니 소원과 춘천댁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소원을 바라보았다.
소원은 첫인상과 달리 제 엄마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점만 제외하면 나쁜 아이가 아닌 듯했다.
더부살이를 하는 군식구가 성격이 좋든 나쁘든 제 본래 성격을 어떻게 내보일 수가 있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은도 사회생활 경력이 몇 년인데 그 정도도 못 알아볼까!
소원은 나쁜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은은 소원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린다.
오늘 세완과 있을 때도 그렇고, 지금 춘천댁 아주머니와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도 그렇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왠지 자꾸만 소원에게 그녀의 자리를 뺏기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어서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은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미쳤지, 내가.”
그러나 이내 이은은 스스로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백희경이며, 세완과 이 회장에게 미안한 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데 그런 배부른 생각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자제를 하려고 해도 이은의 머리는 어리고 어리석은 생각들만 자꾸만 뿜어냈다.
이은은 식탁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았다. 언제나 간결하고 깔끔하던 그녀의 머릿속이 많이 복잡했다.
차라리 섬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가정이 계속해서 그녀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이은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
이은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런 그녀에게 이 회장이 잔소리를 쏟아냈다.
“아니, 여기에서 자면 어쩌누! 방에 가서 가야지. 감기 걸려!”
이 회장은 잠이 오면 방에서 잠을 자야 하고, 잘 때는 배에 이불을 꼭 덮고 자야 배탈이 나지 않는다며 일곱 살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냥 눈을 감고 있었던 것뿐인데 이 회장은 그녀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 회장은 군식구가 아닌 손녀를 걱정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이은의 건강을 염려했다. 이은은 오늘 내내 머리가 복잡했는데 이 회장의 잔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전 괜찮아요.”
“괜찮기는! 몸도 아픈 애가!”
이 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이은의 껌딱지, 세완을 찾았다.
“이놈은 뭐 하고 있어? 너도 안 챙기고!”
이은을 따라다니겠다고 반차 내고 회사에서 도망간 것을 뻔히 아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농땡이를 부리고 있느냐며 이 회장이 날 선 소리를 뱉었다.
또다시 세완을 떠올린 이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대답했다.
“……일이 생겨서요.”
“무슨 일?”
백수 같은 놈도 아니고 그냥 날백수인 것을 내가 다 아는데!
이 회장이 도끼눈을 떴다.
“세완이는 아니라고 하는데 아마 제 일인 것 같아요. 찬주 연락을 받고 나갔거든요.”
이은이 오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 회장이 킁, 하고 콧방귀를 꼈다.
“이제야 밥값을 하는구먼.”
“밥값은 진작 했죠. 안 하려고 해서 그렇지 세완이 일 잘해요.”
손자에게만 유독 날카로운 이 회장에게 이은은 조곤조곤, 그가 제법 밥벌이를 하고 있노라 세완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요즘은 잔소리를 안 해도 해야 할 일들은 칼 같이 다 해 놓는다, 도망을 갈 때는 가더라도 일은 해 놓고 도망가더라, 상무실 윤 비서에게 고자질 전화가 한 통도 안 왔다며 이은이 세완을 두둔했다.
“……그래?”
“아시잖아요. 세완이 머리 좋은 거. 그리고 걔가 하기 싫어해서 그렇지 막상 하면 잘해요.”
이은은 우리 애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다는 팔불출 부모들의 전문 대사를 이 회장에게 늘어놓았다. 이 회장의 귀가 솔깃해졌다.
이제나 일을 할까, 저제나 사람 구실을 할까!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은 것이 32년이었다. 때문에 이 회장은 이은이 무슨 말을 하든 세완을 믿지 않는다.
때문에 이 회장의 귀가 솔깃한 부분은 세완이 밥벌이를 한다는 부분이 아니라, 이은이 세완을 두둔했다는 부분이다.
‘……그래도 아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보이지?’
애정이 없고, 관심이 없으면 타인에게 그 남자에 대해서 두둔하고 좋은 말을 해주지는 않는다.
요 몇 주 동안 이은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세완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감춰야 했던 이 회장의 흑심이 슬금슬금 제 존재감을 표출했다.
이 회장이 슬그머니 이은의 옆에 있는 의자에 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래서 그놈이 밥벌이를 한다는 말이지?”
“그럼요. 얼마나 일을 잘하는데요. 얼핏 들었는데 찬주랑 동업도 하는 것 같아요.”
동업을 하든 말든 거기에서 뭐 몇 푼이나 벌겠는가! 관건은 이은이 세완이 밥벌이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은이 그렇게 생각하기만 한다면 세완이 밥벌이를 하든 말든 겉으로 보기에는 밥벌이를 하는 것처럼 만들어 줄 수가 있다.
이 회장은 어떻게든 불량품을 양품인 것처럼 속여서 팔아넘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우리 그 녀석이 아주 몹쓸 녀석은 아닌 게지?”
“그럼요! 세완이 그런 사람 아니에요.”
사기 결혼은 불법이라는 비서실장의 엄중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이 회장은 가뿐하게 무시했다.
한 놈이 부실하면 다른 한 놈이라도 멀쩡해야지!
이은에게 불량품을 떠맡기는 것이 미안한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래도 그 녀석이 얼굴 하나는 반반하다며 이 회장은 애써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다.
“할아버지, 세완이 좋은 애예요. 섬에 있었을 때도 세완이가 저 지켜 줬는걸요. 세완이 아니었으면 저 못 버텼어요.”
백희경과 부딪쳤을 때도, 납치를 당했을 때도 세완은 내내 이은의 지지대 역할을 해 줬다. 그녀를 보호하고, 지켜 주던 그 모습이 얼마나 든든하고 안심이 되었는가!
이은의 말을 들은 이 회장은 더욱더 양심이 찔렸다.
“……이은아. 내가 미안하다, 너한테.”
“네? 왜요?”
“아니야. 그냥 미안해.”
이 회장은 정말 양심에 많이 찔렸다.
“그래도 저기, 돈은 많단다. 이은아 네 생각에는 내가 손자며느리 앞으로 전 재산을 상속하면 괜찮은 여자가 세완이한테 시집올까?”
이 회장은 그가 아는 가장 괜찮은 규수, 이은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이은은 손자를 수많은 재산에 딸려 있는 부속품처럼 원 플러스 원으로 넘기려는 이 회장의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아니, 얘는 어쩌다가 친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박한 평가를 받게 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은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이 회장은 연신 질문을 던졌다.
“어쨌든 이은아, 너는 좀 모자라도 돈 많고 얼굴 반반하고 말 잘 듣는 남자면 괜찮다는 거지?”
이 회장은 이은에게 그녀가 세완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생각해 보라며 온갖 실험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은은 난처해하면서도 정석적이고 성실하게 대답했다.
“할아버지, 결혼은 그래도 사랑으로 해야죠.”
“……돈이랑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 않으냐! 그래, 회사를 넘기면! 회장직을 넘기면 그러면 결혼해 줄까?”
죽을 때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완에게 맡기면 어차피 허공에서 공중 분해될 재산이다. 일찌감치 손자며느리에게 넘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손자가 며느리의 성을 따라도 좋다고 생각한단다.”
내가 그렇게 꽉 막힌 노인네가 아니라고, 자신은 편견이 없다면서 이 회장은 어떻게든 헐값에 손자를 넘기려고 했다. 그때였다.
“아, 진짜! 싫다는 애한테 왜 자꾸 중매하려고 해요? 또 어느 집 모자란 놈한테 넘기려고요? 얘 넘기면 어디 회사 하나 준대요?”
막 귀가를 하던 세완이 날 선 목소리로 이 회장에게 대거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