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눈동자를 굴리며 내내 시선을 피하던 이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배고프지? 춘천댁 아주머니한테 식사 좀 부탁드려야겠다. 오늘 저녁 메뉴가 뭔지 모르겠네. 날씨도 더운데 오늘은 그냥 시켜 먹자고 할까 봐. 삼계탕이 좋을까, 장어가 좋을까?”
이은은 혹시라도 세완이 그녀를 잡을까 두렵다는 듯 속사포처럼 말을 던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자기가 언제부터 상 차리는 것을 도왔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세완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왜 그녀가 자신과 소원이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가 어떤 방법으로 부동산까지 갔는지를 생각하면 세완 또한 당당한 입장은 아니기에 그는 조용히 이은의 도주를 반겼다.
어느새 사라져서 보이지도 않는 이은의 뒷모습을 추억하며 세완은 다시 소파에 누웠다. 생각이 필요했다.
오늘은 다행히도 아무 일이 없었는데 앞으로가 문제였다.
누구도 언급을 하지는 않지만 세완은 사라진 두 구의 시신과 그들을 죽인 범인이 굉장히 마음에 걸렸다.
큰 부상을 당해 피가 낭자한 상황에서 사라졌다는 백희경의 존재 또한 신경이 쓰였다.
그 의문들을 풀지 않는 한, 이은은 언제 또다시 범죄의 타깃이 될지 몰랐다.
오늘은 다행히 부동산과 집 몇 군데만 돌아다니는 간단한 외출인지라 몰래 미행을 붙이는 형태로 경호를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녀가 일상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불규칙적인 동선이 규칙성을 띠고,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범인이 이은을 공격할 수 있는 경우의 수도 늘어난다.
섬의 살인자가 이은을 노린다고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실낱같은 확률에 매달려 이은을 위험 속에 던져둘 마음은 한 치도 없다.
세완은 일곱 살에 버려진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목숨까지 위협받는 소꿉친구를 생각하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쉬운 게 없다.
* * *
그 후로도 이은과 소원은 방을 구하러 다녔고, 세완은 혼자서 끙끙대며 걱정하다가 매번 그녀의 뒤를 쫓았다.
속아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외출을 할 때마다 그녀가 있는 곳을 귀신같이 찾아내서 방문하다 보니 이제는 이은도 세완이 그녀에게 사람을 붙인 것을 알았다.
“사람을 붙이든지, 네가 쫓아다니든지 하나만 해!”
그녀의 말에 세완은 즐거워하며 자신이 이은의 옆에 있겠다고 했다가 등짝을 맞았다.
“일 안 할 거야? 너 그러다가 진짜 쪽박 차, 이 베짱이야!”
“……내가?”
재벌 3세, 세완이 자신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일은 없다고 장담하는 것 같은 모습에 이은과 소원은 동시에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다못한 이은은 이 회장에게 손자의 농땡이에 대해 고자질을 하였으나…….
“일도 안 하고 이은이 너를 따라다닌다고? ……괜찮다. 괜찮아. 젊었을 때는 쉬기도 해야지. 연차도 쓰고, 휴가도 쓰렴. 세완이 너 이은이한테서 떨어지지 마라. 알았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 회장이 세완의 농땡이를 지지했다.
이은은 당황했고, 세완은 이 회장의 건강을 의심했다.
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하면 갈 때가 된 거라는 옛 성현들의 말씀을 떠올리며 세완은 이은이 아닌 이 회장의 곁에 있어야 하나 잠깐 동안 고민했다.
그러다 그의 생각을 눈치챈 이 회장에게 욕만 먹었다.
“지금 누굴 치매 걸린 노인네로 아는 게야! 네놈보다는 훨씬 멀쩡하다. 이은이 옆에서 떨어지기만 해봐라. 가만히 안 둘 줄 알아!”
이 회장에게 호통을 들은 세완은 차라리 잘됐다며 이은의 옆에 달라붙었다. 이 회장이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완은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결국 이은은 소원으로도 모자라 모지리 한 명까지 데리고 방을 보러 가야 했다.
“도대체 이게 웬 팔자에도 없는 보모 노릇이야.”
이은이 투덜거렸지만 세완은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데리고 다니다 보니 개똥도 약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의외로 쓸모가 있었다.
“좁아! 여기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
“넓어요!”
“여기가 어떻게 넓어?”
“나 혼자 사는 거잖아요. 넓어요! 여긴 야경도 예쁘잖아요. 도대체 이렇게 좋은 집을 왜 욕하는 거예요?”
소원의 솔직한 마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세완의 존재 이유이자 의의이다.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은은 대의를 위해 그녀 개인의 감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아저씨 마음에 안 들어!”
“나는 네가 마음에 드는 줄 알아?”
“이, 씨…….”
불퉁한 소원의 얼굴을 보고 낄낄, 웃은 세완이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하지 마요!”
“흐즈 므유! (하지 마요)!”
“하지 말라고!”
세완과 이은이 함께 있는 모습이 거슬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 짜증 나!
“이세완! 괜히 애 괴롭히지 말고 이리 와 봐!”
이은이 세완을 불렀다. 세완은 주인을 발견한 시골 똥개처럼 소원을 버리고 쏜살같이 이은에게 달려왔다.
“이은아, 왜 불렀어?”
할 말이 있어 부른 것이 아니기에 대답이 궁색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이은을 곤란하게 만든 것은 대답을 구할 생각도 없이 그녀를 보며 그저 해맑게 웃고 있는 세완이었다.
소원과 장난을 치는 세완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녀를 보며 헤실거리는 이세완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를 바라보던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의 소리를 내뱉었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어? 너 마음에 안 들어.”
“엑? 갑자기 왜?”
“그냥. 존재 자체가 별로야.”
이은은 냉정하게 말 한마디를 던져놓고 부동산 중개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저씨, 조금 더 작은 방은 없어요? 월세가 적은 곳으로요.”
욕설과 찰진 등짝 스매싱으로 구박한 적은 많았지만 이런 평화적인 외면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맞는 것이 낫지 노골적으로 네가 싫다고 하다니!
세완이 당황해서 이은을 바라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은은 부동산 중개인과 대화를 나누느라 바빴다.
“아저씨, 시끄럽게 군다고 혼났죠? 그죠?”
소원이 와서 세완을 쿡쿡 찔러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완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이은만 바라보았다.
* * *
같은 시간, 찬주는 종로 장물 시장에 올라왔다는 매물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가 장물을 취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귀한 물건이 들어오면 연락이 오는데 이번에는 그 귀함이 조금 정도를 벗어난 듯했다.
“팬시 블루 다이아몬드라…….”
찬주가 오른손으로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고작 1캐럿이긴 합니다만 귀한 물건입니다.”
장물아비가 다이아몬드의 가치에 대해서 설명했다.
보석 좀 볼 줄 아는 사람치고 팬시 블루 다이아몬드가 귀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팬시 블루 다이아몬드가 지나치게 낯이 익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크기나 연마방법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팬시 블루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반지가 낯익었다.
남성용 반지인 주제에 백금과 다이아를 사용해 온갖 장식을 다 넣은 양아치스러운 화려함은 아무나 갖추는 것이 아니다.
찬주가 반지를 돌려 안쪽을 확인했다.
Forever love.
이름이 박힌 것보다 더 분명한 증거였다.
팬시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발견한 어머니 유품을 다시 남성용으로 세공한 것이고, 세완은 그들에 대한 사랑을 담아 반지에 저 낯간지러운 문구를 박았다.
“손가락이 잘리지 않는 한 이걸 빼놓을 녀석이 아닌데…….”
설사 손가락이 잘렸어도 입만 멀쩡하면 그 반지를 찾아내라고 사람을 시켜 전국을 쥐 잡듯이 뒤졌을 녀석이 이세완이다.
부고가 날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살아있기는 한 모양인데 반지는 이곳에 있고, 심지어 반지를 찾아 달라는 부탁도 해오지 않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라며 혀를 찬 찬주가 장물아비에게 물었다.
“같이 들어온 물건은 없나?”
“……같이 들어온 물건이라뇨?”
“이 반지 주인이 아는 놈인 것 같아서 말이야. 때끼(소매치기)인지 강짜(강도)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만 챙기진 않았을 거 아니야?”
반지를 튕겨 올린 찬주가 허공에 떠 있는 반지를 오른손으로 잡아챘다.
그의 말에 장물아비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이대로 반지를 강탈당하나 싶어 그가 슬쩍 벨을 눌러 문밖에 서 있는 조직원들을 부르려는 찰나였다.
그의 행동을 눈치챈 찬주가 장물아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곤 힘주어 누르면서 말했다.
“그건 누르지 말고. 돈은 제대로 쳐 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관련한 정보는 좀 이야기를 해 줘야겠어, 최 사장님.”
물건을 들고 온 뻐꾸기들을 보호해 주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더 당연한 이 바닥의 불문율이지만 뻐꾸기가 왜 뻐꾸기인가, 언제든지 갖다 버릴 수 있어서 뻐꾸기지!
계절에 따라 서식지를 이동하는 철새인 뻐꾸기처럼, 장물아비가 쳐 주는 금액에 따라 거래처를 바꾸는 의리 없는 뻐꾸기들에게 지킬 의리는 없었다.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빨랐다. 마음을 바꿔 먹은 것 같은 장물아비를 보며 찬주가 느긋하게 전화를 걸었다.
* * *
한편, 세완은 슬금슬금 이은의 눈치를 보다 결국 그녀에게 팔뚝을 얻어맞았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며 눈치를 보는 세완의 모습에 이은이 결국 짜증을 낸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짜증을 내는 이은의 물음에 세완은 아무 말 없이 헤벌쭉 웃음만 지었다. 그리고 신나라 이은의 옆에 다가와서 붙었다.
“이은아, 나는 이 집이 좋은 것 같아!”
소원과 투닥거리던 것을 집어치운 세완은 오직 이은에게 집중했다.
“얼른 계약하고, 밥 먹으러 가자. 근처에 새로 생긴 식당인데 맛집이라네? 딤섬 좋아하지?”
“나는 이 집 싫어. 월세가 50만 원이나 되잖아요!”
“서울에 월세 50만 원 이하 없어. 대충 계약해!”
“아저씨가 월세 내는 거 아니잖아요!”
월세의 적정선에 대하여 토론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은은 전부터 생각했던 이야기를 부동산 중개인에게 건넸다.
“보증금을 좀 더 높여 줄 테니까 월세를 낮추는 쪽으로…….”
“하지 마! 돈 아까워!”
“하지 마요! 신세 지는 것 같아서 싫어요!”
같은 뜻, 다른 이유를 내뱉는 두 사람을 보며 이은이 낮게 앓는 소리를 뱉었다.
세완과 소원이 사이가 좋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둘이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대도 또 그거대로 문제였다. 이은이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 RRR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은과 세완은 자신들의 핸드폰을 확인했고, 주인공은 세완이었다.
그런데 발신자를 확인한 세완의 표정이 묘했다.
“왜?”
“아니, 찬주!”
찬주가 쓸데없이 전화해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는 성격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세완과 이은의 얼굴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일이 생겼거나, 혹은 뭔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낸 게 분명했다.
세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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