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는 여상스럽게 그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끝났어?”
누가 본다면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소원은 이은을 바라보았고, 이은은 명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워낙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여기저기에서 잘 튀어나오는 세완이라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회사나 집도 아니고, 심지어 이은조차 오늘 처음 온 동네, 처음 온 부동산이었다.
이 시간에, 이곳에 있게 될 줄은 나도 몰랐는데 너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에 왔니?
이은이 눈으로 물었고, 세완은 딴청을 부렸다.
“집은 계약했지? 이사는 언제 나가? 너 우리 이은이 힘들게 하면 안 된다.”
이은의 의문을 풀어 줄 수 없는 세완은 만만한 소원만 구박했다.
“집 계약 아직 안 했거든요? 그리고 힘들게 할 생각 없어요.”
힘들게 할 거나 있냐면서, 일을 해도 자기가 하지 새침한 서울내기가 뭘 할 줄 알겠느냐며 소원이 바락거렸다.
그 모습에 세완은 얘가 우리 이은이를 무시한다면서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일꾼인지 알기나 하느냐며 과거에 이은이 했던 아르바이트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세완의 이야기 속에서 이은은 청소의 달인이고, 접객의 달인이고, 서류처리의 달인이고, 일타강사보다 훨씬 뛰어난 과외 선생이었다.
미화가 된 구석이 적잖게 있었지만 세완이 말하는 그녀의 경력에 거짓은 없었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은은 소원에게 훌륭한 일꾼으로 인정받았다.
소원이라는 청자를 앞에 둔 세완은 무척이나 뛰어난 재담꾼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이은이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은도 잊고 있었던 과거를 세완이 다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긴 했지만 세완의 기억력이 좋은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이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묘하게 사이가 좋아 보이는 세완과 소원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개와 고양이 같은 사이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든 접점이 있을 리가 없는 두 사람의 친분이 이은은 괜스레 신경에 거슬렸다.
뭐라고 딱히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세완을 불렀다.
“세완아!”
“응? 왜?”
그런데 기분 탓이었나 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세완은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소원을 버리고 냉큼 이은에게 달려왔다.
“나 왜? 뭐 시킬 거 있어? 아, 또 잠깐 사이에 이 오빠가 보고 싶었어?”
세완은 헛소리를 하며 이은 앞에서 방실방실 결 고운 눈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너무 평소와 똑같아서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아니. 그냥 네가 여기는 어떻게 왔나 궁금해서.”
의도한 것은 아닌데 추궁하는 모양이 되어 버렸다.
세완은 슬쩍 고개를 들어 시선을 피했다. 처음 세완을 봤을 때도 느꼈지만 우연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다지 합법적인 방법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이은은 세완을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추궁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세완이라면 묻지 않아도 제 입으로 주절주절 실토를 하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
졸지에 대화하던 상대가 사라져버린 소원의 황망한 표정이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은은 주인 찾아온 강아지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세완이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와, 저 아저씨 봐. 진짜!”
소원의 뜨악한 목소리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은은 제 이상한 기분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고 경쾌하게 부동산 중개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좀 더 고민해 보고 올게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너무 고민하면 집이 나갈 수도 있어요. 알죠? 특히 아까 옥탑방! 이 가격에 그만한 곳 없어요. 옥상도 쓸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중개인은 문밖까지 따라 나와서 영업을 했다.
천장이 조금 낮은 것을 제외한다면 괜찮은 매물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소원이 고개를 저었다.
“월세가 비싸요.”
“아유, 서울에 월세 이만큼 안 하는 곳이 어디에 있다고. 그만하면 싸지.”
“그래도 비싸요.”
서울과 지방의 집값은 다르다고 이야기를 해도 소원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리 괜찮아도 직접 월세를 내는 사람이 싫다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이은이 부동산 중개인과 실랑이를 하는 소원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또다시 시선이 느껴졌다.
이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과 마트에서 장을 본 것인지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아주머니 그리고 교복 입고 우르르 달려가는 중학생 몇 명이 보였다.
“왜 그래?”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세완이 질문을 던졌다.
이은은 대답 없이 주변만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사람,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은아.”
대답 없는 이은의 모습에 세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은은 그런 세완을 보고는 아차 싶어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녀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섬에서 겪었던 일들이 너무 충격적이라 트라우마 같은 게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 것이 아니라 오늘 집에서 나오면서부터 계속 이런 기분이 든 것을 보면 짐작이 맞으리라.
이은은 합리적 추론을 통해 그녀가 이상한 기분이 드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곧 나아지겠지.
세완의 차에 올라타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조금 신경을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은은 착각이려니, 하며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 * *
세완이 온 덕분에 편하게 오긴 했지만 진상 규명은 반드시 필요했다.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했지 추궁하지 않는다는 말은 안 했다. 이은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완의 뒷목을 잡아채 그와 소파에 마주 앉았다.
“무섭게 왜 이래?”
미심쩍은 얼굴의 세완이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이은은 생글거리며 세완이 물러선 두 배만큼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질문했다.
“상무님, 우리 할 얘기가 있지 않아?”
“너 지금 비서 아니거든?”
“내가 휴가 중이지 사표를 낸 건 아니거든. 상무님, 오늘 업무는 안 하시고 어쩐 일로 부동산까지 행차를 하셨습니까? 회사는 어쩌시고요?”
세완이 부동산까지 오게 된 경위도 궁금했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세완이 일을 얼마나 하지 않았느냐다.
휴가 중일 때조차 업무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김 비서의 모습에 세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아서 잘했겠지.”
“퍽이나?”
농땡이의 역사가 지나치게 깊게 보니 이은은 본의 아니게 인간불신에 걸렸다.
“진짜 했어. 정말이야.”
“확인해 봐도 돼?”
“해 봐! 해 봐! 넌 무슨 애가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 해! 괜찮으니까 해 봐!”
세완은 억울함을 담아 이은에게 당당함을 내보였다.
이렇게 제 속상함을 피력하면 이은이 확인을 안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은은 기어코 비서실 윤 대리에게 전화해 오늘치 세완의 업무량을 확인했다.
“윤 대리님, 고마워요. 그리고 혹시라도 상무님이 사라지거나, 결재가 밀리면 제게 연락 부탁드릴게요.”
철두철미하다 못해 지독하기까지 한 모습에 세완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마치 세완의 보모라도 되는 듯이 행동하는 이은의 모습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짠하기도 했다.
“넌 인간불신이야. 날 좀 믿어라.”
“믿을 사람을 믿지?”
네가 농땡이를 부린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냐면서 이은이 반문했다. 세완은 말문이 막혔다.
일을 하기 싫은 마음이 반, 이은이 그를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하는 것이 좋았던 마음이 반이었다. 복합적인 이유로 일을 안 했던 세완은 과거를 후회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니 지금 당장 이은이 복귀한다고 해도 똑같은 행동을 하겠지만 그래도 어깨를 다친 이은이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사고에 세완이 끙, 하고 신음을 냈다. 그리고 멀뚱멀뚱 말간 눈의 이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상 속에서 이은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때린 세완이 벌러덩 소파에 몸을 눕혔다. 천장을 보고 누운 세완이 눈부신 조명을 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난 32년 동안 이 자리는 세완의 지정석이었고, 침대보다 더 편안한 자리였는데 왜 오늘따라 유난히 불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세완이 몸을 모로 세우고 팔베개를 한 뒤 이은을 바라보았다.
내가 일을 안 하는 게 싫은 거냐, 내가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이냐!
세완은 이은에게 이세완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의미 없는 질문이고, 분명히 좋은 말이 안 나올 것이 분명한데도 세완은 이상하게 그 대답이 궁금했다.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몰라 그가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으로 비서실 윤 대리가 보낸 파일을 확인하던 이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근데…… 친한가 봐?”
“뭐가? 누구? 윤 비서?”
오늘도 자신에게 이은은 도대체 언제 복귀하느냐고 묻던 윤 대리를 떠올리며 세완은 자신과 그녀에게 친분이라고 할 것이 있느냐에 대해 고심했다.
3년 전, 입덧을 핑계로 부서이동을 요청했던 김 대리처럼 대놓고 도주를 시도한 것은 아니지만 윤 대리도 도주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은 안 물어봐도 알겠다.
이은의 이야기만 나오면 뜨거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윤 대리를 떠올리며 세완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아니. 윤 대리님 말고, 쟤.”
이은은 소원의 방 쪽을 고갯짓하면서 말했다.
“누구?”
“있잖아. 백희경 딸.”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먼 존재이기에 이은은 에둘러 그녀의 존재를 표현했다. 그 말을 들은 세완은 더욱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백희경 딸이랑 나랑 친할 이유가 뭔데?
“차라리 윤 비서랑 친하냐고 물어보지?”
그쪽은 그래도 굿모닝 인사는 한다. 세완이 안 받아 줘서 그렇지.
윤 비서가 인사를 하든 말든 쌩하니 사무실로 들어가서 미친 듯이 일을 하던 제 모습을 떠올리며 세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에 이은이 변명처럼 말을 추가했다.
“……아니, 아까 보니까 두 사람 친해 보이길래.”
“누구? 나랑? 쟤가?”
이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은이 그렇게 생각할 만한 구석이 과연 있었느냐에 대하여 세완이 반추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곱씹어 보아도 김이은의 탁월함에 대한 영업을 한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세완이 답했다.
“안 친해.”
딱 잘라 말하는 그의 대답에는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오며 가며 얼굴은 몇 번 봤지. 한집에 있는데 그것도 안 봤을까 봐. 근데 쟤랑 나랑 친분을 쌓을 일이 뭐가 있다고?”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게 더 궁금하다는 세완의 말에 이은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 세완과 소원이 친해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이상한 질문을 던졌던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열두 살 어린아이도 아니고 서른두 살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바보 같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은은 소원과 세완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엄마를 빼앗아 간 소원이 세완도 빼앗아 가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임은 안다. 백희경이 친엄마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는지도 몰랐던 이은의 마음속 일곱 살짜리 어린 김이은은 조금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의 마음을 지배했던 막연한 불안감과 상실감, 두려움을 떠올리며 이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남매처럼 다름없이 자랐기에 세완에게는 뭐든지 다 말할 수 있지만 이런 감정까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많이 부끄러웠다. 이은은 장고 끝에 결국 도피와 도주를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