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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45)화 (45/100)

45화

현실적인 이유로 이 회장의 배려를 거절한 이은은 그런 사정을 소원에게 솔직히 이야기했고, 소원도 받아들였다. 때문에 자매 아닌 자매는 방을 구하기 위해 아침부터 뚜벅이로 집을 나섰다.

값비싼 전원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고급주택가의 특성상 버스가 오는 곳까지는 제법 걸어야 했다. 덕분에 이은은 본의 아니게 소원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평소라면 운동한다는 마음으로 걷겠지만 어깨를 포함한 몸이 전체적으로 정상이 아니다 보니 조금 걷는 것도 힘들어서 이은은 땀을 비 오듯이 흘려야만 했다.

“……괜찮아요? 가방, 대신 들어드려요?”

보다 못한 소원이 말을 건넬 정도로 이은의 상태는 심각했다.

멀리 온 것도 아니고 뒤돌면 이 회장의 집이 보일 정도로 많지 않은 걸음을 걸었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지 이상하게 걷기 힘들었다.

“아니, 그건 괜찮은데 우리 그냥 택시 타고 갈까?”

이은이 아스팔트 길에 쪼그려 앉아 소원에게 제안했다. 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어플을 통해 택시가 잡혔다. 15분 거리에 있다고 했다. 이은은 멍하니 무릎을 끌어안은 채 택시를 기다렸고, 소원은 멍하니 어느 집 담벼락에 기대 택시를 기다렸다.

15분은 생각보다 길었다. 땅을 보고, 하늘을 보고, 주변에 있는 집 구경을 하던 이은의 눈이 소원을 향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으니까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고 떼를 쓰던 열아홉 살짜리 소녀는 그 말처럼 참 어려 보였다.

화장을 하거나 꾸미지 않아서 그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요즘 학생들은 화장도 하고, 머리에 이런저런 장식도 하던데 소원은 맨얼굴에 단발머리로 수수하기 짝이 없었다.

집이 아니라서 그런가 싶기는 한데 옷차림을 보니 원래 꾸미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청바지와 목이 늘어진 반팔 티.

그러고 보니 처음 봤을 때도 소원은 저런 모습이었다.

재수생이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벌써 12년 전인 이은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재수생이건 말건 꾸미는 애들은 다 꾸몄다.

적어도 ‘늘푸름 수산낚시회’라고 적힌, 누가 봐도 공짜로 받았을 것 같은 옷은 안 입었다.

이은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네 엄만 어떤 사람이었어?”

이은은 제 질문에 제가 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엄마요? 음…….”

하지만 대답을 하려는 듯 고민에 빠진 소원에 조금은 궁금증이 섞인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소원이 대답했다.

“엄마는 그냥 엄마였어요. 평범한 엄마들 있잖아요. 자식한테 뭐든 다 해 주는. 나는 굶어도 내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만 보면 배부르고……. 엄마도 그렇죠, 뭐.”

이은은 소원에게 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귀하다는 여자가 그럼 나는 왜 버렸는데? 그리고 그런 사람이면 왜 제 딸인 너를 그런 모습으로 버려둔 건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으면 정말 화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은은 뱉지 못할 질문을 속으로 삼켰다. 하지만 아무리 삼켜도 그 안에서 울화는 피어 나왔다.

미련을 버려야지,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은은 아직도 백희경이 왜 그녀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것이 정말 궁금했다.

돈 때문인 것은 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이 돈이 없다고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백희경과 그녀가 남남이라면 백희경의 그런 선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고 노력은 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백희경이 이은을 향해 그녀는 백희경에게 그런 식으로해서는 안 된다고 발작하듯 소리치며 주저앉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도대체 그녀는 왜 그랬던 것일까? 그리고 백희경과 이은 자신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 것일까!

며칠 전 이 회장이 건넨 백희경의 자료를 통해 그녀가 자신과 영 무관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엄마거나, 이모거나 둘 중 하나겠지.

어느 쪽이든 그녀는 피붙이를 죽이려고 한 거니까 사람이 아니리라.

사람을 죽이려고 했을 때부터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이긴 하지만 심지어 그 존재가 피붙이이기까지 하니 백희경은 정말 사람이 아니다.

설사 백희경이 이은의 생물학적 모친이라고 해도 이은이 그녀를 거부할 거다.

하지만 그런 결심과는 별개로 이은은 백희경이 진짜 자신의 엄마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러던 이은의 눈에 새삼스레 소원이 들어왔다.

소원은 이은 자신과 제법 닮았다.

‘……유전자 검사라도 할까?’

이은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유전자 검사를 꼭 백희경이랑만 하라는 법이 있나? 백희경의 딸과 해도 생판 남인지 아닌지 결과는 대충 나올 거다.

소원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이은이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소원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내내 그 집에서 산 거예요?”

“어? 어! 왜?”

“그냥요. 엄마가 언니, 아니 그쪽은 부잣집에 입양 가서 잘 살았다고 했거든요.”

이은은 그 말이 부잣집에 입양 갔으니 제 엄마를 더 이상 원망은 하지 말라는 듯한 이야기로 들렸다. 그녀가 발끈해 입을 막 벌렸을 때였다.

“별로 잘 산 것 같지는 않지만.”

한참 동안 침묵하던 소원이 툭, 하고 말을 한 마디 더 뱉었다. 이은이 멈칫했다. 소원이 말을 이었다.

“나쁜 뜻은 아니에요. 그냥 아무리 좋은 집도 내 집이 아니면 별로구나, 그냥 그걸 느꼈어요.”

집안사람들이 소원과 거리를 둔 것은 처음의 일이었다.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래도 한집에 사는데 국을 더 줄까, 밥 더 먹을래, 그런 말 정도는 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원은 온 집안을 왕따 시키면서 혼자 꿋꿋하게 마이웨이로 있기에 괜찮은 줄로만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소원은 사실 많이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은은 괜스레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 집 사람들 다 좋은 사람들이야.”

나 때문에, 내가 속상할까 봐 너를 멀리하는 것뿐이야.

이은은 가족들 대신 소원에게 그들에 대한 변명을 했다.

그 말에 소원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뜻이 아니에요. 그냥 내 집이 아니니까. 공주님 방 같은 곳에 있어도 나 혼자 누더니 거지 왕자 같고. 대충 그렇다고요.”

자신과 방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고 소원이 말했다.

말을 매끄럽게 이해하기 쉽게 다듬어서 정리한 것은 아니었다. 소원은 생각나는 말과 표현을 주절주절 꺼내서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었다.

만약 회사의 신입사원이 그랬으면 말을 조리 있게 못 하느냐며 경을 쳤을 거다. 하지만 이 순간 이은은 소원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 미안했다.

아주 오래전, 이은이 했던 생각을 지금 소원이 하는 것 같았다.

일곱 살 재투성이 아가씨에게 이 회장의 저택은 너무 크고, 화려하고, 으리으리했다. 그래서 금방이라도 누군가 찾아와 그녀를 쫓아낼까 봐 이은은 참 많이 두려웠었다.

그때 세완이 그녀의 옆에 있어 주지 않았다면 이은은 아마 많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나고 나면 다 아름다운 것이 추억이라고 하는데 어째서 이은 자신의 과거는 지나간 삶인데도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린지 모르겠다.

괜스레 콧날이 시큰거렸다. 이은이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푸르고 맑아서 속이 상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는데 갑자기 어디에서 이상한 시선 같은 것이 느껴졌다.

“……?”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을 천연기념물보다 더 보기 어려운 게 이 동네인 것을. 그럼에도 자꾸만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이은이 이상한지 소원이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착각이겠거니 하고 이은이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두렵고, 초조하고, 누군가 노려보는 것 같고……. 이은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본가로 돌아가야 하나를 고민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택시가 보였다. 벌써 15분이 다 된 모양이다.

택시를 발견한 것은 소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택시 왔어요.”

“……어, 그래. 타자.”

차마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이은이 택시를 타자고 말했다. 그리고 인사치레로 한 마디를 더 건넸다.

“네 방 좋은 곳으로 구했으면 좋겠다.”

방을 구하러 함께 갈 것이고, 함께 돌아다니면서 함께 골라서 결정할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은은 덕담을 건넸고, 소원은 그 덕담을 받고 그녀가 이 집에 온 지 거의 열흘 만에 처음으로 웃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잠깐 깃들었다가 사라지긴 했지만 아마 소원도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기를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이은은 그 모습을 보며 오피스텔을 매매했을 때의 자신의 기분을 떠올렸다.

절대 쫓겨날 걱정 안 해도 되는 온전한 그녀만의 공간이 생겨서 이은은 몇 날 며칠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좋아했었다.

이 회장이나 세완이 그녀를 쫓아낼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만 온전하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아마 소원도 그때의 그녀와 같은 기분이라 저렇게 웃는 것 같다.

이은은 잠깐 동안 들었던 이상한 기분을 무심코 흘려버렸다. 그리고 소원의 긍정적인 반응만 받아들였다. 그리고 차에 올라탔다.

좋은 월세방을 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결과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그녀의 예감은 정확도가 제로에 가까웠다.

좋은 월세방을 구할 것 같은 예감이 무슨! 그냥 오랜만에 운전기사 없이 집을 나서게 되어 설렜던 것뿐인가 보다.

분명히 어플을 통해 방의 모습이며 크기, 사진을 모두 확인하고 방문을 했음에도 직접 가 본 곳은 어플 속의 방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기 일쑤였다.

어떤 경우는 아예 어플 속의 방은 없고…….

“죄송해요. 어쩌죠? 몇 시간 전에 예약을 했다고 하네요. 대신 다른 방을 보여드릴게요. 여기도 좋아요.”

라면서 전혀 터무니없는 방을 보여주는 사례도 많았다.

한두 번이어야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후회하지!

부동산 중개인마다 내뱉는 레퍼토리며 인사말이 동일하다 보니 속고 싶어도 속을 수가 없었다. 허위 매물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동산 중개인이 추천하는 매물만 확인해 보기도 했는데 이 경우는 너무 비싸서 조건이 맞지 않았다.

덕분에 몇 군데 돌지도 않았는데 이은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이쯤에서 정리하고 집은 다음에 또 보러 오자고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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