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본가에서 이뤄지는 하루 세 번의 식사 시간과 화장실 위치,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은이 황급히 등을 돌렸다.
나서는 길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책상 위에 오만 원짜리 서너 장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말도 하지 않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세완은 소원과 이은을 번갈아 바라보다 망설임 없이 이은의 뒤를 쫓았다. 소원은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다.
“물러 터졌네.”
소원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할 말이 아닌 것은 아는데 정말 딱 그 말 밖에 안 나왔다.
엄마랑 싸우고 엄마가 우는 것만 보고, 그리고 그녀가 엄마에게 마구 대드는 것만 보고 이은이 못돼 먹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갈 곳이 없어서, 안록도 집에 남아있을 수가 없어서 소원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은에게 매달렸다.
내 동생 살려 내라고, 망나니 같은 네 아비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다면서 펜션 아주머니에게 머리카락을 다 쥐어뜯기고 나니 생전 처음 보는 이은에게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녀를 받아 준 이은이 정말 의외였고, 처음에 있던 지하 방도 좋아서 감지덕지했다.
창고로 쓰던 곳이라는 것은 대충 짐작했다. 이불도 없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데 그것도 모르면 바보지.
그래도 그녀의 망나니 같은 아버지가 이은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 정도는 대충 눈치채서 그 정도로 감사했는데, 소원의 언니는 그녀의 생각보다 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 지하 방이 마음에 걸려 멀쩡하고 고급스러운 방으로 바꿔 주는 것을 보니.
제 딴에는 냉정한 척 말을 쏟아 냈지만 방을 잡아 주고, 안록도에 있는 그녀의 집이 정리될 때까지 월세도 내 준다는 것을 보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소원은 꽉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괜히 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남의 사정 봐 줄 땐가? 내 코가 석 잔데!
이은은 소원의 부모님이 남긴 유산이 어느 정도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소원의 부모님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쥐꼬리만큼 있던 돈의 태반은 아버지가 도박으로 날렸고, 나머지는 소원 자신의 치료비로 날렸다.
안록도에 있는 집도 정말 한 푼의 값어치도 없다고 했다. 엄마 이야기로는 백만 원에도 안 팔린다고 했었다. 이제는 그나마도 그곳에 못 가게 되었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니 소원의 외출했던 정신이 다시 귀가를 했다. 이 3일 동안 일어난 일이 소원은 마치 거짓말 같고 지독한 악몽 같았다.
소원이 꾸물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못 믿겠고, 엄마가 사라진 것도 못 믿겠다.
심지어 그녀의 엄마는 크게 다쳤다.
낚시꾼 아저씨를 데리고 왔을 때에는 사라져 있었지만 엄마는 분명히 장독대에서 떨어져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소원은 이 모든 것이 질 나쁜 꿈 같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사라지고, 다친 엄마도 사라지고…….
이은과 세완이 오기 전에는 누추하긴 하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평화롭던 그녀의 집이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소원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볼에서 축축하면서도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소원은 손등으로 대충 볼을 닦아냈다. 꼬질꼬질한 먼지 섞인 흙탕물이 손등에 맺혀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소원의 현재 모습과 같아서 소원은 더 슬펐다.
“엄마 말 기억해. 언니랑 친하게 지내야 해. 싫다고 해도 막 달라붙어! 넌 그래도 돼! 만약 엄마랑 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언니랑 같이 지내야 해!”
갈 곳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은이 섬에 오기 몇 달 전부터 엄마는 그녀에게 언니와 함께 있으라고 몇 번을 얘기했었다. 소원은 그 말이 생각나서 이은에게 달라붙은 거였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소원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달라붙는 것이 쉬울 리가 만무했고, 무엇보다 소원은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는 소원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며 선물이라고 했다. 소원이만 있으면 엄마는 뭐든 다 괜찮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거 안 바란다. 이런 공주님 방 같은 것도 없이 지하 방, 옥탑방이어도 괜찮으니까 엄마와 함께 있고 싶었다.
깨끗하고 정갈한 방, 그 침대 위에 먼지투성이 양탄자와 함께 누운 소녀는 몸을 웅크린 채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다.
같은 시간, 이은은 이 회장에게 소원의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아이를 하나 데려오게 되었는데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말이 이은의 입에서 나왔다.
자신의 오피스텔에 데려다 놓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본가로 이사를 오느라 집 안이 엉망인지라 누군가를 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며 이은은 월세방을 하나 구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소원을 내보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은이 손자며느리만 되어 준다면 쩨쩨하게 방 하나만 내 주는 게 아니라 집문서까지 통째로 내 줄 준비가 된 이 회장이지만 그 상대가 상당히 미묘했다.
백희경의 딸이라…….
이 회장은 이은과 그녀의 혈연관계를 계산했다.
이 회장이 알고 있는 대로 백희경이 이은의 이모라면 둘은 사촌 관계일 것이요, 백희경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녀가 이은의 친모라면 둘은 이부자매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피가 섞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은은 죽을 뻔한 고비까지 넘겼음에도 평소와 달리 소원에게 꽤 물렁한 대처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당당하지만 태생적 결함 때문인지 ‘가족’이나 ‘핏줄’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약해지는 이은을 보는 이 회장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담겼다.
“이은아, 너 알다시피 사람 하나 들이는 거야 뭐가 문제가 되겠느냐. 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먹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사람은 단호할 때는 단호해야 한다. 알지?”
아직 그 딸이라는 아이를 못 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회장은 머리 검은 짐승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남의 집 열아홉 살짜리보다 그의 손으로 기른 서른두 살짜리가 더 어리고 안타까운 보통 사람이었다.
그냥 돈만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이려 했다니 정말 기함할 노릇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 회장은 돈 정도는 뜯겨도 된다 생각하며 이은과 세완이 그곳에서 연인이 되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과거의 자신을 한 대 때려 주고 싶기까지 했다.
미안한 마음 절반과, 안타까운 마음 절반을 담아 이 회장이 이은의 손등을 다독거렸다.
“네 맘은 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가 보지. 그래. 하지만 나는 옹졸한 사람이라 남의 집 아이보다 내 손녀가 더 귀해. 허니 적당한 선에서 잘라내거라.”
“…….”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돈은 잃어도 된다.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니. 하지만 마음에 상처가 나면 안 된다. 알지?”
이 회장은 이은에게 아직 안록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니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이은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소 이기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이 회장이 이은을 아낀다는 뜻인지라 이은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 내 새끼지.”
이 회장이 안쓰럽다는 듯 이은의 손등을 재차 다독거렸다.
“감사해요.”
“뭘, 당연한 것을. 나야말로 감사하다. 네가 이렇게 잘 자라 줘서.”
이 회장은 이은을 손자며느리로 삼겠다는 그의 간절한 흑심마저 버리고 순수하게 그녀를 위로했다. 이은은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 주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었던 이 회장에게 마음 깊이 감사했다.
* * *
훌쩍이다가 잠이 들어버린 소원은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쭈뼛거리며 1층 식당으로 내려왔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말라는 이은의 조언을 받아들인 듯했다.
얼굴이 익게 되면 마음이 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지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회장과 세완은 물론이고 춘천댁, 박 기사 등 사용인들까지 모두 낯선 소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내려와서 외톨이처럼 식사를 하고 올라가는 소원의 모습에 마음 약한 춘천댁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굳이 이은의 말이 아니더라도 소원은 이 회장의 집 사람들과 별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소원의 의사를 존중했다.
소원은 있는 듯 없는 듯 배경 같은 존재감으로 자리했다. 이은은 그런 소원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그런 마음을 떨쳐 냈다.
납치당해 살해될 뻔했고, 그때 다친 어깨가 아직까지 아팠다. 한쪽은 인대 파열, 다른 한쪽은 파열은 아니지만 미세하게 인대가 늘어나서 일상생활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처지에 누구를 동정하나!
이은은 고개를 저었다. 동정은 금물이다.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월세방을 알아볼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신생아라도 된 것처럼 난리를 피우는 이 회장과 세완 때문에 처음 며칠은 치료에만 집중하느라 방을 알아보는 것이 늦어졌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소원을 집에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서울에 올라온 지 열흘이 되는 날, 이은은 결국 소원과의 외출을 결정했다.
“가긴 어딜 가! 팔도 다쳐서는!”
세완이 펄펄 뛰었고, 이 회장도 만류했다.
“며칠 더 내버려 둔다고 내 재산 거덜 안 난다. 아픈 녀석이 가긴 어딜 가려고!”
하지만 사정이야 어쨌든 제 한 몸으로도 모자라 더부살이 입 하나를 더 데리고 온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 군식구를 내보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했다.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병원도 다녀오는걸요.”
이 회장은 영 불안한지 박 기사를 데려가라고까지 이야기했지만 휴가 중에 회장님 전용 운전기사를 데리고, 회장님 전용 차량을 타고 돌아다닐 정도로 이은은 뻔뻔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기업 회장님 차를 끌고 갈 정도로 으리으리한 곳에 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은은 보증금 천만 원 내외의 평범한 원룸, 혹은 자취방을 얻어 줄 생각이었다.
엄마에게 주기 위해 들고 갔던 이천만 원 수표가 든 가방도 경황이 없는 중에 사라졌기 때문에 소원에게 보증금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아무리 자매일지도 모른다지만 기천만 원을 사흘 전에 처음 본 사람한테 무료로 선사할 정도로 이은은 넉넉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천만 원도 많이 아까웠다. 하지만 그보다 보증금이 더 낮은 곳은 월세가 비싸거나, 치안, 교통 등 뭔가 하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여자아이인데 그런 곳에 살게 둘 수는 없어 이은이 최대치로 배려를 한 기준이 천만 원이었다.
보통 그 정도 금액대의 월세방이 있는 동네는 재벌 회장님의 차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