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이은은 기겁해서 세완을 타박했지만, 세완은 도대체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며 반문했다.
“괜찮아.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 애초에 호강시켜 주려고 데리고 온 것도 아니고 인질이었는데, 뭐.”
“……인질?”
“응. 백희경이 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우리도 인질 하나 정도는 확보해 놔야지.”
세완이 해맑게 말했다. 이은은 뒷목이 당겨왔다.
어쩐지 지나치게 흔쾌하게 데려가자고 하더라!
“박찬주! 진짜!”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제3금융권 집안 출신의 성격 나쁜 동창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근묵자흑이라고 했다. 어릴 때는 착했던 세완이 이렇게 성격이 나쁜 어른이 된 것은 다 박찬주 때문이다.
찬주가 알았다면 세완은 원래 성격이 나쁘다며 펄쩍 뛸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이은은 세완의 등짝을 때렸다.
어깨를 다쳐 움직이기 쉽지 않았지만 최대한 세완이 아파하도록 그를 때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걱정하는 세완에게 얼른 출발하라고 했다.
백희경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죄가 없는 갓 성인이 될 아이를 구박할 정도로 성격이 나쁘지는 않다.
본인 말대로 소원이 열아홉 살이라면 이건 미성년자 학대였다.
소원이 있을 창고 방을 떠올리며 이은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지만 세완은 시큰둥한 태도를 유지했다.
“괜찮대도 그러네. 막말로 창고가 아니라 축사라도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 집보다는 낫지……. 아야! 야, 그만 좀 때려. 너 병원 갔다 온 지 24시간도 안 됐어.”
“그럼 때리게 하지를 말던가! 얼른 집으로 가!”
그리고 차가 출발했다.
죽어도 신데렐라 새언니는 못 될 것 같은 동창의 물렁함을 타박하며 세완은 본가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도착했다.
* * *
쿵쾅거리며 달려온 누군가가 방문 앞에서 달그락거렸다.
서울은 층간 소음이 심하다고 하더니 이만한 부잣집도 층간 소음은 피할 수 없는 거구나, 라고 생각하며 소원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똑똑! 들어갈게요.”
이미 문을 열고 들어왔으면서 방문을 두드려 노크하고, 입으로 양해를 구하는 행태에 소원이 입을 삐죽대며 눈을 떴다.
눈앞에 서 있는 존재는 이은과 세완이었다.
결혼이나 약혼을 한 사이가 아닌데도 마치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을 보며 소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얹혀사는 입장에 할 말은 아니지만 저 사람들이 나타나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
남의 집이긴 하지만 세완이 자신을 던져놓은 이 방만큼은 자신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기에 소원이 당당하게 물었다.
“왜요?”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뾰족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이은이 당황한 표정으로 손짓, 발짓을 섞어 사과를 건넸다.
“미안한데,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 네 방이 여기가 아니거든?”
“왜요? 나보고 나가라고? 나 못 나가요!”
섬이었다면 모를까 서울까지 데려와서 그녀더러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소원은 어디로 가야 하나!
당장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소원은 몸을 반으로 접으며 발딱 일어나 그녀의 짐가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하면 무게 때문에라도 쉽게 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하던 비 맞은 물미역 같던 모습과 달리, 그들이 백희경의 집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지금의 소원은 꽤나 암팡진 모습이었다.
그런 소원을 보며 이은의 얼굴은 난색이 짙어졌다.
갈 곳이 없어 불안하고, 혹시라도 쫓겨나지 않을까 싶어 두려운 마음은 그녀가 잘 안다. 지금 소원이 겪고 있을 감정은 아주 오래전 이은이 겪었던 것들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소원을 안정시켜 줘야 하지만 방을 옮기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가 문제였다.
방을 옮기면 어떤 이유로 옮기라고 하는 건지, 왜 처음부터 제대로 된 방을 배정하지 않고 창고에 두었는지를 설명하기가 정말 애매했다.
세완의 심술이었다고 말하면 좀 더 쉬워질 수도 있겠지만 이은은 소원이 세완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이은은 사실 소원이 참 어려웠다.
자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그렇지만, 만약 자매가 아니면 다행이지만 또 만약 자매라면 이은은 죽어도 상관없는 딸이고, 소원은 백희경이 끼고 키운 귀한 딸이라는 그 차이가 소원을 가까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이은이 소원을 보며 입술을 잘근거릴 때였다. 문틀에 몸을 기대고 있던 세완이 귀찮은 어조로 말을 뱉었다.
“야, 방 옮겨!”
목적에만 지나치게 충실한 그 말에 이은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세완이 이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말했다.
“내가 잘못한 건 아는데, 사실 뭐 아직까지도 잘못한 거 같진 않은데 그래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리고는 재차 소원에게 말했다.
“야, 뭐해? 방 빼라니까.”
그 모습이 흡사 죄수 번호를 읊으며 죄수를 독방으로 옮기는 교도관의 모습과 닮아있어 소원은 짐가방을 좀 더 꽉 붙잡으면서 말했다.
“왜요? 나 이 방에 있으라면서요. 나 안 옮겨요. 여기가 좋아요.”
살쾡이처럼 경계하는 모습에 이은은 지친 목소리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방이 아니라……. 하아! 그냥 좀 더 좋은 곳으로 옮겨주려는 거야.”
“아, 싫다니까요?”
“그냥 옮기라고 할 때 좀 옮기면 안 되니?”
소원에 대한 본능적 거리감을 꾹꾹 참으면서 말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부정부터 하면서 가시를 세우는 모습에 이은은 결국 짜증 섞인 어조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을 소원이 맞받아쳤다.
“내가 이 방이 좋다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데요? 상식적으로 그렇잖아요. 언니가, 아니 그쪽이 나한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나를 좋은 방으로 왜 옮겨 줘요. 그냥 이 방에 있게 내버려 둬요.”
일리는 있는 말이긴 한데 이 상황에는 적용이 안 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은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오가는 공방을 듣고 있던 세완이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방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리고 둘둘 말아 벽에 기대 놓은 안 쓰는 양탄자를 펼치더니 소원의 뒷목을 잡고 달랑 들어 그 위에 놓고 다시 둘둘 말았다. 소녀를 짐 푸대처럼 거꾸로 들어 올린 세완이 말했다.
“뭐 귀찮게 말로 하고 그래. 올라가자.”
“악! 놔! 콜록! 이거 안 풀어? 콜록!”
소녀가 발악했지만 양탄자에 말린 소녀는 팔다리의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고, 먼지투성이 양탄자 덕분에 기침을 하느라고 목소리까지 자유롭지 않았다.
이은은 그들의 어린 시절에 이 회장이 세완을 표현하던 ‘머리는 나쁘지만 잔머리가 끝내주게 잘 돌아가는 힘이 좋고 건강한 아이’의 실체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들 고소할 거야! 콜록! 이거 풀어! 콜록! 빨리!”
도대체 뭘 고소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소 운운하는 소원의 현재 발언을 예측하기라도 한 것인지 세완은 원치 않는 접촉인 성추행을 포함한 그 어떤 논란에 있어서도 완전무결한 모습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이은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비켜 주었다.
안 좋은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방만 옮겨 준다는 것인데, 뭐!
문제의 소지가 없지는 않지만 그녀는 일단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소원의 목소리는 애써 무시했다.
소원이 갈 방은 손님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3층 구석방이다.
* * *
‘머리는 나쁘지만 잔머리가 끝내주게 잘 돌아가는 힘이 좋고 건강한 아이’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소원을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어차피 내 침대도 아닌데 뭐 어떠냐며 먼지투성이 양탄자를 손님방 침대에 던지는 세완을 보며 이은이 낮게 혀를 찼다.
‘정말 성격하고는……. 이건 전부 박찬주 탓이다.’
이 회장이 손자인 세완을 바른길로 이끌기 위하여 공을 얼마나 들였는지는 누구보다 이은이 더 잘 안다.
그러니까 이건 양육자의 책임이 아니라 근묵자흑으로 세완을 까맣게 물들인 제3금융권 박찬주의 탓이라 생각하며 이은은 친구의 파탄 난 인성을 애써 부정했다.
그때 즈음 침대에 던져진 소원이 양탄자에서 탈출했다. 소원은 도대체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면서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이게 무슨…… 어?”
하지만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방 안의 모습을 본 소원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창문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던 낡은 지하 방이 아니었다. 햇빛이 찬란하게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깔끔하고 정갈한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가 소원을 놀라게 했다.
솔직한 이야기로 예전 집에 있는 그녀의 방은 물론이고 웬만한 호텔 방보다 훨씬 더 좋아 보였다.
멍청한 소리인 것은 알고 있지만 낡은 다락방 하녀 방이 갑자기 공주님 방으로 바뀌어서 놀랐다는 동화책 「소공녀」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와…….”
소원은 소리 지르는 것도 잊고 멍하니 방을 보았다.
그 모습에 이은은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가 이 회장의 집에 처음 왔을 때 아마 소원 같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이은이 알고 있는 세상은 반지하 월세방과 보육원의 6-7세 보육실뿐이라 이렇게 좋은 집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었다.
어느 부모가 제 자식을 공주처럼 키우고 싶지 않아 하겠냐마는 딸 하나 갖다 버렸으면 다른 딸 하나라도 잘 키우지, 왜 그 딸마저 이은과 세완 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게 만드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원을 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은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 이 집에 둘 생각도 없다.
인질이니, 백희경을 불어들일 미끼니 하면서 세완은 못된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이은은 그저 저들 모녀와 다시는 얽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은은 어떻게든 빠른 시일 안에 돈을 구해 작은 월세방 하나를 얻어서 소원을 내보낼 생각이다.
그녀의 집도 아니고 이 회장의 집에 소원까지 얹혀살게 하는 것은 제아무리 염치가 없는 그녀라도 할 수가 없었다.
작게 심호흡을 한 이은이 머릿속에 정리한 말들을 빠르게 뱉어냈다.
“이 집에 며칠 있지는 않을 거야. 방은 내가 알아봐 줄게. 섬에, 그러니까 안록도에 있는 너희 집하고 재산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월세도 내가 내 줄게.”
소원이 방 구경을 멈추고 이은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은은 그 눈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눈을 깔고, 하고 싶은 말만 내뱉었다.
“두 번? 세 번? 아마 그 정도 낼 거 같은데 그 돈 달라고는 안 할 거야. 그냥,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나가 줘. 그리고 우리 앞으로 모르는 사이가 되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게 다야.”
네 부모 때문에 죽을 뻔한 나로서는 이게 네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은은 빠른 시일 안에 이 집에서 나가 줄 것만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