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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42)화 (42/100)

42화

사흘 만에 이은이 세완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되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럴 리도 없었다.

그녀가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에는 이 회장과 세완의 도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탁월한 주제 파악 능력이 가장 큰 몫을 했다.

이 회장이 데려다 키운 고아 계집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이은은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유를 모르는 이은과 달리 세완은 이유를 너무 잘 알 것 같다며 이 회장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아, 노인네 진짜! 속이 시커매가지고 한시도 방심을 못 하겠네.”

“아닐 수도 있잖아.”

이은이 슬쩍 이 회장의 편을 들었다.

“그럼 네가 다쳐서 저렇게 대하는 거라고? 납치를 당해서 죽을 뻔했다고?”

“…….”

이건 대답을 못 하겠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 회장은 좀…….

물론 그런 의도가 조금은 섞였을 것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그녀를 잃을 뻔해서 그랬다면 필터 없는 막말로도 유명한 이 회장의 성격상 백희경과 그들 가족에 대한 쌍욕 정도는 나왔을 거다.

하지만 오늘 이 회장은 마치 이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러셨을까?”

“왜 그러긴 뭘 왜 그래. 노인네 성격 보면 뻔하지.”

“하지만 회장님은 네 이야기밖에 안 하셨는걸.”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한다면 누군가의 집 망나니 같은 아들내미에 대한 칭찬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내 이야기?”

“응. 너랑 섬에서 어떻게 있었냐고. 네가 도와줬느냐, 구해줬느냐, 도움이 되었느냐 뭐 그런 것들?”

이 회장은 순수하게 그들에게 있었던 일들만 궁금해했었다.

“다른 놈 얘기는 안 하고?”

“응!”

이 회장은 재계에서 알아주는 노회한 여우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짐작하는 느슨하고 신사적이며 기다릴 줄 아는 여우는 아니었다. 호떡 집에 불난 것처럼 성격 급한 여우였다.

“할아버지 성격상 망나니 같은 놈 얘기가 나왔어도 열두 번은 더 나왔을 텐데…….”

“그렇다니까? 정략결혼은 아니야. 그리고 망나니 같은 놈이라니. 회장님 그런 분 아니셔.”

오갈 데 없는 아이를 거둬서 25년을 친손녀처럼 키워주신 분이었다. 그런 이 회장이 이은을 정말 이상한 자리에 시집을 보낼 리가 없었다.

이은이 확신하며 말했다.

“우리 할배가 그렇게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래도…….”

“또! 또 그런다. 너는 진짜 왜 그렇게 맨날 회장님을 곡해하니?”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 회장의 편을 들었다.

만날 당해도, 만날 또 속는 순진한 아가씨를 보며 세완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얘는 뭘 알지도 못하면서!

이 회장에게 속아서 본가로 들어온 것이 고작 며칠 전인데도 그걸 다 까먹었나 보다.

“오해가 아니니까 그러지. 너 진짜 그렇게 순진하게 살면 큰일 나.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보다 그렇게 믿을 만한 분이 아니라니까?”

“자꾸 그렇게 말해라. 나 진짜 화낸다. 회장님 그런 분 아니시거든?”

이 회장의 속내가 까만지 하얀지에 대하여 이은과 세완의 의견이 갈려 두 사람은 툭탁거렸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이은이 재차 주장했다.

“그리고 회장님이 주선해 주시는 결혼이면 감사하지, 뭐. 아무 남자랑 결혼하라고 하지는 않으실 거 아니야.”

“야, 넌 그게 말이…….”

“맞잖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뭐가 있냐? 그냥 고아지. 너나 이런저런 트집을 잡지 회장님이 주선하는 결혼이라면 내 스펙으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좋은 집안이거나, 좋은 조건일 거 아니야.”

이은은 순진한 친구를 위해 세간에서 말하는 좋은 결혼상대자가 되려면 적당한 외모와 적당한 직업, 적당한 집안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을 더했다.

“그냥 서로 좋아하면 되는 거지 속물도 아니고…….”

“그러니까 네가 순진하다는 거야. ……재벌이든 아니든 결혼은 비즈니스더라고.”

씁쓸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그럼 너는 얼굴도 못 본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좋다고?”

세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을 왜 못 봐? 소개시켜 주면 보는 거지. 그리고 혹시 알아? 재벌가 사모님 될지?”

뻔뻔하게 대답한 이은은 제가 생각해도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 같은지 빵 터져서 웃음을 쏟아냈다.

“미쳤나 봐. 진짜 이런 이야기를 왜 하냐. 말도 안 되는 건데.”

“……안 되긴 뭐가 안 되는데?”

“뭐가 안 되긴. 그냥 헛소리했지. 누가 나 같은 애랑 결혼해.”

고아인데 스펙만 너무 좋은 골드미스가 바로 그녀다. 예전에 친구 때문에 들렀던 결혼정보업체에서는 차라리 스펙이 좋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며 혀를 찼다. 너무 잘난 여자는 남자들이 싫어한다고.

원래도 결혼 생각은 없었지만 백희경 덕분에 완강한 비혼주의자가 된 이은이 이런저런 한탄을 담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회장님이 정략결혼이라도 시켜주시면 좋겠다. 그러면 아무 생각 안 하고 결혼할지도 모르지.”

이 회장의 지시라면 이은은 제 감정을 묻어 놓고 상대가 누구든 그와 결혼할 거고, 그렇게 결혼해서 살 붙이고 살다 보면 남들처럼 아이도 낳고, 그렇게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갈 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이 회장이 정략결혼을 주선하는 게 더 좋은 거 아니겠냐며 이은이 웃으며 말했다.

이 회장만 아니라면 곧 죽어도 그런 결혼을 할 마음은 없지만, 어쩌면 그것이 김이은이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까 싶어서 이은은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웃으며 꺼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세완의 속이 불같이 타올랐다.

“……나는?”

세완이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그리고 그가 더 놀랐다.

“응?”

“아,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냥, 음……. 그러니까 네가 그런 결혼을 하면 나는 마음이 편하겠냐고. 그냥 그거 물어봤어.”

세완이 애써 제가 뱉었던 말을 이성적으로 정리했다. 이은이 피식 웃었다.

“바보야,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거래. 사람은 사랑만으로는 결혼 못 한다고 하더라. 그냥 적당한 나이가 되면 조건 맞춰서 결혼하는 게 사랑이래.”

아주 옛날에, 이은이 좋아했던 사람의 부모님이 그러셨다. 아가씨가 포기해 달라면서.

지금은 사랑이 전부인 것 같지만 사랑 그거 별거 아니라고, 적당한 나이가 되면 조건 맞춰서 결혼하는 게 인생이고, 그렇게 애 낳고 살다 보면 한 세상 끝나는 법이라고 그랬었다.

세완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그녀만 품고 있는 첫사랑의 잔상이다.

그날 들었던 어른의 조언을 이은은 여상스럽게 꺼내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후로 말이 없었다.

세완은 제가 꺼낸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스스로 생각하느라 바빴고, 이은은 과거에 들었던 이야기의 무게를 스스로 생각하느라 바빴다.

어려웠다. 정말.

* * *

서로가 품고 있는 생각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식사를 하는 내내 이은과 세완은 그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무엇을 말한 것은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시내에 나가는 길에 보았던 대충 적당한 식당 앞에 차를 세웠고, 메뉴도 적당히 무난한 것으로 골랐고, 맛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끝낸 세완은 집으로 차를 운전했고, 이은도 말없이 그에 따랐다.

어차피 집 근처에 있는 식당이었기 때문에 귀가하는 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자꾸 잊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장님의 심기를 긁어 놓고 도망 나와서 그런가? 이건 본가로 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직장인의 본능인가?’

이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 회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세완이지 이은이 아니었다. 이은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세완이 물었다.

“아니, 그냥. 근데 세완아, 나 혹시 회사에서 뭐 처리 안 하고 온 거 있니?”

엊그제부터 회사와 연락을 끊고 있는 것은 세완이나 이은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안 묻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심정으로 이은이 질문했다.

“……있을 리가? 천하의 똑순이가 해야 할 일도 처리 안 하고 휴가를 진행할 리가 있나!”

이 회장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순진해도 이렇게 순진할 수가 있나 싶은 이은이지만 회사 업무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존재가 김 비서, 김이은이었다.

“문제가 터졌으면 회사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그 문제가 만약 오늘이나 내일 터지는 거면?”

“잠깐만.”

이은의 가정에 세완이 서둘러 갓길에 차를 세웠다.

천생 한량으로 회사 일에는 손 놓고 사는 세완이라지만 그렇다고 시한폭탄을 방치할 정도로 구제 불능은 아니었디.

“BN11의 공급현황 점검 끝난 거 맞지?”

“오케이.”

“R&D 결재는?”

“그쪽도 오케이. 이상 없음.”

이은과 세완은 각자의 핸드폰과 태블릿을 펼쳐 놓고 교차검증에 들어갔다.

서로의 핸드폰에 자료가 없는 것은 회사 인트라넷에 들어가서까지 확인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제가 되는 것은 없었다.

세완과 이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없는데 어째서 자꾸만 불안하고, 뭔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세완과 이은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이은이 소리쳤다.

“맞다! 백희경 딸!”

“아!”

그러고 보니 데리고 왔었다.

“세상에! 미쳤나 봐! 까먹고 있었어. 어떻게 됐지?”

변명 같지만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이 회장이 붙들고 놓아 주지 않는 바람에 소원에 대해서는 정말 생각을 못 했다.

소원에 대해서는 결코 좋은 감정이 없고, 그 부모되는 두 사람에 대해서는 욕 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어린아이를 데려와서 방치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이은은 그녀를 설마 서울 한가운데에서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 사색이 되었다. 그런 이은을 향해 세완이 입을 열었다.

“집에 있어. 지하에다가 데려다 놨어.”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집에 있고, 세완이 직접 데려다 놨다니 다행이긴 한데…….

“지하라니?”

이 회장의 집에는 지하가 없었다.

설마 다른 곳에다가 데려다 주었나 싶어 이은이 그곳의 위치를 물으려는데 세완이 말을 추가했다.

“왜? 거기 있잖아. 별채에. 할아버지 안 쓰는 골프채랑 이것저것 있는 곳.”

“……!”

이은은 당황했다.

세완이 말한 공간을 떠올린 이은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리고 태연하게 뭐 문제가 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완을 향해 소리쳤다.

“야! 거긴 창고잖아!”

“근데? 뭐?”

“거긴 사람이 쓸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불도 안 들어오고…….”

“이불 깔면 돼. 괜찮아. 뭐, 지붕 있고 사면에 벽 있으면 방이지. 방이 별거야?”

세완의 뻔뻔한 말에 너는 그런 곳에서 자 보고서 하는 말이냐고 이은이 소리쳤다.

그곳은 말 그대로 물건을 두는 창고지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보육원에서도 그런 곳에서는 애들을 안 재운다.

아니, 보육원에서만 안 재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사람을 그런 곳에 둬서는 안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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