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세완의 질문에 비서실장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세완을 훑었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굉장히 기분 나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도대체 왜 그러냐는 듯 세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꼼꼼하고 야무지게 세완을 훑은 비서실장이 혀를 찼다.
“뭐, 그런 게 있네. 암튼, 수고했어. 수고하게.”
비서실장이 세완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세완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수고했다는 말과, 앞으로 수고하라는 말이 함께 튀어나오는 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 화법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에 거슬리는 것은 이 회장이 이은에게 품었다는 흑심이었다.
보통 돈 많은 노인이 나이 어린 아가씨에게 흑심을 품었다고 한다면 말 그대로 음흉하고 올바르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은은 이 회장이 친손자인 세완보다 더 손녀처럼 여기는 존재였다.
TK그룹 회장이 제 손자가 전교 1등을 했다고 자랑하면 내 손녀는 전국 1등을 했다면서 자랑했고, 선우그룹 회장이 자신의 손녀가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자랑하면 내 손녀는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은메달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백수 같고 능력 안 되는 세완에게는 처음부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 회장이 끼고 다니면서 재계 중진들에게 자랑한 것은 이은이 유일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회장에게 손자가 아닌 손녀만 있는 줄 알았다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으니 말해 뭐하랴!
그런 이은에게 남자로서 흑심을 품을 리는 없고…….
곰곰이 고민하던 세완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득였다.
정략결혼!
이 회장이 정말 단단히 흑심을 품었나 보다.
아니, 왜 친손자는 내버려 두고 이은에게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하나!
도대체 누구에게 팔아먹으려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돈도 벌 만큼 벌었으면서 왜 과욕을 부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각종 범죄를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갖은 고생 끝에 귀가했더니 이번에는 조부인 이 회장이 그를 괴롭힌다며 세완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저기요!”
우렁찬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뭔가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소원이었다. 차에 앉아있던 소원이 차창을 내려 밖으로 고개를 빼 들고 그에게 질문했다.
“……저는 어떻게 해요?”
으리으리한 본가의 위엄에 기가 죽기라도 한 듯 내내 카랑카랑하던 목소리는 다소 기운이 빠져있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나, 집에 들어오면 되는 거지.
세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그 많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중 태반이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 세완과 함께 차를 타고 온 문 대표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두 안으로 들어갔나 보다.
끙, 하고 신음성을 낸 세완이 그녀에게 말했다.
“따라와. 창고 방 하나 줄 테니까.”
소원은 차에서 내렸고, 그들이 타고 왔던 차는 유려한 운전 솜씨를 뽐내며 차고로 들어갔다.
세완은 성큼성큼 걸어 집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짐가방을 든 소원이 낑낑대며 따라 올라갔다. 소원이 들으라는 듯이 매너라고는 쥐뿔도 없다고 구시렁거렸지만 세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 * *
소원을 말 그대로 창고에 던져 놓은 세완이 서둘러 본채로 들어갔다.
섬에서 출발한 것이 오전 6시, 서울에 도착한 뒤 탈출하다 다친 이은의 어깨 치료를 위해 병원에 들렀다가 본가에 도착하니 정오였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먼저 집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은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좌석 배치가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이 회장의 옆은 항상 세완 자신의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 이은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양옆을 경호실장과 비서실장, 문 대표들이 채웠다.
이 회장은 이은의 옆에 앉아…….
“그래. 고생이 많았지? 이것도 먹어 보렴. 너 온다고 일부러 굽게 했다.”
보리굴비를 이은의 숟가락 위에 올리고 있었다.
“아유, 그만 좀 하세요. 이은이 체하겠어요!”
춘천댁이 타박했지만 이 회장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은아, LA갈비도 있어. 많이 먹어.”
사실 춘천댁도 말로만 타박했지 이 회장과 별반 차이는 없었다.
집 안에 식재료가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이은의 주변으로만 반찬이 가득했고, 경호실장과 비서실장, 문 대표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세완이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보면 모르냐? 밥 먹는다.”
이 회장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옳지, 옳지. 할애비가 한 점 더 뜯어주마.”
평생 남의 식사 수발은 고사하고, 밥 먹을 때 들이는 공도 아깝다며 밥상에 나오는 생선조차 가시가 없도록 죄다 발라낸 뒤 내오도록 하는 것이 이 회장이다.
하나뿐인 손자인 세완에게조차 저런 행동은 말 잘 듣던 일곱 살 이후로는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세완에게 이 회장에 재차 말을 던졌다.
“거기 멀뚱하니 기둥처럼 서 있지 말고, 밥 먹을 거면 오고 아니면 가거라. 우리 이은이 밥 먹는 데 방해된다.”
세완이 아닌 이은이 이 회장의 친손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
세완이 기가 막혀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비서실장이 조용히 세완에게 손짓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이 상무도 식사하지.”
그 말을 받으며 문 대표가 제 옆자리를 손으로 쳤다.
“이리 오게.”
문 대표가 춘천댁을 불렀다.
“아주머니, 여기 세완이 식사도 좀 부탁드립니다.”
“…….”
주객전도도 이런 주객전도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세완은 확신했다. 이 회장이 이은을 팔아먹으려는 흑심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고.
집 앞에서 비서실장이 주었던 언질을 떠올린 세완은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졌다.
“할아버지, 진짜 이러는 거 아니죠.”
“뭐가?”
내내 이은의 얼굴만 바라보던 이 회장이 고개를 들어 세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얼굴과 허우대 말고는 볼 게 없는 손자였다.
“아까 얼굴 봤지 않으냐. 다친 곳 없고. 살아있고. 그럼 됐지! 네가 애도 아니고 뭐 밥 먹는 것까지 챙겨야 하느냐?”
이 회장이 세완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을 늘어놓았다.
“이은이는 환자야! 심지어 납치까지 당했다며! 당연히 우리 이은이를 챙겨야지! 어깨 인대가 늘어나서 압박붕대에 삼각건까지 하고 있는 애를 두고 질투를 해?”
이 회장은 세완에게 철 좀 들라면서 장황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엊그제, 비서실장에게 이은은 집안 빼고는 모자란 것이 없는 인재이고 제 손자는 집안 빼고는 볼 게 없는 놈이라고 들은 것까지 생각나서 두 배로 울화가 터졌다.
네 녀석이 진작 잘했으면 내가 이 나이에 새파랗게 어린 (예비)손자며느리의 식사 수발까지 들었겠냐며 이 회장이 짜증을 내려는 참이었다.
“누가 그거 가지고 그래요? 말씀 잘하셨습니다. 이은이 아픈 애예요. 납치까지 당해서 몸과 마음이 다 약해진 애라고요.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순진한 애를 꼬드겨서 어느 재벌가의 모자란 아들내미나 손자에게 보내려는 모양인데 진짜 그러는 거 아닙니다.”
속내를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들킨 이 회장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략결혼은 무슨 정략결혼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살아계셨을 때도 안 했던 걸 왜 이은이한테 시키려고 그래요?”
“…….”
“이은아, 나와! 노인네 진짜 속만 시커매서는…….”
세완이 투덜대며 이은을 불렀다.
본가에 도착했을 때부터 내내 좌불안석이었던 굴러온 돌, 이은이 손가락을 입에 물고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 얼른! 나가서 밥 먹자. 여기 있으면 체해!”
이은이 눈동자를 굴려 이 회장과 세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꽤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음, 나는 정략결혼도 괜찮은데…….”
“얘가 헛소리하고 있어. 빨리 나와. 인마, 결혼은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야. 나와. 밥 사 줄게.”
세완은 이은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은은 못 이기는 척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 회장이 주선하는 것이라면 정략결혼도 기꺼이 받아들이기야 하겠지만 일단 현재의 이 불편한 상황에서는 좀 벗어나고 싶었다.
세완은 이은을 잡아끌고 인터폰 아래 협탁 서랍에 있는 세컨드 카의 스마트키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밖으로 나섰다.
그 일련의 과정을 이 회장은 오른손에 한 쌍의 젓가락을 쥐고 말없이 바라보았다.
“푸흡!”
비서실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흠!”
“큭!”
경호실장과 문 대표도 참다못해 웃음을 터트렸다.
이 회장의 손에 들린 한 쌍의 젓가락이 분을 이기지 못해 바르르 떨렸다.
“저, 저, 저 녀석이!”
세완이 저 녀석은 눈치가 빠른 것인지, 아니면 아예 없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이은에게 붙이려고 했던 어느 재벌가의 모자란 손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이은까지 데리고 사라진 손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 회장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저 나쁜 놈이 정말!”
이 회장이 결국 폭발해서 세완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현관을 향해 젓가락을 집어 던졌다.
“저 망둥이 같은 녀석! 천하의 불효자! 평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
나도 네가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운 손자면 이런 짓까지 안 한다. 그런데 너는 어디에다가 내놔도 부끄러운 손자잖아! 그러면 아가씨를 속여서 어떻게든 팔아치우려고 노력을 해야지!
이 회장은 급기야 욕설까지 뱉어냈다.
“푸하하하.”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문 대표와 경호실장과 달리 비서실장은 오열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만 웃어! 뭐가 그렇게 웃기다고!”
이 회장이 역정을 부렸지만 웃음을 쉽게 멈추지 않았다.
비서실장을 노려본 이 회장은 더없이 불편한 마음으로 식탁을 손바닥으로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잉, 몹쓸 사람!”
방으로 들어가는 이 회장을 향해 문 대표가 웃음을 참으며 질문했다.
“……회장님, 식사 안 하십니까?”
“안 먹네!”
이 회장이 화난 모습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우리 손자며느리를 구해오게!」
지령에서부터 드러났던 이 회장의 흑심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던 문 대표와 경호실장, 비서실장은 그제야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 * *
집에서 빠져나온 세완은 이은을 데리고 차에 올라탔다. 불편한 자리에서 이은을 빼내기 위해 데리고 나온 것이었는데 막상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세완이 물었다.
“어디 갈래? 먹고 싶은 것 있어? 맛있는 거 사 줄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글쎄.”
배는 안 고팠다. 식사 시간이고, 이 회장이 먹으라고 하니까 먹은 것이지.
사실 상황이 부담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끌려간 부분도 있었다.
늘상 구박을 하기는 하지만 이 회장에게 있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세완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데 세완보다 이은을 더 챙기는 이 회장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