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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40)화 (40/100)

40화

뜬금없이 남의 집 가족관계를 알게 된 이은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소원은 제 할 말만 하며 저를 안 데려가면 죽을 거라면서 차 밑으로 들어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 막무가내에 세완과 이은은 경악했다. 그때 멀리서 이야기하고 있던 경찰과 윤세가 그들을 향해 뛰어 왔다. 그제야 세완과 이은은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모두가 죽고 떠난 집에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는데 설상가상으로 경찰에게 동생이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들은 펜션 안주인이 와서 소원의 머리채를 잡아 뜯었다고 한다.

아비가 죽은 것은 소원도 마찬가지인데 네 망나니 같은 아비가 내 동생을 죽였다며 어지간히 아이를 괴롭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세완과 이은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소원을 훑었다.

옷이 늘어지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이 보인다. 단순히 비에 젖어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아이고, 내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디……. (아이고, 나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경찰이 자신은 순수한 호의로 그 말을 한 것이라고 했다. 시체가 사라졌지만 사라진 남동생을 걱정할 펜션 안주인을 위해서.

경찰은 펜션 바깥주인의 사돈의 팔촌이라고 했다.

그 구구절절한 설명에 이은과 세완은 기가 막혀 한숨을 토했다. 말로만 듣던 사돈의 팔촌까지 나오는 집성촌이 바로 그들이 이틀간 있었던 곳인 듯했다.

“아가 갈 곳이 읎어서……. (아이가 갈 곳이 없어서…….)”

경찰은 그들이 소원을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기색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지역 특성상 지인 커뮤니케이션이 지독하게 강한 것만 제외하면.

“야는 이자 여서 못 삽니더. (얘는 이제 이곳에서 못 삽니다.)”

동생이 죽었는데 펜션 안주인이 가만히 있겠냐면서 경찰이 소원의 편을 들었다. 첩첩산중이었다.

이은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소원을 내려다보았다. 소원은 아직까지 차 밑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경찰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고개를 획 돌리고 누워서 물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아.”

이은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분하고 화나고 짜증 나고, 그리고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또 어린아이가 우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자존심은 엄청 센데 남의 도움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좌절하는 모습이 마치 과거의 그녀를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이은이야 이 회장의 배려로 저 정도로 비참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아, 진짜!”

심란한 마음에 이은이 머리를 벅벅 긁을 때였다.

갑자기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뭔가 하고 봤더니 세완이었다.

“비 오잖아. 감기 걸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대화가 마무리될 기미가 안 보여 일단 우산부터 챙겨서 왔다고 했다. 우산의 3분의 2 이상을 이은에게 기울여 그녀에게 씌워 준 세완이 고개를 내려 소원을 바라보았다.

빗물에, 흙탕물에 아이의 꼴이 영 엉망이긴 했다.

내내 제 엄마를 싸고돌며 그들에게 예의 없이 굴던 모습이나, 그 부모가 생각한 짓을 생각하면 정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버려두고 저 꼬마마저 콩밥을 먹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긴 뭘 어떡해…….”

어렵게 꺼낸 대꾸 뒤에 말줄임표가 붙었다.

그래. 이게 바로 김이은이지. 세완이 입매를 비틀었다.

아마 저 말줄임표 뒤에는 ‘데려가야지!’라는 문장이 붙어 있을 거다.

똑똑한 척, 모진 척, 성격 나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나중에 보면 세상의 온갖 짐 덩어리는 다 끌어안고 있는 것이 이은이다.

차 밑에 들어갔으면 끌어내면 되는 것이고, 울든 말든 옆에다가 던져두면 되는 것인데 소원의 사정이 구구절절 튀어나오면서 대화가 길어질 때 알아봤다.

세완이 싸늘한 눈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울음을 참는 모습이 이은을 조금, 아주 조금은 닮은 것도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마음이 약해질 세완은 아니다.

진짜 김이은 옆에서 굳이 이은의 이미테이션을 보며 동정심을 날릴 정도로 진품 가품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다만…….

“데려가자.”

세완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길에서 100원짜리 사탕 하나, 1000원짜리 초콜릿 하나를 사자는 것 같은 망설임 없고 근심 걱정 없는 목소리였다.

“……!”

이은이 놀란 눈으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서 ‘세완이 얘가 지금 제정신인가?’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물론 평소라면 그가 먼저 내쫓았을 사람이긴 하다. 백희경의 딸은.

이은에게 오물이 묻는 것이 싫다며 열아홉 살이 아니라 아홉 살이라도 어디 먼 보육 시설에 갖다 버렸을 거다.

그리고 확실히 조금 전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직 백희경의 죽음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친 것은 분명하지만 죽음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저 실종일 뿐이다.

게다가 소원의 아버지와 그 공범의 시신이 사라진 것 또한 세완은 아무래도 수상하고 이상했다.

그리고 그의 촉이 이 모든 일이 백희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황상으로는 분명히 아닌데 어째서 그는 이은이 들었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자꾸만 백희경 같은지 모르겠다.

피투성이가 되어 장독대에서 떨어진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별채에 들러 이은의 납치를 꾀한다는 추측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한 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촉은 백희경이 수상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식스센스니 육감이니 하는 것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 회장 가라사대, 만사여 불여튼튼이라고 했다.

대비는 해 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만에 하나 백희경이 이은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세완도 백희경에게 네 딸 목숨은 내가 쥐고 있다고 외칠 거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어 재계의 늙은 여우라고 불리는 이 회장조차 가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세완의 나쁜 잔머리가 주도면밀하게 돌아갔다.

그는 인질 확보라는 아주 중요한 전략 수립을 위해 소원을 데려가는 일에 대해 쌍수 들어 환영했다.

물론 이은이 거부한다면 쌍수 들어 반대하겠지만 일단 데려가서 시야에 두는 것이 몰래 감시하는 것보다는 가성비가 좋기에 세완은 재차 이은을 설득했다.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잖아. 네가 정 마음에 걸리면 데려가야지.”

이은과 눈이 마주친 세완이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음을 지었다.

이은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녀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숟가락은 네가 놓니? 그리고 사람 하나 들이는 게 숟가락만 하나 더 놓는다고 돼? 신경 쓸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목소리에서 기운이 쫙 빠진 것이 소원을 데려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이었다.

세완은 물러터진 김이은을 보며 혀를 찼다.

숟가락이랑 라면 하나만 던져 주지, 뭐. 그리고 신경을 왜 써? 창고에 박아 놓으면 되는데! 

지붕 있고, 사면이 벽이고, 두 다리 쭉 뻗고 누울 수 있기만 하면 되지 잠자리 비단 금침까지 신경 써야 해?

애초에 소원을 안타깝게 여겨서 거두자고 한 것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공짜로 먹여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어떻게든 방값, 밥값을 뽑아먹을 자신이 있는 남자는 물러터진 친구의 어깨를 손으로 작게 토닥였다.

“그래, 그래. 알았어. 들어가자. 뭐, 그건 가서 생각해 볼 거고……. 일단 여기부터 떠나. 난 이 섬이 지긋지긋하다.”

그 말에는 이은도 이견이 없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은이 소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나서 옷이랑 짐 대충 챙겨서 와. 20분. 그 이상은 못 기다려.”

“……30분요. 20분 안에는 못 챙겨요.”

소원이 답했다.

“하! 저거 물건이네.”

세완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은도 잠시 말문이 막혀 바로 대꾸하지 못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 밑에서 빠져나온 소원이 훌쩍대며 집으로 들어갔다.

이제 겨우 휴가의 악몽에서 깨어났나 했더니 또다시 맡게 된 짐 덩어리에 이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섬이 지긋지긋한 건지, 비가 지긋지긋한 건지, 백희경이 지긋지긋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었다.

그렇게 멀어지고 싶었던 이 회장의 집이 있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이 지독하게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 * *

소원이 짐을 가지고 온 이후, 그들은 말없이 이동했다.

다른 차에 타라고 했음에도 소원은 기어코 이은과 같은 차를 타기를 원했다. 다른 차에 타면 이은이 어디 허허벌판에 그녀를 버리고 갈 것 같은가 보다.

그럴 심산이었으면 애초에 짐을 챙기라고도 안 했고, 짐을 챙겨오라고 한 뒤에 그녀가 없을 때 섬을 떠났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소원은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는 것인지 이은이 반드시 함께해야만 움직이고, 식사하고, 차를 탔다.

덕분에 이은과 같은 차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본의 아닌 묵언 수행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끔찍했던 침묵을 거쳐 그들은 결국 서울에 들어섰다.

문 대표는 현재의 경호 대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이 회장의 집으로 향했다.

이은과 세완, 그리고 소원은 웬만한 재벌 회장보다 더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이 회장의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황송하게도 어느 귀한 분이 버선발로 뛰쳐나와 대기하고 계신 것을 발견했다.

BS그룹의 회장인 이 회장과, 이 회장의 비서실장 그리고 경호실장 등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회사의 요직에 있는 임원들의 등장에 이은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아이고, 내 새끼! 고생이 많았구나!”

그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내려와 있었던 듯 양쪽 어깨가 다소 젖어 있는 이 회장이 우산도 뿌리치고 헐레벌떡 달려와 이은의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

졸지에 버림받은 손자가 발끈했지만 이 회장은 (예비)손자며느리만 귀할 뿐이었다.

“그래, 몸은 괜찮고? 어디 상한 곳은 없어?”

비 맞은 채로 그를 반기는 이 회장의 모습에 이은이 황송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도 잘해주는 이 회장이지만 오늘은 정말 유난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납치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정 많고 따뜻한 평생의 은인을 향해 이은이 진솔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어서,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감기 걸리시겠어요.”

이은은 뒤에 우산을 들고 서 있던 경호실장에게 우산을 받아 이 회장에게 씌워 줬다. 그리고 두 조손은 다정하고 또 다정한 모습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세완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회장의 손자 홀대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니라지만 먼 길을 다녀왔는데도 어쩜 그에게는 눈길 한번을 주지 않는지…….

입을 떡, 벌린 세완이 이은과 이 회장이 사라진 현관문을 주시하고 있는데 이 회장의 측근인 비서실장이 슬그머니 와서 세완에게 말을 걸었다.

“이 상무, 노인네가 흑심이 있어서 그래. 서운해하지 마.”

“……흑심이라뇨?”

세완이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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