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은은 뜨악한 표정으로 반문했고, 세완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이은이 하는 말이 세완이 하고 싶은 말이다.
그들에게 연락이 온다면 참고인 조사가 필요한 경찰의 소환이거나, 제 죽은 아버지를 보고 원망할 곳이 필요해진 소원이 애먼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상상한 적 없었던 시체 실종 사건에 이은과 세완은 잠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 주는 곳이다.
앞으로 섬은 고사하고 바닷가 근처로도 안 갈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세완과 이은이 소환에 응해 차 밖으로 몸을 빼냈다.
* * *
시체가 있는 별채로 오라고 했으면 소환이고 나발이고 무시했겠지만 다행히 윤세가 그들에게 오라고 한 곳은 본채였다.
차에 항상 실어 놓는 커다란 우산을 펴서 이은과 나란히 쓴 세완이 본채에 도착했다.
이은을 먼저 들여보낸 뒤, 우산을 접고 비 묻은 어깨를 털며 안으로 들어갔는데 집 안의 상황이 뭔가 묘했다.
윤세와 소원 그리고 이은까지 세 명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명이 더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또 뵙습니다.”
몇 시간 전에 부른 바가 있는, 섬에 딱 한 명 있다는 당직 경찰이었다. 이미 이은이 납치되었을 때, 세완이 BS그룹의 사람이라는 것을 들은 바 있는 경찰이 살갑게 인사했다.
그를 본 세완의 미간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졌다. 세완이 윤세에게 물었다.
“경찰이 왜 이곳에 있습니까?”
“예? 살인 사건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경찰을…….”
세완이 윤세의 말을 끊으며 이야기를 덧붙였다.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지금 저 경찰이 어떻게 이 집 안에 들어왔느냐를 묻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내 차가 이 집 현관 앞에 서 있었는데 나는 경찰이 들어오는 것을 못 봤거든요.”
세완이 받은 자료에 의하면 이 집에 뒷문 같은 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경찰에게 향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저짝에 문으로 들어왔는디……. (저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왔습니다만…….)”
경찰이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세완이 답답한 듯 그를 다그쳤다.
“그러니까 도대체 문이 하나밖에 없는데 도대체 어디로 들어왔다는…….”
“우리 집에 후문 있어요.”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손을 이마에 얹고 있던 소원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후문이라니? 이 집에 왜 후문이 있어?”
“내가 우리 집에 후문이 왜 있는지까지 알려 줘야 해요?”
소원의 날카로운 반응에 세완이 미간을 찌푸렸다.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은 두 사람을 보며 이은이 슬쩍 세완의 옷을 잡아당겼다.
백희경이 어쨌든 간에 소원의 입장에서는 그녀와 그녀의 일행이 미울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껏 예민해 있을 상황이었다. 얼핏 봐도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닐 텐데 그런 아이와 괜한 말싸움은 하지 말라며 이은이 세완을 말렸다.
게다가 이은의 납치로 세완이 온 사방을 다 경계하는 것은 알지만 경찰을 의심하는 것은 도가 지나쳤다.
이은의 손짓에 세완이 애써 화를 삭였다. 그가 경찰에게 재차 질문했다.
“이 집에 후문이 있단 말씀입니까?”
“뭐, 거시기, 그렇죠. (뭐, 아무래도, 그렇죠.)”
대답을 들은 윤세가 경찰의 눈앞에 백희경 집의 평면도와 설계도를 들이밀며 물었다.
“혹시 후문이 어디쯤 있습니까?”
경찰의 말을 못 믿는 것은 아니다. 그저 좀 더 확실하게 하자는 거다.
“이짝으로 들어오긴 했는디 여도 뚫려 있고, 여도 뚫려 있고, 여도 뚫려 있고……. (이쪽 문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이쪽으로도 들어올 수 있고, 저쪽으로도 들어올 수 있고, 저쪽으로도 들어올 수 있고…….)”
경찰은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서너 군데를 짚어줬다.
“시골집이 다 안 그렇소. 살다가 불편하면 군데군데 개구멍도 좀 뚫고, 논으로 일하러 가는데 돌아갈 수는 읎으니께 내 발이 가는 곳이 다 길이오. (시골집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살다가 불편하면 군데군데 개구멍을 낼 수도 있고, 논으로 일하러 갈 때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 발이 닿는 곳을 다 길로 만드는 것이지요.)”
시골집들은 태반이 불법으로 증축되거나 개축되는지라 이런 설계도나 평면도만으로는 잘 알 수 없다고 경찰이 조언했다.
그의 말을 들은 세완과 윤세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면 혹시…….
“아저씨, 대문 말고 건물에도 혹시 그런 경우가 있나요? 이 집 별채 같은 곳이요.”
이은이 질문했다.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쵸. 소원아, 느 집 뒤채에 쪽문 뚫어 놨제? 보일러실이랑 연결되게. (그렇죠. 소원아, 너희 집 뒤채에 쪽문 뚫어 놨지? 보일러실이랑 연결되게?)”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경찰이 소원에게 확인했다.
“예.”
소원이 내키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경찰은 이것 보라는 듯 그들을 향해 두 눈을 끔벅였다.
세완과 윤세, 이은은 헛웃음 아닌 헛웃음 터트렸다.
납치범이 분명 세 명이었는데 두 명만 시체로 발견되고 한 명은 사라진 이유가 여기에서 나왔다. 아마 그 나머지 한 명은 쪽문으로 도망을 간 것이리라.
그렇다면 관건은 그 한 명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관심 없는 세 사람의 얼굴이 서로를 향했다. 그들은 동시에 경찰을 바라보았다.
경찰이 멀뚱대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정적 속에서 소원이 짜증을 냈다.
“왜 쓸데없이 문 타령이야. 아저씨, 저 사람들이 우리 아빠랑 세탁소 아저씨를 죽인 거라니까요. 왜 보기만 해요. 얼른 잡아가야지!”
기운 없이 늘어져 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 세완과 이은들을 삿대질하면서 말했다.
죽이긴 누가 누굴 죽이냐고, 정말 죽을 뻔한 게 누군지 아느냐고 세완이 화를 내려는 찰나였다.
“야야, 것도 시체가 있어야 얘기를 하는 그제 하나도 읎자너. (얘야, 그것도 시체가 있어야 살인 혐의를 적용하는 건데 시체가 하나도 없지 않니.)”
경찰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경찰의 말에 소원이 시근덕거리다가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주시하며 이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그 이야기 좀 자세히 여쭤 봐도 될까요?”
오라는 이야기만 듣고 바로 온지라 자세한 상황 이야기는 듣지도 못했다. 그때 윤세가 나섰다.
“제가 설명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직접 겪었으니까요.”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고, 윤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소원이를 달래서 본채에 데려다주고, 경찰분과 함께 가 보니 없더라고요. 한 구도 남김없이.”
윤세는 그래서 지금 경찰과 그들, 모두가 상당히 난감한 입장이라고 했다.
혹시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현장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했던 그로서는 이 상황을 굉장히 곤란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윤세가 말을 맺었다.
대충 상황은 파악했는데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세완은 그런 부문을 조목조목 따져 물었고, 이은은 그럴 기운도 없어 휘청거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내내 공포영화의 피해자1이 되어서 쫓겨 다니다가 조금 숨을 돌리나 싶었더니 추리물의 등장 인물1이 된 기분이었다.
이은은 그녀의 휴가가 잘못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다.
처음에는 휴가 전, 자기 두고 가면 발병 날 거라 했던 세완의 악담 아닌 악담이 생각났다.
쟤가 설마 나를 저주한 것인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과 함께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과 같은 토속신앙들까지 떠올랐다.
‘그런데 세완이랑 같이 왔잖아!’
함께 가는데 저주를 할 리는 만무했다.
세완에게서 의심을 지우자 그 다음으로는 처음부터 그녀는 가족 같은 것은 욕심을 내지 말아야 했는데 하늘의 뜻을 거부해서 그런 것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은의 머릿속에 온갖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말도 안 되는 가설들이 떠올랐다.
납치에 살인미수, 살인 사건으로도 이미 과부하인데 여기에 시체 실종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까지 얹어지니 이은은 정말 모든 것을 다 놔 버리고 싶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유부남을 만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끌려갔던 이 회장의 집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이제 휴가는 3년이 아니라 세 시간, 아니 3분도 싫었다.
이은은 다시 그녀만의 안온하고 평화로운 사무실에서 일만 하고 싶었다. 이은이 천장을 보며 복귀를 간절하게 갈망했다.
그 사이, 세완과 윤세, 경찰은 별채의 현장을 확인해 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녀가 납치된 이후부터 어미 새가 된 세완이 이은에게 말했다.
“같이 가자.”
“……안 가면 안 돼?”
“안에 들어오지 말고 밖에만 있어. 나랑 같이 있자.”
세완이 이은을 다독거리며 답했다.
“놀고 있네.”
까칠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기는 했지만 세완과 이은 모두 무시했다.
이은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잡히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 범인이 이은을 납치한 공범이기까지 하니 세완이 걱정하는 바는 충분히 이해했다.
이은은 그녀를 걱정해 주는 유일한 존재에게 손을 뻗었고, 세완이 이은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켰다.
“가자.”
“……그래.”
그들이 본채 현관을 막 나섰을 때였다.
갑자기 차 소리가 나더니 비바람을 뚫고 여러 대의 차가 백희경의 집을 둘러쌌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들어온 차들의 자동차 라이트가 그들을 향했다.
이은은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섰다. 세완은 놀란 것은 잠시, 재빠르게 이은을 제 뒤에 숨겼다. 윤세도 다급히 세완과 이은의 옆에 와서 그들을 엄호했다.
경찰과 소원은 팔을 위로 올려 자동차 라이트의 강렬한 빛을 피하려고 했다. 그리고 차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상무님, 괜찮으십니까?”
차에서 내린 사람이 이은과 세완에게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와서 물었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은과 세완은 처음에는 놀랐고, 그 뒤에는 말을 한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닫고 지극히 안도했다.
“문 대표님!”
세완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반겼고, 이은은 그럴 힘도 없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그녀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세완이 왜 그렇게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나 했더니 문익을 기다린 것이었나 보다.
문익은 가장 최전선에서 이 회장을 경호하는 시큐리티의 사령탑으로 BS그룹의 경호보안부서인 시큐리티를 설계하고 완성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 나이를 핑계로 현역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는데 세완과 이은 때문에 투입이 된 모양이었다.
그는 이은과 세완에게 직접 호신술을 가르친 사람이기도 하다.
“아가씨도 괜찮으십…….”
문 대표는 스르륵 주저앉는 이은을 보고 그녀를 부축해 주려고 했다. 하지만 세완이 좀 더 빨랐다.
그를 경계하는 것은 아닌데 마치 경계하는 것처럼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세완을 보며 문 대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 모두 괜찮으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