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이 다 싫었다. 이곳엔 정말 단 한 순간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세완아, 밖으로 나가자.”
“비가 오는데 괜찮겠어?”
비가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설사 우박이 떨어진다고 해도 시체와 함께 안에 있는 것보다는 밖에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은은 세완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발견했다.
우산을 쓰고 있는 소원이었다. 소원은 남의 집을 왜 자꾸 들쑤시냐는 듯 짜증과 경계가 배어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 짜증보다는 경계심이 좀 더 강해 보였다.
소원은 독 오른 살쾡이마냥 그들을 보며 날을 세우고 있었다. 내 집에서 이만 나가 달라는 의도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본 순간, 이은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이 그녀의 기억에 있는 곳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여기……!”
이은이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까는 놀라서 미처 몰랐는데 광경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안에 들어가 보기까지 해놓고 어떻게 이 사실을 몰랐나!
이은이 세완을 돌아보았다. 놀란 그녀의 반응을 보며 세완이 말했다.
“백희경의 집 별채야. 아까 우리가 묵었던.”
세완은 그녀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 몰랐다며 분해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나마 멀리 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이은이 실소를 터트렸다.
감금되어 있을 때는 어딘지 몰라 그렇게 두려웠었는데 그 장소가 고작 백희경의 집이라는 것이 그녀를 우습게 했다. 그리고 백희경에 대한 분노가 차오르며 새삼 그녀를 화나게 했다.
감금되어 있을 때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소원아빠’라고 부른 것까지 들었음에도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경황도 없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입으로 그것을 말하게 되면 백희경이 범인임을 정말 확신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쯤 되면 정말 범인이 누구인지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은은 이제 백희경이 제발 그녀의 친모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헛웃음을 터트리는 그녀를 보며 세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소원은 이은을 미친 사람 보듯이 바라보았다.
“당신들, 뭐야 진짜? 안에서 무슨 짓 했어요?”
무슨 짓은 네 부모가 내게 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살해당한 두 명 중 한 명이 소원의 아버지, 그러니까 백희경의 남편으로 보인다는 점이 그 말을 참게 했다.
이은은 말없이 차갑게 몸을 돌렸다. 세완은 그녀를 뒤쫓았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갔을 때, 어렴풋이 비명과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이은은 빗소리를 착각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그 소리를 무시했다.
* * *
백희경의 집은 본채든 별채든 그 어디에도 있고 싶지 않아 세완의 차에 들어가 있었다. 나무가 길을 막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차에 올라타 비를 피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 안에서 이은은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을 했다.
상황의 시작과 끝, 원인, 결과, 뒷수습…….
오지랖인 것은 아는데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소원의 거취까지도 이은은 걱정이 되었다.
얼핏 재수생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스무 살이면 성인이니 알아서 잘 살겠지 싶기도 하지만 말만 성인이지 아직 미성년자나 다름없는 나이에 기댈 곳 없는 존재들의 홀로서기가 쉽지 않은 것을 아는지라 이은은 조금, 정말로 아주 조금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그녀를 납치해서 죽이려고 한 사람들의 딸인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겠냐마는 그래도 백희경이 정말 이은의 친모라면 이 넓은 세상에서 소원과 이은이 약간이나마 피가 이어진 사이라는 점이 그녀는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소원의 아버지는 사망, 그 와중에 어머니인 백희경은 도주!
그 부모 되는 사람들이며, 그녀를 보며 날을 세우는 소원을 생각하면 정말 티끌만큼도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데 졸지에 살인미수, 납치범의 딸이 되어 세상에 홀몸으로 던져질 소원이 자꾸만 이은의 신경 어느 구석에서 벌레처럼 갉작거린다.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은 자신의 모습에 이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아는데 도대체 자신의 성격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이은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이은의 이마에 철썩, 와서 닿았다.
“생각 그만.”
세완은 이은의 이마를 가볍게 때리며 그녀의 복잡한 마인드맵을 영업정지 상태로 만들었다.
“……!”
아프지 않은 이마를 문지르며 이은이 세완을 바라보았다.
이은의 볼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완은 한 손으로는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열심히 메시지를 나누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쓸데없는 생각은 적당히 하시고, 차라리 한숨 잠을 자.”
“너는 이 상황에서 잠이 와?”
“못 잘 건 또 뭐야. 그냥 눈 감고 있어. 그러면 잠 와.”
배려심이 넘치는 건지, 아니면 무신경한 것인지 모르겠는 세완의 말이 퉁명스럽게 울렸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은은 복잡하게 들썩이던 머릿속이 조금은 안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세상천지 뭐 하나 급한 것, 어려운 것, 복잡한 것 없는 세완이라 그런지 그의 옆에만 있으면 언제나 복잡한 이은의 머릿속도 함께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평소였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두세 마디 정도 말을 덧붙였겠지만 오늘만은 왠지 세완의 말을 듣고 싶었다.
이은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빗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들숨 날숨 세완의 숨소리와 그가 핸드폰 액정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적인 백색소음이 이은의 신경을 다소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은의 눈이 반짝 뜨였다.
그러고 보니 이은은 그때 방 안에서 분명히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 후에 별채에 들어가 보니 남자 두 명이 죽어 있었다는 것은…….
‘백희경이 죽였을까?’
이은은 궁금했다.
세완이나 이은이나 아는 것은 거기에서 거기겠지만 혹시나 싶어서 이은이 질문했다.
“세완아, 아까 거기 그 두 사람……. 백희경이 죽였을까?”
“무슨 뜻이야?”
세완이 이은을 응시했다.
“아니, 나는 남자 두 사람이랑 여자 목소리를 들었는데 죽은 사람은 남자 두 사람이잖아. 그럼 가능성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지 않나 해서…….”
이은이 웅얼거리며 대꾸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남자 둘이 싸워 동귀어진했다는 가정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이은이 탈출하고, 윤세가 건물로 들어가기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다.
무엇보다 남자 둘 모두 다 둔기로 얻어맞은 것인지 머리에 피가 묻어 있었다는 것이 이은은 마음에 걸렸다.
다른 죄는 차치하고서라도 납치에 살인미수, 살인죄는 분명히 적용되지 않겠느냐며 백희경의 전과를 예상하는 이은을 보며 세완이 혀를 찼다. 하여간 잡생각만 많아서!
마인드맵을 통해 최악의 상황과 차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최고의 상황, 최선의 상황을 설계하는 그녀의 능력은 회사 업무에서는 최고의 재능이었지만 이럴 때는 정말 쓸데없는 잡생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험한 상황은 되도록 잊어 줬으면 좋겠는데 이은은 현 상황에다가 온갖 잡다한 주변 상황을 섞어서 이런저런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죽였으면? 그게 뭐 중요해?”
“……친엄마일 수도 있잖아. 그럼 나는 살인자의 딸인 거고.”
“이 상황에서도 친엄마 소리가 나와? 아직 덜 당했어?”
“그건 아닌데…….”
이은은 누가 봐도 딱 부러지는 성격의 똑순이 아가씨인데 자신의 가족이나 뿌리, 혈연과 관련된 부분만 튀어나오면 영 맹탕이 된다.
아주 오래전, 3년 내내 전교 1등에 전교 회장이라는 완벽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은의 부모가 없어 이번 연도 어머니회가 약하다는 선생들의 헛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었던 그녀가 떠오른다.
세완이 이은을 보며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까 그가 이은을 도저히 버려둘 수가 없지…….
답답한 아가씨를 챙길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생각하며 세완이 이은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악! 야!”
갑작스러운 습격에 이은이 우울함을 잊고 짜증스런 신경질을 뱉어냈다.
세완은 역시 이 모습이 가장 김 비서, 김이은답다며 낄낄댔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친엄마 아닐 거야.”
“……?”
“넌 그런 깡이 없어. 살인은 아무나 하냐? 엄마랑 딸은 닮는다는데 넌 유전자에 폭력성이 정말 눈곱만큼도 없어, 아가씨.”
핸들에 팔을 괸 세완이 키들거리면서 말했다.
물론 그를 때릴 때 보면 폭력성이 없다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만 되면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약해지는 이은을 보면 김이은에게는 애초에 살인자의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장난 아니야!”
이은이 발끈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세완은 장난기를 지우고 솔직하게 진실 일부를 토해냈다.
“정말이야. 그리고 아마 네가 들은 목소리, 백희경 아닐 거야.”
“백희경이 아니면?”
“나도 모르지. 제삼자 일수도? 백희경은 너 납치되기 직전에 장독대 있는 곳에서 떨어졌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소원이 제 엄마가 죽는다고 방방 뛰면서 생난리를 쳤다고 세완이 말을 덧붙였다.
“정말이야?”
“암만!”
“그럼 내가 들은 목소리는 누구야? 아니, 그 전에 백희경은 괜찮아?”
119가 왔다 갔냐는 이은의 질문에 세완의 표정이 묘해졌다.
부상당한 백희경이 사라졌다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세완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그의 표정에서 미묘함을 잡아낸 이은이 캐물었다.
“이세완?”
“…….”
한국어는 성조가 있는 언어가 아닌데 어째서 이은이 세완을 부를 때면 그의 이름에 악센트와 강세가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세완이 슬쩍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 모습에 이은이 수상함을 느끼고 재차 캐물으려는 바로 그때였다.
- RRR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칼날 같은 이은의 다그침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좋아서 신나라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의 주인공은 그들에게 더 큰 고민을 던져 주었다.
「이윤세입니다. 와보셔야겠습니다.」
다짜고짜 제 이름만 이야기하면 내가 제 이름을 아느냐며 세완이 투덜거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척하면 척이었다.
“급한 거 아니면 좀 있다 가죠.”
「급한 겁니다.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시체가요?”
다이내믹 코리아도 정도가 있지 어쩌자고 이 동네는, 그러니까 백희경의 집은 뻑하면 미스터리 사건이냐며 세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실종된 백희경도 거의 시체나 다름없을 정도로 크게 부상을 당했는데 사라졌다고 하더니 도대체 이 집 구석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모르겠다.
세완은 일단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은이 세완에게 채근했다.
“왜? 뭐래?”
“시체가…… 사라졌다는데?”
“시체가 왜?”
“그러게. 시체가 왜 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