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익숙한 듯 명령하는 세완의 말에 윤세는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용주의 손자님이시라는데 까라면 까야지…….
의사 라이센스를 가진 특전사 출신 특수1팀도 고용주 앞에서는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
무인도에 갇혀서 평생 그곳에서만 살 것도 아닌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17대 1도 했는데 고작 3대 1, 그것도 민간인과의 대결을 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자체적으로 납득을 끝낸 윤세가 조용히 건물로 접근했다.
한편, 윤세를 보낸 세완은 끌어안고 있던 이은을 바닥에 내려놓고 혹시라도 상처나 흉터가 있나 그녀의 몸을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지?”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질문에 고개부터 끄덕였다. 이 회장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이은의 이성이 잠깐 가출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은은 맑지 않은 정신머리에 채찍질을 해서 다시 예전의 깐깐한 김 비서로 돌아가 세완을 다그쳤다.
“저 사람 혼자만 보내면 어떡해? 안에 세 사람이나 있다니까? 다시 불러!”
“셋이든 넷이든! 명색이 특수1팀인데 밥값은 해야지.”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는 너는 밥값을 해서…… 아야!”
익숙한 듯 세완의 등짝을 때리려던 이은이 팔을 붙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창문을 빠져나오면서 부상을 당한 것인지 그를 때리려고 팔을 들자 어깨가 아파 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은은 고통을 참고 굳건하게 세완을 때렸다.
“얼른 쫓아가서 저 사람 잡아, 빨리!”
목소리를 낮춘 이은이 잇새로 협박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세완은 움직이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회사 밖에서도 구박 덩어리가 된 세완이 미간을 찌푸리며 습관처럼 투덜거렸다.
“보낼 만하니까 보냈지. 저 사람도 명색이 특수 1팀이면 민간인 세 명 정도는……. 아, 그만 좀 때려!”
세완이 얻어맞은 등짝을 문지르며 말했다.
“저 사람 걱정은 안 해도 돼. 어련히 알아서 시켰을까! 겉보기에만 일반인이지 저쪽 계통은 전부 다 전신이 무기인 인간 흉기잖아. 경호실장 아저씨를 생각해 봐.”
이 회장의 경호를 담당하는 경호실장을 떠올린 이은이 멈칫했다.
3대 1이 아니라 33대 1로 싸워도 멀쩡할 것 같은 그분을 생각하며 이은이 벌써 멀찍이 걸어가고 있는 윤세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몸이나 헤어스타일이 그분과 얼추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세완은 이은의 귀가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것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괜찮대도 그러네.
자고로 분야를 막론하고 전문 인력이 존재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사나이 태어나서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나는 최강의 특수1팀, 임무는 반드시 완수한다!」
「나는 불굴의 특수1팀, 어떠한 역경도 극복한다!」
이제는 자면서도 외울 것 같은 특수1팀 부대원들의 외침이 지금도 귓가에서 이명처럼 울린다.
자칭 타칭 세계에서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부대의 부대원이니 알아서 잘할 거다.
미국 시민권자라고 느긋하게 있다가 극성맞은 조부 덕분에 본인도 모르게 국적이 변경되어 특전사로 만기 전역, 그것으로도 모자라 특수1팀 훈련소까지 끌려갔다 온 덕에 그들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세완이 태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걱정 안 되는 특수1팀 출신 남의 집 아들 대신,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팔랑거리고 있는 집 주소 동일한 성실쟁이 약골 소꿉친구에게 질문했다.
“그나저나 너 다친 거 같은데 괜찮아?”
“아!”
이은이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제야 제 부상을 떠올렸나 보다.
“……안 괜찮아. 아파.”
“쯧쯧, 어디 봐봐. 뼈는 괜찮아야 할 텐데…….”
세완이 조심스레 이은의 어깨를 살폈다.
맞은 사람이 때린 사람의 몸이 괜찮으냐고 묻고, 그의 부상 여부를 살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지만 두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세완은 이은의 부상은 걱정되지만 조금 전까지 울며 두려워하던 이은이 그를 때리고 잔소리할 정도로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는 것에 내심 기뻐했고, 이은은 평소와 같은 세완의 모습에 그를 구박하며 간밤의 악몽을 조금씩 떨쳐 버렸다.
“여기 괜찮아?”
“어, 거긴 괜찮……. 악!”
“인대가 늘어났나?”
“만지면 아냐? 조심히 좀 만져!”
윤세는 본의 아니게 잊혔다.
* * *
세완과 이은이 고의로 혹은 실수로 망각해 버린 윤세는 그들이 긴장감 없이 투덕거리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온몸을 긴장시킨 상태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윤세가 조심스럽게 건물에 접근했다. 손에는 세완에게 전달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잭나이프도 쥐었다.
그는 조용히 내부의 동태를 살폈다.
10분이 흘렀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올 때가 지났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윤세는 건물 안의 인기척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이 경우엔 둘 중의 하나였다.
정말로 아무도 없거나, 아니면 제 기척을 숨기고 밖에서 진입할 누군가를 기습하려고 숨죽이고 있는 것이거나.
윤세가 보건대 이 경우는 높은 확률로 후자였다.
문이 하나밖에 없는데 들키지 않고 도망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창문으로 나온다는 선택지도 있기는 했지만 이 건물은 처음에는 창고로 지어진 것인지 창문이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심하게 작아 그곳으로 사람이 나올 수가 없었다.
얼핏 본 것이긴 하지만 이은이 빠져나온 창문이 건물에서 가장 큰 창문인 듯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건물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후자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일반인이 기척을 지나치게 잘 숨긴다는, 지나치게 꺼림칙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윤세의 이성이 그를 무시했다.
그래봤자 민간인이다.
윤세는 합리적 추론 끝에 애써 가볍게 생각했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윤세 자신은 큰 걱정이 없는데 문제는 세완과 이은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한 윤세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세완과 이은은 그때까지도 투덕거리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이은과는 다르게 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서 있던 세완과 윤세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이은 몰래 수신호를 보냈다.
「무슨 일입니까?」
어째서 고용주의 손자가 특수1팀에서만 사용하는 수신호를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세도 수신호로 그에게 현재 상황을 알렸다.
「내부 인기척 없음. 경계태세.」
약속된 언어 몇 개가 윤세의 손을 통해 세완에게 전달되었다. 긴장감 없던 세완의 얼굴이 순간 심각해졌다.
세완의 변화에 이은이 뒤를 돌아보았다. 윤세의 손이 전하는 이야기를 이은이 확인했다.
이 회장의 배려 아닌 배려로 세완과 함께 훈련을 받은 이은 또한 특수1팀의 수신호를 알고 있었다.
후방지원이 필요하다는 윤세의 수신호에 이은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분하고 원통하고 서러운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느냐마는 세완이 그녀로 인해 진흙탕에 빠지도록 둘 수 없어 이은은 이대로 진입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다.
세완도 갈등했다. 잠깐의 방심으로 이은이 납치까지 당했다. 다행히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그녀를 되찾긴 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만반의 준비를 했을 범인들이 있는 곳에 윤세만 혼자 들여보내는 것은 세완이 생각해도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합류를 하자니 이은이 마음에 걸렸다.
어깨를 다친 이은을 그들과 함께 건물 안에 들어가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밖에 남겨 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저 건물에 있는 이들이 얌전하게 있을 리야 없겠지만 만약 안전만 보장이 된다면 차라리 이대로 범인을 잡는 것을 포기하고 서울로 복귀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세완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윤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돌발행동에 세완과 이은이 깜짝 놀라 그를 부르려는 찰나였다.
“들어와 보십시오.”
안에서 윤세가 크게 소리쳤다.
세완과 이은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 안에 발을 들인 순간, 세완과 이은은 그들이 이곳에서 볼 것이라고는 결코 상상도 못 했던 장면을 목격했다.
세 사람이 편을 먹고 윤세를 덮치는 것까지는 예상을 했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중 두 명을 모두 시체로 발견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세완과 이은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특히 조금 전 그들을 피해 도망 나왔던 이은의 얼굴은 정말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를 납치한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방금까지 살아서 그녀를 위협했던 사람들이 미동 없이 쓰러져 죽어있는 모습은 그녀를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기척이 너무 없다 보니 이상해서 들어왔습니다. 기분이 이상하게 쎄한 느낌이 들어서요.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네요.”
윤세는 시체들 앞에 서서 자신이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은은 그의 해명 같은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어느 정도로 위험했었는지 범인들의 시체를 보며 깨달았다.
어쩌면 저 시체가 그녀일 수도 있었다 생각하니 손이 떨리고 몸이 떨려왔다.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는 이은의 모습에 세완이 냉큼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어, 괜찮아……. 괜찮은데…….”
이은은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친모 한번 만나러 왔다가 납치, 감금, 이제는 살인현장 목격까지……. 그녀의 휴가가 쏘아 올린 공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112에 신고할까요?”
“……해야 하지 않나?”
“조금 귀찮아질 것 같아서요.”
시체를 보고도 아무런 감응이 없는 것 같은 윤세의 말이 그녀를 더더욱 기가 막히게 했다.
“어차피 여기에 온 것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신고하세요.”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이성적인 것 같은 세완의 모습 또한 이상하긴 매한가지였다.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세완의 옷깃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응? 왜? 힘들어? 좀 앉을래?”
그녀를 보며 걱정스럽게 질문하는 것은 분명히 세완이 맞는데,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모자람은 분명 세완이 맞는데, 적지 않은 것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는 경황이 없어서 대충 넘어갔던 모든 것들이 이은의 신경에 거슬렸다.
“아니야. 괜찮아. 그냥……. 어, 그래. 그냥…….”
이은은 애써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 순간, 들린 윤세가 112에 전화를 하는 소리가 그녀를 더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거기 112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불법 주차라든지 신호 위반 같은 자잘한 범법도 거의 저질러 본 적이 없는데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이은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쳤나 보다. 평생 함께 자란 세완이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지다니.
그 와중에 피비린내가 역겹게 그녀의 속을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