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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35)화 (35/100)

35화

와장창,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평면도를 보며 범인이 도주했을 법한 경로를 살피던 세완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아주 오래전, 그들을 가르쳤던 훈련 교관이 그랬다. 만약 아군에게 나의 위치를 알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일단 소란을 피우고 보라고.

소란을 피우기 전에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끄럽고 어수선한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란이 있는 곳에 가면 이은이 있든, 아니면 사라졌던 공범이 있든, 이도 저도 아니면 사건과 관련한 단서가 있든 뭐라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세완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 * *

가까스로 환기 구멍 같은 창문을 빠져나온 이은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세완의 반지와 시계 때문에 갈등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제 몸의 안전을 택했다. 그래서 창문을 통해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문제는 그때 또 누군가 그곳에 들이닥쳤다는 것에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자세히 들은 것은 딱 그 단어밖에 없었다.

그 불청객은 범인들 입장에서도 불청객이었는지 세 사람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고성이 오갔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하이톤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꽤 익숙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 이은에게는 범인을 짐작하는 것보다 탈출이 먼저였다.

방 안에 있는 잡다한 가구를 끌어 모아 그 위에 올라섰다.

환기 구멍 같다고 했더니 정말 높이도 환기 구멍과 별 차이가 없는 창문은 그 높이도 문제지만 그 속에 몸을 끼워 맞추는 것도 문제였다.

이은이 겨우 창문을 열고, 그 밖으로 하반신을 빼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저년이……!”

범인들 중 한 명으로 보였다.

쌍욕을 한 남자가 그녀를 저지할 것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은은 기겁해서 창문을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렸다.

“작대기, 작대기 가 온나! 지금 저년이 도망가려고 안 카나! (작대기, 작대기 가져와! 지금 저년이 도망가려고 하잖아!)”

거친 말을 내뱉은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몸이 쓸리거나 말거나 이은은 어거지로 창문에 몸을 구겨 넣어 빠져나가려고 했다. 불행히도 어깨가 창틀에 걸렸고, 남자의 손이 이은의 팔을 스쳤다.

남자는 이은을 잡으려고 했고, 이은은 어깨가 창틀에 낀 채로 어떻게든 그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버둥댔다.

하지만 창틀에 끼어 있어 귀에 양팔이 딱 붙어 있는 이은은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았고, 이은을 잡으려고 하는 남자는 그녀의 팔의 위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상태였다.

이은은 결국 남자에게 팔목을 잡혔다. 남자는 창문으로 빠져나가려는 이은을 다시 집 안으로 끌고 오기 위해 그녀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이은은 다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뭔가 둔탁한 것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때를 함께 하여 누군가 그녀의 양다리를 잡고 아래로 쑥 잡아당겼다.

“꺄아악!”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리고 그 직후,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놔! 놓으란 말이야. 놔!”

이은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쳤다.

죽기밖에 더 하겠냐며 자포자기로 늘어져 있던 것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이은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잡고 있는 사람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은…… ……아! 김…… 은!”

아득히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빗물과 눈물이 엉켜 이은의 얼굴이 축축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누군가 그녀의 뺨을 때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은아! 이은아, 나야! 김이은!”

낯익은 목소리가 귀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이은아, 나 세완이라고!”

“……!”

배운 것은 다 어쨌는지 눈을 꽉 감고 버둥거리기만 하던 이은의 행동이 순간 멈췄다. 이은이 눈을 떴다. 이은의 눈앞에 세완이 있었다.

그녀를 걱정하는 눈빛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세완이야?”

“정신이 좀 들어?”

세완이 이은에게 질문했다. 이은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야, 이 나쁜 놈아!”

이은이 마구잡이로 세완을 때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이은아, 아야! 아파!”

세완이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은은 울며 그를 때리기만 할 뿐이었다.

잔뜩 겁먹었던 상황에서 만난 유일한 의지처는 그녀의 원망도 함께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은은 울며 세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세완은 이내 눈치를 채고 이은을 그저 안아 주었다.

“괜찮아. 미안해. 늦어서 미안. 괜찮아.”

특별한 무엇인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녀를 안아 주었고, 동시에 괜찮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런데 그 말이 이은을 무척이나 안심시켰다.

잔뜩 긴장하고 흥분했던 이은의 감정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석화되어 있던 그녀의 뇌가 잠에서 깨어났다.

세완을 만나 안심한 나머지 바보처럼 울어 버렸지만 지금 그들은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범인은 총 세 명이고, 그들은 둘이었다.

범인들은 건장한 남자가 둘이나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아까는 우느라 몰랐는데 창문을 빠져나오면서 어깨가 탈골되기라도 한 것인지 팔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세완이 그녀를 찾아 준 것은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세완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세완아, 도망! 우리 도망가야 해!”

세완의 품에 안긴 이은이 다급하게 말했다.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서는 어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자며 호들갑을 떠는 이은의 모습에 세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세완의 모습에 이은이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저 안에 범인들이 있어. 빨리, 응? 빨리 도망가자! 세 명이나 있단 말이야.”

그녀의 말을 들은 세완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이은은 서둘러 도망가자고 했고, 세완은 감히 그의 손에서 이은을 빼돌렸던 납치범들이 과연 누구인지 그 상판을 구경하고자 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아니었다.

세완은 이은의 닦달에도 불구하고 잠시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세완이 기다렸던 그 누군가는 숫자 열을 세기도 전에 그들 옆에 도착했다.

“어?”

윤세는 이은을 보며 놀랐고, 이은도 윤세를 보며 놀랐다.

윤세가 그녀를 납치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나 싶어 이은의 몸이 잔뜩 긴장되었다. 그것을 알아챈 세완이 이은에게 윤세에 대해 설명했다.

“할아버님이 보내셨대.”

“……?”

이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세완이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이은이 질문했다.

“회장님이 우리가 여기에 온 걸 어떻게 아시고?”

거기까지는 세완도 모르겠다.

이은이 사라졌다는 것에 분노한 나머지 시큐리티에 특수팀을 섬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인원이 얼마 없는 유인도인지라 업무 시간이 지나면 당직 경찰 한 명만 섬에 상주하고 있고, 폭풍 때문에 배도 띄울 수 없다고 하니 그가 떠올려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존재는 이 회장이 전부였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으로 이 회장에게 연락을 했는데 이 회장의 대답이 의외였다. 그쪽에 특수팀이 한 명 있으니 도움을 구하라는 것이었다.

백희경과 이 섬의 존재는 그도 포항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인데 너구리같은 그의 조부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이 섬에 제 사람을 먼저 보내 놨는지를 모르겠다.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 이 회장이 이미 백희경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인데…….

‘서울에 올라가서 해커부터 고용해야겠어.’

세완이 다짐했다.

이은이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고 길길이 날뛰던 것을 생각하면 백희경이 이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점은 몰랐던 것 같지만 어쨌든 이 회장에게 그만 알고 있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세완이 생각한 것을 이은도 떠올린 듯했다.

“서운해하실까 봐 말을 안 했었는데 숨길 필요도 없었던 거네.”

말 그대로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며 이은이 허탈하고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세완은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아. 내가 다 훔쳐다 줄게.”

국내 제일의 해커를 고용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직접 이 회장과 담판을 지어서라도 그의 컴퓨터를 털어다 주겠다며 세완이 장담했다.

자신만 믿으라는 세완의 말에 이은은 좋아해야 할지 해커고용은 불법이라고 법리교육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그녀도 입을 다물기로 했다.

“중요한 거면 회장님은 바로 프린트해서 안방 금고에 넣어 놓으시더라. 얼핏 봤는데 금고 번호가 네 생일이더라.”

이은은 혹시라도 세완이 잊었을까 봐 중요한 것을 한 번 더 읊어 줬다.

이 모든 것은 근묵자흑, 이세완이라는 속 검은 존재를 가까이해서 그녀 또한 검어진 탓이다.

융통성 있게 법령과 규범에 대한 질서를 잠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그녀를 보며 세완이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윤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말하는 할아버지가 BS그룹의 회장이라는 것은 대충 알겠다. 하지만 BS그룹이 어느 집 똥개 집 주소도 아니고 BS그룹 회장의 컴퓨터를 해킹하겠다고 하는 손자나, 회장의 금고를 언급하는 그 손자의 여자나 두 사람 모두 참 대단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이은을 옆에 둔 세완의 변화였다.

날카로워서 사람 하나는 충분히 죽이고도 남을 것 같았던 남자가 이은을 품에 안은 것 하나로 그 날카로움이 사라졌다.

날카롭다 못해 독살스럽던 남자가 유하고 부드러워졌다.

말이 좋아 유하고 부드러운 것이지 솔직하게 말하면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모자라 보이기까지 했다.

사람이 잠깐 사이에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어 윤세는 간만에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멍하니 서 있는 윤세에게 세완이 지시를 내렸다.

“안에 범인이 있다고 합니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혼자서 가능하죠?”

가능하지 못하더라도 가능하게 만들라는 의도가 진하게 배어 있는 질문이었다.

세완이 그에게 전달한 평면도에 의하면 건물의 현관은 하나였다. 그리고 그 현관에서는 아직 아무도 빠져나오지 않았다.

윤세가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은과 대화를 하면서도 내내 건물의 현관이 있는 곳을 눈으로 훑고 있었던 세완은 바로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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