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본사의 1팀 출발 예정! 이 상무에게 협조할 것!
상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본사의 연락에 복종했다. 연락을 받은 뒤에도 한참의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어쨌든 윤세는 소원을 설득해 본채로 이동했다.
하지만 윤세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그가 이곳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본채의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제 엄마가 사라진 일로 내내 울고 있던 소원도 집의 상태를 본 뒤 혼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저, 아니, 아……. 하!”
말문이 막힌 소원이 집을 가리키며 입을 벙긋벙긋거렸다.
윤세는 혹시 고용주의 손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빠르게 본채로 달려갔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널브러진 에어컨 실외기와 분리된 휴대용 낚시 의자, 그리고 분노한 세완을 발견했다.
다행히 고용주의 손자에게는 큰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있어야 할 사람이 안 보였다.
“……그 아가씨는 어디에 갔습니까?”
윤세가 질문했다.
그의 질문을 들은 세완이 죽일 듯 뜨거운 시선으로 윤세를 노려보았다.
흠칫한 윤세에게 세완이 반문했다.
“그 계집앤 어디에 있습니까?”
소원을 말하는 것 같았다.
소원이라면 바로 그와 함께 본채로 돌아왔지만 세완에게 소원의 행방을 이야기했다가는 살인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완의 눈빛은 그 정도로 열렬했다.
난감한 표정을 지은 윤세가 할 말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세상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우리 집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윤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소원이 그의 옆에 도착했다.
내내 정신이 나가 있던 소녀는 잔뜩 망가진 집을 보고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꺄아악, 돌고래처럼 비명을 지으며 세완을 타박했다.
입매를 비튼 세완이 성큼성큼 걸어 소원 앞에 섰다. 멱살을 잡을 듯 소원 가까이에 선 세완이 위압적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네 아빠 어디에 있어?”
“왜, 왜요?”
소원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불어. 수틀리면 이 집구석 전부 다 부숴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이은과 있을 때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허허실실로 굴던 사내가 눈이 뒤집혀서 날뛰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윤세는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이은이 실종되었으며 그에 소원의 부모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세완의 마음이야 백 번 이해를 하지만 소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 불과했다.
엄마가 사라져서 놀라고 당황한 것은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윤세는 일단 세완을 진정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저기, 좀 진정하시고…….”
소원과 세완을 분리시키기 위해 윤세가 그들 사이에 팔을 집어넣었다.
그는 맹세코,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을 생각밖에 없었다. 그가 보기에 세완은 지나치게 흥분해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윤세의 시야가 뒤집혔다. 세완이 그의 팔을 잡아 뒤로 꺾어 버린 것이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거든. 그쪽, 정체가 뭐야?”
자신에게 여유가 없어서 그런다며 양해를 요청하는 세완의 모습에서 칼날처럼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세완은 지금 빈손인데 그의 기세만 보면 당장이라도 윤세의 목에 칼이라도 꽂아 넣을 것만 같았다.
원치 않게 허리가 굽혀진 윤세는 세완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고용주의 손자인 부잣집 도련님은 보이는 것처럼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견갑골까지 팔을 꺾어 관절의 한계까지 비튼 솜씨는 누가 봐도 초심자가 아니었다.
특전사나 특수부대 혹은 그들 같은 사람이 하는 방법으로 세완은 윤세를 제압했다. 몇 차례 몸을 들썩인 윤세가 한숨과 함께 제 입장을 변론했다.
“저는 그쪽을 도와드린 죄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얘기했잖아. 양해 부탁한다고. 어디 소속이야? 일반인은 아닌 것 같고.”
그러나 잔뜩 예의를 차린 그와 달리 세완은 고압적이기 그지없었다.
이성의 일부가 날아간 것인지, 아니면 그 이성이 지나치게 활성화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세완이 이은과 함께 있던 세완과는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아저씨 풀어 줘요!”
소원이 소리를 지르며 세완에게 매달렸지만 그는 소원을 거칠게 뿌리쳤다. 세완은 바닥에 쓰러진 소원은 아랑곳 않고 윤세만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윤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사에서 연락이 내려왔을 때부터 그에게 정체를 밝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세완의 이런 모습이 윤세를 심술궂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불뚝거리는 마음을 사그라뜨렸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세완이었어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윤세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비틀린 심술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명색이 특수요원인데 일반인에게 몸을 제압당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내 정체라…….”
윤세가 피식 웃으며 말꼬리를 늘였다.
세완이 윤세의 말을 기다렸다. 그 찰나에 세완의 힘이 아주 약간 약해졌다. 윤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윤세가 발을 굴러 꺾인 팔과 같은 방향으로 허공에서 한 바퀴 몸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윤세의 팔을 놓친 세완이 서둘러 다시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윤세는 더 이상 세완에게 방심하지 않았다.
세완에게서 벗어난 윤세가 본능적으로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꺾여 있던 어깨의 관절을 한 번 풀어줬다.
어지간히도 독하게 비틀었다며 혀를 내두른 윤세가 무표정한 얼굴의 세완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세완은 다시 윤세를 제압하려는 듯 그를 예리하게 훑었다. 그 살벌함에 윤세는 더는 장난을 쳐서는 안 되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윤세가 장난기를 지웠다. 자세를 바로 한 그가 세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인사하죠. 본사에서 나왔습니다. BS그룹 시큐리티 특수1팀 이윤세입니다.”
여차하면 윤세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던 세완은 BS그룹 시큐리티 특수1팀 소속이라는 이야기에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윤세의 손을 마주 잡지는 않았다. 윤세는 멋쩍은 표정으로 내밀었던 손을 다시 회수했다.
긴장은 풀었지만 놀란 것 같지 않은 세완의 모습에 윤세가 질문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연락을 받았으니까요. 대충 짐작은 했습니다.”
조부 회사의 직원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렇게 거칠게 대했느냐는 생각에 쌍욕이 윤세의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이은의 실종으로 인해 지극히 예민해진 세완이 모습이 그를 자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윤세가 질문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놀랐다. 멀쩡하던 유리창은 다 깨져 있고, 에어컨 실외기에 휴대용 낚시 의자가 던져져 있어 온 집 안이 난장판이었다.
세완이 다쳤거나 조금만 더 흐트러져 있었어도 누군가의 습격이 있었을 거라고 믿었을 정도였다.
그의 질문이 아픈 구석을 상기시킨 듯 세완이 이를 갈며 말했다.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와 보니 이은인 없었고요.”
밖으로 도주한 줄 알았던 범인이 다시 와서 데려간 것일 수도 있고, 공범이 있었을 수도 있다며 세완이 소원과 윤세가 자리를 비운 이후의 상황을 설명했다.
윤세가 턱을 손으로 훑었다. 범인이 어디로 도주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범인이 현관으로 나가는 모습만큼은 분명히 보았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을 텐데…….
만약 공범이 있다면 백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전, 범인이 이은을 인질로 잡고 있었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근처에 공범이 없는 것 같았다.
소원의 어머니가 사라진 정황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은의 실종 또한 미스터리였다.
- RRR
그때 세완의 핸드폰이 울렸다. 말없이 메시지를 확인한 세완이 윤세에게 그의 핸드폰 번호를 물었다.
“공일공 칠사육오에…….”
윤세는 자신도 모르게 번호를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아무런 설명 없이 첨부되어 있는 설계도 같은 사진을 확인한 윤세가 의아한 눈으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세완이 말했다.
“평면도입니다. 없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요. 평면도에 나와 있는 곳은 물론이고, 구청에 신고하지 않고 공사한 곳이 있을 수도 있으니 꼼꼼하게 확인하셔야 할 겁니다. 왼쪽은 그쪽이 확인해요. 오른쪽은 내가 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세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채를 나섰다. 윤세는 드물게 멍청한 모습으로 그런 세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존칭형 보조사만 붙였지 처음부터 끝까지 강압적이기 그지없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 강압적인 지시보다 더 윤세를 놀라게 한 것은 세완이 건넨 평면도였다.
물론 평면도야 건축물대장이나 등기부등본처럼 주소만 알고 있으면 온라인이나 주민센터, 혹은 구청에서 얼마든지 뗄 수 있는 것이긴 했다.
문제는 발급받는 자격이 문제다. 건축물의 소유자이거나, 건축물과 관련되어 있는 이해관계인, 그리고 그 위임자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이 시간에, 그것도 사건이 벌어진 이 짧은 시간 안에, 심지어 자격도 없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평면도를 발급받았을지가 윤세는 의문이었다.
이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 출신인 자신들도 불가능했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 절대 합법적인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귀하신 도련님이 생각보다 많이 거친 분이셨다는 것을 깨달은 윤세가 남몰래 혀를 내둘렀다.
한량에 백수, 회사의 미래가 걱정될 정도로 영 쓸모가 없는 위인이라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정말 의외였다.
이은과 있을 때와, 그녀가 없을 때의 모습의 차이도 놀라웠다.
세완의 본모습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윤세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다.
“당신들 뭐야? 도대체…….”
소원의 중얼거림이 슬쩍 귓가에 스치긴 했지만 윤세에게 소원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
쓸데없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많아 이 시대의 비단길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사 라이센스까지 집어던지고 시큐리티 특수1팀이라는 위험한 직업을 택한 윤세다. 윤세의 마음 한편에 세완이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밖에서 빗소리를 뚫고 희미하게 와장창,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소원과 윤세의 눈이 동시에 현관문을 향했다.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 집은 어째 조용할 날이 없다.
잘해야 두어 시간 정도 있었을 뿐인데 몇 달은 된 것 같은 지긋지긋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밖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들은 윤세도 그 진실이 궁금했다.
일단 밖에 나가면 저 소리가 누구로 인한 것인지 알게 되겠지!
윤세가 밖으로 뛰듯이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