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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33)화 (33/100)

33화

그렇게 아니길 빌었는데 그녀를 노린 것은 백희경과 그녀의 재혼한 남편이 맞나보다.

이미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지만 이은은 정말 아니길 바랐다.

이제 유일한 바람은 백희경이 그녀의 친엄마만 아니면 좋겠다는 것이긴 했지만 사실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긴 하다.

친모가 맞는다면 친엄마에게 살해된 딸이 되는 거고, 친모가 아니라면 친모 사칭범에게 살해된 피해자가 되는 건데…….

이래저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 상황인지라 이은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자라다 이제는 납치당해 죽을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도대체 무슨 놈의 팔자가 이러나 싶어 웃음만 나왔다.

타고난 팔자가 박복하면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든다던 초등학생 때 같은 반 아이 어머니의 말이 생각난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고아 계집애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싫어서 그리 말했을 터이지만 이은은 그 말이 심장에 박혀 그 어느 누구와도 가까이 지낼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면서도 내심 신경을 썼는데 지금 보니 영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나 보다.

이은의 얼굴이 허탈해졌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부분은 세완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세완까지 이 상황에 끌어들였다면 이은은 죽어서도 이 회장에게 고개를 못 들 뻔했다.

‘근데 없는 것 맞지?’

이은은 순간 불안해졌다.

세완이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간 뒤에 머리를 얻어맞았으니 세완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범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를 노린다면 아무도 없을 때 노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연한 사실이 이은은 조금 불안했다.

그녀 혼자라면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목숨이지만 세완이 함께 있다면 그건 사정이 조금 달랐다.

자포자기한 것처럼 늘어져 있던 이은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완이 그녀처럼 기절해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이은이 몸을 버둥거려 주변을 살폈다.

팔다리를 묶어놓긴 했지만 그녀의 몸을 어딘가에 고정시켜놓은 것은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이은이 조심스레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세완은 안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세완 같아 보이는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불빛이 보였다.

미처 몰랐는데 그녀는 방 같은 곳에 던져져 있는 모양이다.

이은은 꿈틀대며 바닥을 기어 빛이 있는 곳을 향해 전진했다.

납치되었을 때는 얌전히 범인의 말을 따르다가 기회를 노리라 했던 경호원과 특수부대 출신 훈련 교관들의 말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위급상황이었다. 이은은 그들의 지침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방문 근처로 다가간 이은은 혹시라도 밖에서 그녀가 보이지 않도록 벽에 몸을 붙였다. 그리고 살그머니 몸을 기울여 문밖의 상황을 살폈다.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는 한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은이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쾅,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이은이 숨을 죽이고 문밖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대화가 시작되었다.

“와 이리 늦었노?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타. 돌아오느라 좀 늦읐다. (미안. 들키지 않게 돌아서 오느라 좀 늦었다.)”

남자의 물음에 또 다른 남자가 답했다.

한 명이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두 명이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은이 지금 상대해야 할 사람이 남자 두 명 이상이라는 것은 알겠다.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납치당해 살해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녀를 죽여 봤자 나오는 것도 얼마 없는데 무슨 범인이 이렇게 많나 싶었다.

여기에 백희경까지 추가하면 범인만 세 명이다.

백희경이 그녀를 두고 ‘성공한 딸’이라고 했다더니 정말 그녀가 성공해서 돈이 많은 줄 아나 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은행의 지분이 절반 이상인 마포의 오피스텔 하나였다.

번역이며 과외 등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음에도 워낙에 밑천이 없다 보니 그녀가 가진 것은 세완이나 그 지인들에 비해 소박하다 못해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오피스텔을 제외한 그녀의 재산은 딱 2천만 원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직접 현금으로 뽑아서 포항에 들고 왔다.

그러니까 이은이 백희경에게 주려고 했던 2천만 원은 그녀가 현금화할 수 있는 전 재산이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돈은 지금 세완의 차 안에 있다.

이세완의 성격상 그녀가 만약 죽는다면 그는 그 돈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버렸지 절대 백희경과 그 가족에게 건네주지 않을 거다.

회사 일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서 부실하고 허술한 세완이지만 그것만큼은 의심의 여지 없이 신뢰할 수 있었다.

악착같이, 무슨 수를 써서든 백희경에게 그녀의 재산이 넘어가는 것을 저지할 세완을 떠올린 이은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피스텔과 2천만 원, 그리고 그녀가 가입해놓은 보험의 사망보험금!

그녀가 죽게 되면 나올 수 있는 돈은 크게 그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단 2천만 원은 세완의 손에 있으니 백희경 측에 넘어갈 리 만무했다.

남은 것은 오피스텔과 보험금인데 그 두 가지는 백희경 측이 그녀와 혈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받을 수 있었다.

백희경이 그녀의 친모가 아니라면 무슨 수를 써도 그 돈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고, 만약 그녀의 친모라도 해도 아마 돈을 상속받기는 어려울 거다.

친모라는 사실을 밝히게 되면 세완은 가장 먼저 백희경의 보험금 사기를 세상에 알릴 거다. 그리고 이은의 죽음과 백희경 측의 수상함을 어떻게든 엮어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낼 거다.

대한민국 민법 제1004조에 따르자면 고의로 직계존속, 피상속인, 그 배우자 또는 상속의 선순위나 동순위에 있는 자를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한 자는 상속을 받지 못한다.

물론 백희경이나 그 딸 중 누군가는 그녀의 납치, 죽음과 무고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제아무리 무고하다고 한들 이은은 그녀의 재산이 저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고작 피 몇 방울이 섞였다는 이유로 그녀와 단 한 푼어치의 감정적 교류도 없는 이에게 유산을 넘기고 싶지 않다.

만약 남긴다면 그 대상은 이 회장이거나 세완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잠시 머물렀던 보육원의 아이들이어야 한다.

오갈 데 없고 기댈 곳 없어 마음이 시린, 과거의 이은과 비슷한 아이들이라면 이은은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을 다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백희경의 가족이 그 대상이라면 이은은 절대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감안하면 세완은 무척이나 믿음직한 존재였다. 동시에 세완의 친구인 찬주 또한 그랬다.

캐쉬 관련으로 제3금융권에 종사하는 집안 출신인 찬주는 직업 특성상 어둠의 분야와도 관련이 짙었다.

사기, 도박, 위조……. 원하는 것은 뭐든 말만 하라며 엄지와 검지를 쓱쓱 비비며 싱긋 웃던 찬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찬주의 그런 부분 때문에 세완이 그와 가까이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이번만큼은 찬주의 그런 일면까지 기꺼웠다.

만약 찬주라면 이은이 이 회장에게 빚을 졌다는 차용증까지 위조할 수 있을 거다.

혈육이 그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호구가 될 생각이 없는 이은은 그녀의 갈까마귀 같은 친구들이 매우 믿음직스러웠다.

사후에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니 이은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를 죽인 사람들에게 그녀의 피 같은 돈이 넘어가는 일만 없으면 된다.

그렇게 이은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한 남자가 고성을 질렀다.

“그름 으야노?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데?)”

이은은 깜짝 놀라 상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남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내만 돈 필요하나? 자네도 필요하다 안 캤나. 여서 그만두면 으얄라꼬? (나만 돈 필요해? 자네도 돈이 필요하잖아. 여기에서 그만두면 어떻게 할 건데?)”

“소원 아부지요! 우리 걍 여서 그만둡소. 이, 이, 여 보소. 이그라도 팔믄 돈이 좀 될끼라. (소원이 아버지! 우리 차라리 여기에서 그만둡시다. 이거, 이거, 이걸 좀 보게. 이것만 팔아도 돈이 될 거 같소.)”

내분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막상 그녀를 죽이려니 겁이 난 사람과, 계획대로 일을 밀고 나가자는 사람 간에.

이은은 숨죽이고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 모꼬? (이게, 뭔데?)”

“그노마가 준 거 아인교. 거 두 짝이 6억이 늠는다 카네. (그놈이 준 거 아닙니까. 그것 두 개가 6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세완이 넘긴 시계와 반지에 대한 이야기인가 보다.

“진짜가? (정말이야?)”

“거 시계가 파, 파, 파 뭐시기라고 하든디, 핸드폰으로 찾아 보니 젤 하짜바리가 몇천만 원이라고 하드라고. (거기 시계가 파…… 뭐라고 하던데, 거기 글자를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까 제일 싼 게 몇천만 원이라고 하더라고.)”

“참말이가?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도대체 어서 도이 나서……. (정말이야? 젊은 놈이 도대체 어디에서 돈이 나와서…….)”

그들은 수군대며 세완의 재산을 가늠했다.

“그란 놈이 와 저런 가스나를 따라다니는 기가? (그런 놈이 왜 저런 계집애를 따라다녀?)”

“바깥에 있는 차도 그노마 건 거 같드라고. (밖에 있는 차도 그놈 것인 것 같더라고.)”

“……을마나 내놓을 기 같노? 1억? 2억? (돈을 달라고 하면 얼마나 줄 수 있을까? 1억? 2억?)”

“10억은? 시계랑 반지만 캐도 6억이 넘는다고 카든데. (10억은? 시계와 반지만 해도 6억이 넘는다고 했어.)”

그들은 고깃값 흥정을 하듯 이은을 걸고 받을 수 있는 돈을 계산했다.

이은은 두려움은 둘째 치고 실소가 먼저 새어 나왔다.

그녀의 전 재산을 합쳐도 그 돈의 반도 안 됐다. 그것은 그녀의 몸값을 합쳐도 마찬가지였다.

간, 신장, 콩팥, 심장, 안구……. 온몸의 장기를 내다 팔아도 저 돈의 10분의 1이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10억? 그게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돈 때문에 평생 전전긍긍댔던 고아 출신 직장인은 그녀를 팔아 돈을 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크게 분노했다.

두 남자는 세완이 얼마까지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토론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은은 삶에 대한 의지와 투지를 되살렸다.

이은은 묶여 있는 자신의 손을 살짝 비틀어보았다. 노끈 같은 것으로 묶은 것은 아니고 청테이프로 둘둘 감아놓은 듯했다.

이 회장은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해 하나뿐인 손자에게 탈출 훈련을 시켰고, 세완 옆에 항상 붙어 있었던 이은도 그 훈련을 함께 받았다.

타고난 몸치인지라 세완처럼 칭찬은 못 받았지만 이은도 평균 이상의 실력은 됐다.

이은은 꿈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묶인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이은이 양쪽으로 손을 벌린 뒤, 그것을 배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허리 위로 팔이 이동하는 순간, 순간적인 힘에 의해 테이프가 끊겼다.

힘이 아닌 요령인데 이것을 왜 못하느냐며 수도 없이 많은 구박을 받아가며 배운 강습이 효과가 있었다.

팔이 자유를 되찾으니,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이은은 양발을 묶어 놓은 테이프도 직접 제거했다.

이은이 탈출을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범인들은 계속해서 그녀의 몸값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은은 힐끗힐끗 범인들의 동향을 살피며 그녀가 있는 공간을 파악했다.

아까는 미처 몰랐는데 그녀가 있던 벽면 반대쪽 벽에 작은 환풍용 창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많이 좁아 보이긴 했지만 잘하면 그곳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은이 갈등 어린 눈으로 범인들이 있는 문 너머와,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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