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범인이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세완은 때를 놓치지 않고 범인에게서 이은을 빼돌렸다.
미리 합을 맞춰 본 적도 없고, 사전에 알던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 능수능란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범인은 재차 이은에게 덤벼들려고 했지만 남자와 세완이 그를 막았다.
세완은 칼을 들고 있는 범인의 손목을 손날로 내리쳤고, 남자는 범인이 칼을 놓치기 무섭게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범인의 몸이 공처럼 허공을 날았다.
세완과 남자는 몸의 중심을 낮추고 범인의 2차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주춤, 몸을 일으킨 범인은 분한 듯 잠시 시근덕거리더니 세완과 남자, 이은이 있는 방향이 아니라 밖으로 튀어 나갔다.
남자와 세완의 눈이 부딪쳤다. 밖을 향해 눈짓하는 남자에게 세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즉시 범인을 쫓아 문밖으로 나갔고, 세완은 이은과 남자 사이에서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하나 잠깐 갈등했다.
그때 이은이 가쁜 숨을 내쉬며 자신은 괜찮으니 어서 범인을 쫓아가라고 손짓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세완은 서둘러 남자의 뒤를 쫓았다. 세완이 날듯이 뛰어가 현관문을 통과했다.
비는 억수같이 내렸다. 비가 세완을 적셨다.
세완은 남자와 범인을 찾아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런데 범인은 온데간데없이 남자만 마당에 서 있었다.
세완이 남자에게 다가가며 질문했다.
“범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놓쳤습니다. 제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사라진 이후였습니다.”
범인과 남자가 밖으로 나간 시간이 불과 몇 초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세완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남자가 마당으로 나왔을 때 범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범인에게 이곳이 낯선 공간이 아니라는 것, 바로 그것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에서 경기하면 이득을 본다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운동경기뿐만 아니라 범죄에도 적용이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남자가 고의로 범인의 도주를 눈감아주었다고 봐야 하는데 그 가설이 성립되기에는 이은이 인질로 잡혀 있던 상황에서 남자가 준 도움이 너무 컸다.
아차, 싶은 세완이 다시 본채로 몸을 돌렸다.
현장에서 몸을 피한 범인은 보통 그대로 도주를 하는데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건 바로 피해자가 혼자 있는 경우이다. 그 경우 범인은 피해자에게 접근해 다시 범행을 시도한다.
묻지 마 범죄가 아니고, 목적과 범행 대상이 명확할 때 그런 측면이 두드러진다.
세완과 남자는 다급하게 다시 본채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도와 주세요!”
바지랑대와 별채 사이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다. 소원이었다.
눈물범벅이 된 소원이 세완과 남자에게 뛰어왔다. 세완과 남자가 멈칫했다.
“살려 주세요. 도와 주세요. 엄마가, 엄마가 다쳤어요!”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소원의 손과 옷자락은 붉은색 피로 물들어 있었다.
분명히 백희경이 제 남편과 공모해서 이은에게 해코지를 하려 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런 반전에 세완과 남자는 당황했다.
그러나 이 또한 백희경과 그 남편 그리고 소원의 수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세완은 소원을 무시했다. 남자도 세완의 뒤를 쫓았다.
“우리 엄마 다쳤다니까요!”
소원은 막무가내로 다가와 그들의 팔을 잡고 별채 쪽으로 이끌려고 했다.
세완에게 뿌리쳐진 소원은 다급한 모습으로 전직 의사였다는 남자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 모습이 연기라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남자는 당황해서 세완을 보았다.
남자가 범인과 공범이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세완은 아직 그를 완전히 믿지 못 헸다.
소원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완으로서는 수상한 두 사람이 제발 함께 사라져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무시했다.
세완의 관심사는 이은의 안전밖에 없었다. 세완은 서둘러 본채로 다가가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
문이 잠겼다.
그는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문은 혼자서 알아서 닫혔고, 또 잠겼다.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디지털 도어락이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가 본 본채의 잠금장치는 열쇠를 사용해야 하는 종류였다. 세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은아! 김이은, 괜찮아? 이은아, 들려?”
세완이 문을 흔들며 이은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거실 창문을 통해 안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집 안의 불이 꺼져있는 데다 창문까지 어둡게 코팅되어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문 세완이 소원을 부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소원과 남자는 이미 별채 가까이 도착해 있었다.
빗소리 때문인지 그들은 세완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다.
바지랑대 아래를 지나가는 그들을 본 세완은 소원을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어차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들을 데리러 가는 시간조차 그는 아깝고 아쉬웠다.
주변을 살핀 세완이 그물을 손질하며 사용한 것 같은 휴대용 낚시 의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거실의 커다란 창문을 향해 의자를 내리쳤다.
하지만 몇 차례나 반복했음에도 낚시 의자로는 창이 깨지지 않았다. 세완은 벽면 모서리에 있던 실외기를 들어 창문으로 집어 던졌다.
다행히 유리창이 깨졌다. 세완은 서둘러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은아!”
그는 목청 높여 이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소원과 함께 그녀의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던 곳으로 간 남자는 곧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피를 흘린 흔적은 있는데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당황했고, 소원은 더 당황했다.
“어떡해, 우리 엄마……. 엄마, 어디 갔지?”
소원은 발을 동동거리며 엄마를 찾았다.
깨진 장독대 파편이 흩어진 근처나, 바닥에 흥건한 핏물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소원은 엄마를 찾았다. 소원은 급기야 남자에게까지 물었다.
“아저씨, 우리 엄마 어디 갔어요? 좀 찾아주세요. 네?”
그가 알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원은 남자에게 매달렸다. 남자의 얼굴이 낭패로 젖어 들었다.
남자, 그러니까 윤세는 점입가경으로 흐르는 상황에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려운 것은 아니고, 주변을 서성이다가 필요해 보이면 약간의 도움만 주면 된다고 하시네. 은근슬쩍 두 사람을 붙여 놓으면 더 좋고.」
잘하면 특별 보너스 겸 추가 수당도 지급할 수 있다던 고용주의 제안에 슬렁슬렁 가볍게 접근한 것인데 다른 의미로 추가 수당을 요청하게 생겼다.
윤세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피를 만져 봤다. 이건 진짜 피다.
빗물 때문에 정확한 양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됐다.
심지어 소원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엄마는 머리를 다쳤다고 했다.
“머리에서 이 정도 피가 흘렀으면…….”
윤세가 부상의 정도를 가늠했다.
빈말이라도 가볍게 다쳤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인데 부상자가 사라졌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윤세가 소원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정신을 못 차린 것 맞아?”
“네. 제가 계속 흔들어서 깨웠는데도 엄마가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이에요.”
“…….”
“진짜예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계셨어요.”
소원은 윤세가 자신의 말을 못 믿는 것 같자 직접 봤다며 제가 본 것을 연거푸 설명했다.
“엄마가 여기에 이렇게 쓰러져 있었어요.”
소원은 기형적으로 꺾인 팔다리의 형태까지 직접 구현했다.
그녀가 묘사하는 모습은 불시에 습격을 받아 쓰러진 사람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것만 보면 거짓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후우.”
답답한 마음에 윤세는 저도 모르게 긴 숨을 토했다.
피의 양만 보면 절대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부상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사라졌다.
빗물에 섞인 피의 농도만 보면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은 맞다.
그러면 부상자를 누군가 이동을 시켰다고 봐야 하는데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가 관건이다.
무슨 의도로도? 왜? 무엇 때문에!
그럴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그게 가능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알기로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셋이다. 소원과 그의 부모.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조금 전 이은을 납치하려고 했던 범인이 소원의 아버지인 모양인데 그 사람은 이미 어딘가로 도주했다.
그가 소원의 어머니를 옮겼으리라는 가정도 해 볼 순 있지만 시간적·공간적으로 그건 무리였다.
그때 범인은 윤세가 나왔을 때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소원의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고 추정되는 별채는 그들이 나온 본채에서 꽤 떨어져 있어 그곳으로 도주하는 일은 육상 단거리 국가대표라고 해도 무리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골치 아픈 일에 얽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윤세가 짜증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 RRR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윤세가 놀라 전화를 받으려고 했는데 그 사이 전화가 끊겼다. 대신 메시지가 연달아 들어왔다.
「이 상무에게 합류 후 최대한 협조할 것! 15분 뒤 특수1팀 출발 예정. 대기요함.」
정말이지 딱 본론만 적어서 왔다.
“……이 날씨에 온다고?”
윤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폭풍주의보로 인해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 이 날씨에, 그것도 즉시 출발한단다.
게다가 특수1팀이면 에이스 중의 에이스들이었다. 일반적인 일들은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들 팀 전원이 출발한다니…….
도대체 이 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윤세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 * *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이은이 눈을 떴다.
주변은 깜깜했고, 팔과 다리는 무엇인가로 묶인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입에는 뭘 물려 놓은 것 같았고, 머리에서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통증이 두통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얻어맞아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버둥거리던 이은의 머릿속에 조금 전에 벌어졌던 상황이 떠올랐다. 그녀의 영민한 머리가 반짝였다.
이은이 천천히 기억을 되살렸다.
누군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고, 범인은 그녀를 인질 삼아 세완에게 금품을 뜯어냈다. 그리고 세완과 수상한 남자에게 공격을 당한 범인은 집 밖으로 도주했다.
범인을 뒤쫓아나가는 세완과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이은은 가쁜 숨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도 곧 세완과 남자를 뒤쫓아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그리고 눈을 뜨니 지금이다.
범인이 도주했던 현관은 분명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공격은 그녀의 뒤에서 들어왔다.
그 말은 그녀를 때린 사람이 도주했던 범인 말고 또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엄마인가?’
이은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