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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31)화 (31/100)

31화

정말 이런 상상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의심할 곳이 한 군데밖에 없었다.

갑자기 들린 비명이며, 엄마의 목소리 같다며 뛰쳐나간 소원까지…….

이 모든 것이 잘 짜인 연극 같았다.

이제 이은의 관심사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모친이라는 여자가 공범인지, 아니면 남자 혼자만의 단독 범행인지.

아마 예상컨대 공범일 확률이 높아 보이긴 했다.

제 뒤에 있는 범인의 정체를 가늠해 본 이은의 머릿속에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오지 말 것을…….

지나간 세월에 집착하는 것은 바보라고 수도 없이 읊조렸는데 그것이 자신의 일이 되니 이은도 결국 바보가 되고 만다.

뒤늦게 부모를 찾은 보육원의 수많은 아이들이 그랬듯이 이은은 가슴 깊이 후회했다.

한편 세완과 전직 의사이자 현직 직장인인 남자는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만을 기다렸다. 특히 세완은 어둠에 익숙해져 시야 확보가 되는 즉시 이은을 구하기 위해 움직일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졌을 무렵, 남자의 손을 통해 세완에게 작은 잭나이프가 전달되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손에 들어온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린 세완의 표정이 사뭇 밝아졌다.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남자는 아마 아군 쪽에 좀 더 가까운 모양이다.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은을 붙잡고 있는 범인은 무기를 들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무기를 든 사람에게 맨몸으로 덤비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이은을 위해서라면 그 어리석은 일도 기꺼이 할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기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세완이 잭나이프를 힘주어 잡았다.

옆에 있는 남자처럼 본격적으로 몸 쓰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세완도 일반인과 비교하면 꽤나 여러 가지를 배운 측에 속한다.

갑작스런 사고로 아들 부부를 잃은 이 회장은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손자가 살아남기를 원했다.

백수가 장래희망인 세완도 조부의 유일한 바람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 세완은 정말 눈물 나도록 감사했다.

언제라도 꺼낼 수 있도록 잭나이프를 바지 뒷주머니에 감춘 세완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범인이 움찔했다. 그의 반응을 세세히 살피며 세완이 천천히 그에게 접근했다.

세완이 세 번째 걸음을 뗐을 때 범인이 세완에게 소리쳤다.

“오지 말라카이! (오지 말라니까!)”

소파 뒤에 숨은 범인은 그 이상 가까이 오면 이은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범인을 궁지에 몰아서 생기는 건 인질의 피해밖에 없었다. 세완은 그 자리에 멈춘 채 범인이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범인의 숨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원하는 게 뭡니까?”

“…….”

범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모르긴 몰라도 인질로는 제 쪽이 좀 더 유용할 텐데요? 그쪽이 붙잡고 있는 걔가 사실은 고아나 마찬가지거든요. 내 쪽은 꽤나 돈이 많고.”

“…….”

“밖에 차 보셨죠? 파란색 외제차. 제 겁니다.”

세완이 능글거리며 말했다.

“훔친 기라고 들었는디……. (훔친 거라고 들었는데…….)”

“훔친 게 아니라 빌린 거라고 하긴 했죠. 하지만 세상에 누가 그런 차를 빌려 줍니까? 당연히 산 거지. 농담 한 번 해 봤죠.”

훔쳤다고 말한 것까지 아는 것을 보니 상대의 정체를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세완은 분노했지만 분풀이는 이은을 구한 다음의 일이다. 세완은 분노를 감춘 채 우선 눈앞의 일부터 해결하고자 했다.

감정을 숨긴 세완이 남자를 홀리기 위해 차종부터 시작해서 차 넘버, 연식, 주행거리 그리고 가격대까지 제법 상세한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 보세요. 누가 남의 차의 주행거리까지 기억합니까?”

세완의 의도가 적중한 듯 범인은 꽤나 혹하는 눈치였다. 집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남자는 연신 바깥쪽을 힐끔댔다.

하지만 무언가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의 손발이 되어줄 사람이 없는 듯했다.

단독 범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범인 혼자인 것 같았다.

세완과 이은은 범인에 대한 정보에 현재 그를 도울 수 있는 인력이 없다는 항목을 추가했다.

세완의 현란한 말솜씨에 범인은 잠시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시잘데기 없는 소리는 하지도 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말고!)”

범인의 생각에 그런 부잣집 아들이 이은을 대신해서 인질이 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세완의 성별이 남자라는 점도 그의 경계심이 높아지는 데 일조했다.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인질로 하라는 것을 보니 어디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남자가 인질일 때와 여자가 인질일 때는 드는 품부터가 달랐다. 그런데 남자가 운동을 했다거나, 호신술을 배우기까지 했다면 도리어 그가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계산을 끝낸 범인은 계획대로 이은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범인이 이은의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세완이 재빨리 시계를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범인에게 던졌다.

“파텍 필립. 중고가격만 1억 3천 정도 할 겁니다.”

범인은 자신도 모르게 제 앞에 던져진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파텍 필립을 잘 모르시려나? 그러면 이건 어때요?”

세완이 손에 낀 반지를 빼서 범인에게 던졌다.

“팬시 블루 다이아몬드. 고작 1캐럿이긴 해도 희귀한 제품인지라 꽤나 실속 있죠. 그 반지 하나에 5억이 넘습니다.”

세완이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범인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세완을 힐끔거리다 신속하게 시계와 반지를 챙겼다. 그리고 세완이 던졌던 물건들과 세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범인에게 탐욕이 깃들었다. 얼굴 표정은 잘 안 보였지만 세완은 그것을 느꼈다.

사람은 때때로 눈앞에 보이는 재물 때문에 어리석은 판단을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듯하다.

세완은 범인에게 자신을 인질로 삼으라며 공작새처럼 돈 자랑을 했다. 그리고 그제야 세완이 벌이려는 일을 눈치챈 이은은 몸을 마구 버둥댔다.

세완이 던진 다이아 반지는 세완이 언제나 착용하고 다니는 것으로, 세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교통사고 현장에서 발견한 어머니의 유품을 다시 남성용으로 세공한 것이다.

그를 대책 없는 양아치로 보이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 회장에게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를 들었음에도 빼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그러한 반지를 내놓다니…….

세완은 제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아서라도 이은을 지키고자 했다. 그녀는 분하고 속상하고 미안한 마음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이 배운 바에 의하면 둘 중 누군가 인질로 잡혔을 때 남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끌어야 하는 것은 맞다.

시간을 끌면서 범인의 시선을 다른 한 명에게 집중시켜 놓으면 그들의 경호원들이 범인에게서 그들을 탈출시켜 주는 거다.

그들이 배운 매뉴얼은 그것이 맞다. 하지만 이 섬에 누구도 대동하지 않고 단둘이 들어왔다. 다시 말해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구해 줄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경우에는 한 사람만이라도 어떻게든 몸의 안전을 확보하고, 범인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그녀는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이세완은 배운 것은 다 어디로 까먹은 건지 그녀 대신 자신이 인질이 되려고 하려고 하고 있었다.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으면서까지.

그것은 최후의 순간에 이은이 해야 할 일이지 세완의 몫이 아니었다.

‘저는 여자고, 보시다시피 힘도 별로 없어요. 건장한 남자보다는 제가 인질로 있는 편이 좀 더 움직이기 쉽지 않으시겠어요?’

더부살이 고아는 자신을 받아준 재벌가의 자손을 위해 신체적 안전까지 내놓아야 한다.

그들에게 무술을 가르쳐준 훈련 교관으로부터 이은이 배운 것은 사람의 목숨은 그 값이 모두 다르다는 명제였다.

교관은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덕분에 세완이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 그녀가 뱉어야 하는 대사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저 철딱서니가 진짜!

이은은 잡혀 있는 와중에도 이를 갈았다.

비단 길러준 은혜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야 걱정할 사람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지만 세완에게는 이 회장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세완은 이은만 아니었다면 이런 봉변을 당할 일도 없었다.

이은은 어떻게든 세완을 말리고자 하는 제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몸을 바동댔다.

범인은 시계와 반지에 정신이 팔려있으면서도 이은의 반항은 귀신같이 눈치챘다. 범인은 욕설과 함께 이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

이은의 몸이 반동으로 튀어 올랐다. 범인의 손으로 꽉 틀어막힌 상황에서도 이은의 입에서는 고통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세완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네놈, 내가 정말 가만두나 봐라!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세완은 제발 이은이 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정해진 수신호를 보냈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지금처럼 그들에게 수신호를 가르친 이 회장의 선견지명에 감사한 적이 없었다.

이은의 탈출은 세완의 몫이고, 이은이 할 일은 두뇌게임이라며 세완은 쉴 새 없이 손가락으로 미세하게 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알아챈 것인지 이은의 움직임이 멈췄다.

세완은 안심했다. 그는 범인에게 재차 자신을 인질로 삼으라고 말하며 그를 유혹했다.

범인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래 봬도 명색이 남자 친구인데 여자 친구가 인질로 잡히게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세완은 범인에게 자신이 이은 대신 인질이 되고자 하는 이유를 알려줌으로 제 제안에 별다른 의도가 없음을 내비쳤다.

여자 사람 친구면 몰라도 평생 단 한 순간도 여자 친구, 남자 친구로는 있어 본 적이 없는 그들이지만 세완은 목적을 위해 그들의 관계를 왜곡시켰다.

범인은 연신 갈등했다.

눈앞에 있는 비싸 보이는 시계와 반지가 그의 이성을 둔화시켰다.

세완은 그런 범인을 주시하며 시간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런 세완의 뒤에서 전직 의사이자 현직 직장인인 남자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전직 의사 선생은 세완에게 잭나이프를 넘긴 즉시 범인 쪽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그는 세완이 시간을 끌고 범인을 묶어 놓는 사이 누구보다 은밀하게 범인을 향해 접근했다. 그리고 범인이 방심한 사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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