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는데 문이 열리고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났다. 누가 봐도 공포영화 하이라이트 장면이었다.
이은은 비명을 질렀고, 세완은 자신도 모르게 이은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문 앞에 선 여자가 말했다.
“왜 여기에 있어요?”
이은의 친모라고 주장하는, 백희경의 딸 소원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세완이 따지듯이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여기 우리 집이거든요?”
소원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세완은 말문이 막혔다. 그가 말을 고르고 있는데 이은이 나섰다.
“너희 엄마 어디 계시니?”
“왜요?”
“할 얘기가 좀 있어서.”
“또 협박하게요? 사과할 거 아니면 우리 엄마는 볼 생각도 말아요.”
맹랑하다 못해 되바라진 아이의 대답에 이은은 말문이 막혔다.
“언니가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모르겠어. 근데 우리 엄마도 쉽게 산 건 아니라고요. 우리가 여기에서 사는 거 보면 몰라요? 아빠 때문에 평생 속 끓이면서 사신 분이라고요.”
소원이 불퉁한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소원은 이은을 정말 제 친언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원은 제 엄마에게 모진 언니가 마냥 원망스러운 듯 보였다.
소원이 내뱉는 말의 강도가 점차 강해지자 세완이 제지했다.
“그래서 얘는 편하게 산 걸로 보이냐?”
“뭐,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잘 사는 것 같은데요?”
소원이 눈으로 이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엄마를 만나러 온다고 차려입은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소원의 눈에는 이은이 제법 부자인 것처럼 보였나보다.
이은은 쓴웃음을 지었고, 세완은 딱 열아홉 살다운 이야기에 실소를 뱉었다.
“네 아버지가 어쨌든 너는 네 어머니가 직접 키웠잖아. 얘는 혼자서 자랐어. 일곱 살짜리가 혼자서 잘 살면 얼마나 잘 살았겠냐?”
제 엄마를 끔찍이 여기는 것 같아서, 그래도 자식 앞에서 부모 욕은 안 해야지 했는데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어 세완이 한탄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지금은 잘 살잖아요. 아빠 얘기로는 부잣집에 입양 가서 잘 살았다고 하던데…….”
항변하듯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서 기세가 꺾였다. 저도 제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는 모양이었다.
세완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물질적인 것이야 채워졌겠지만 아마 자라는 내내 이은은 그곳이 옥탑방, 단칸방이라고 해도 친엄마와 함께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가 정말 친엄마인지는 아직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열아홉 살과 실랑이를 하는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문득 문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집 안이 어두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백희경의 남편인가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고…….
세완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이은과 소원도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쪽 분은, 누구시니?”
세완이 대놓고 물었다.
소원은 그제야 자신과 함께 온 남자를 떠올렸는지 그를 향해 반색하며 말했다.
“아, 맞다! 아저씨 죄송해요. 들어오세요.”
또 웬 남자야?
이 섬은 어째 보이는 사람마다 다 수상하다며 세완이 근육을 긴장시켰다.
소원도 낯선 인물이긴 하지만 19세 여자아이와 성인 남자는 그 위험성이 달랐다.
소원의 손짓에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불이 나간 상황이었지만 가까이 오니 그래도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흠!”
“……!”
세완이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은도 그가 누군지 알아본 듯했다.
세완과 이은은 긴장한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저씨, 죄송해요. 제가 이야기를 하느라 바빠서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원만 혼자 해맑은 모습으로 그와 대화했다.
“……저분이 널 데려다주셨나보네?”
“네. 왜요?”
남자에게는 사근사근하던 소원이 이은에게는 반항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세완과 이은이 눈을 마주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서글서글한 태도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또 뵙네요. 반갑습니다.”
대꾸하려는 이은을 저지한 세완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게요. 그렇게 반갑지는 않은 상황이지만 또 뵙네요.”
단순히 악수를 하는 것뿐임에도 세완은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노골적으로 경계를 하는 모습에 남자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곤란한 상황에 나타난 것은 아닌가 싶네요.”
“아니에요. 제가 도와달라고 한 거잖아요. 불이 꺼졌는데, 아저씨? 본채로 가세요. 제가 따뜻한 커피 한 잔 드릴게요.”
남자가 사과를 한 것은 세완과 이은을 향해서인데 소원이 나서서 그의 말을 받았다. 세완이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도와달라고 했나 봐요.”
“네. 두 분이 가시고 혼자 2층에 있더라고요.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집에 갈 방법이 없다고 해서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남자는 바로 세완과 이은이 민박집에서 왔던 의사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은을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원과 제법 친한 모습을 보니 이 사람도 혹시 백희경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그들은 마냥 그가 의심스러웠다.
잔뜩 날을 세우는 세완과 이은을 눈치챈 것인지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음,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수상한 사람도 아니고요.”
“저 아이와 잘 아시나 봐요.”
세완이 물었다.
“여기 자주 오는 낚시꾼 아저씨예요.”
소원이 남자를 옹호하며 말했다.
“친한가 봐?”
“아이랑 친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낚시를 자주 오다 보니 안면이 있는 정도죠.”
“우리 아저씨는 대기업에 다니시는데, 어디라고 하셨죠? 암튼 높은 사람이래요. 민박집 아주머니가 딸만 있으면 사위 삼고 싶다고도 했어요.”
소원은 남자가 제 삼촌이나 오빠라도 되는 듯이 자랑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춘기 소녀의 사고방식이나 마인드는 알 바가 아닌데,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회사에, 다니신다고요? 의사가 아니라요?”
남자는 분명 아까 의사라고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의대 출신으로 신경외과 전공이라고 했다.
“의사였는데 적성에 맞지가 앉아서요. 지금은 직장인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세완이 말꼬리를 길게 늘여 비틀었다.
의사가 하던 일 때려치우고 회사에 들어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
세완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명함이며 수표를 준 그 모든 행동이 세완은 후회스러웠다. 이 남자는 또 도대체 뭐길래!
무슨 놈의 섬이 쉽게 넘어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세완은 그들이 수상하다 못해 끔찍한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수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 마음을 아는지 남자가 재차 강조했다.
“아, 예.”
하지만 신뢰성은 없었다. 어느 도둑이 내가 도둑이오, 이야기를 할까?
수상한 사람은 결코 제 입으로 자신이 수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뒤에 있어.”
세완이 다시 한번 이은을 보호했다.
그 사이 소원은 남자의 팔에 매달려 본채로 가자고 하고 있었다.
“불도 나갔잖아요. 여기는 비가 오면 종종 이래요. 본채로 가요. 추우시죠? 커피 한 잔 드릴게요.”
“가족끼리 있는데 내가 끼면 불편하잖아.”
누가 봐도 원수지간인데 저 남자는 어떻게 가족이라고 저렇게 확신하는 것일까?
“가족은 누가 가족이에요? 그냥 엄마랑 아는 사이일 뿐이에요.”
완강하게 부정하면서 이은을 보며 눈을 부라리는 것을 보니 저 아이가 말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황뿐이라 세완은 머리가 다 지끈지끈했다. 그것은 이은도 마찬가지인 듯 이은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 아파서 그래?”
이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얗게 질린 이은의 얼굴이 유난히 초췌해보였다.
세완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두통약 있어?”
세완의 물음에 소원이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본채에 가면 있다고 했다. 세완은 고민했다.
다 함께 본채로 가자니 본채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수상하고, 이은만 혼자 두고 가자니 그건 더 불안했다.
갈등하는 기색의 세완을 보며 이은이 말했다.
“참을 수 있어. 가게에 가서 사자. 포장된 약인데 뭘 어쩌겠어.”
“그래.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자.”
이젠 백희경에게 뭔가를 따져 묻고 싶지도 않았다. 세완이 이은을 다독거리며 별채를 나서겠다고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그러고 보니 앞에 세워져 있는 파란색 스포츠카가 그쪽 차인가 봐요. 나무가 쓰러져 있던데…….”
남자가 의뭉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돌 지경이었다.
“……차 앞에 나무가요?”
“아마도요. 저도 얼핏 봐서. 그런데 진입로를 막아놓은지라 차를 빼기가 쉽지 않아 보이더라고요.”
남자는 자신은 정말 무해하다는 듯 가볍게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세완과 이은은 반사적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
“뭐요?”
날카롭고 예민한 재수생이 짜증스럽게 반문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하아!”
연거푸 한숨이 나왔다. 한숨 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멀쩡한 차 앞에 왜 나무가 쓰러져 있나 싶어 세완은 골치가 다 아팠다.
엄마 찾아 삼만 리 휴먼드라마를 찍으러 왔는데, 막상 오니 한여름 밤의 공포‧스릴러 영화였다.
“어떻게 할까?”
세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그의 손은 이미 112라는 숫자를 핸드폰에 찍고 있었다.
세완은 경찰에게 신변보호 요청이라도 할 셈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차의 파손 상태를 가장 먼저 확인해야겠지만 만약 그의 차 앞에 나무를 쓰러뜨려 놓은 것이 백희경과 그 남편이라면 그곳에 가는 것도 위험했다.
잔뜩 날이 선 세완에게 이은이 말했다.
“이런 건 신고 안 받아줘.”
증거도 없이 의심만으로 신고를 받아주고, 신변보호를 해주는 경찰은 이 세상이 없다.
세완이 잔뜩 짜증난 기색으로 앞에 서 있는 소원과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들이 하지야 않았겠지만, 아니 어쩌면 했을 수도 있지만……. 하!
남자는 여전히 무해한 표정을 짓고 있고, 소원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신세 좀 지자.”
그래도 열아홉 살인 제 딸 앞에서 험한 일을 벌이지는 않겠지 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첩첩산중이었다. 소원은 세완과 이은이 불청객이라는 티를 지우지 않았다. 세완과 이은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본채에 백희경과 그 남편이 숨어 있고, 그들이 무슨 해코지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속에서 긴장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 본채로 갔다.
소원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고, 그 뒤를 따라 남자가 들어간 뒤에야 세완과 이은은 본채에 들어섰다.
백희경의 집, 그러니까 본채는 그들이 나가기 전과 별다른 것이 없었고, 더해서 인기척도 없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소원에게서 강탈하듯 두통약을 받아 이은에게 먹이고 세완은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세완이 질문했다.
“어머니는 어디 계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