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정확하게 말하면 김이은이 김이은했다.
“감사합니다. 괜찮은 것 같아요. 세완아! 나 좀 부축해줘.”
이은이 그를 불렀다. 세완은 순식간에 화색이 되어 그녀에게 달려갔다.
김이은은 원래 세상 모든 인간을 의심하는 의심병 말기 환자이기도 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의 구절처럼, 세완은 이은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이은에게로 가서 충실한 번견이 되었다.
“아프지 않아? 괜찮아?”
먼저 이은의 상태를 살폈고, 그 다음은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사례라도…….”
폭풍주의보가 떨어진 날, 혼자서 화창한 봄날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세완을 보며 남자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원래부터도 돈 아까운 줄 모르는 남자지만, 세완은 이참에 벌레퇴치까지 하겠다며 의사에게 지갑에서 꺼낸 수표 몇 장과 명함 한 장을 남겼다.
“미쳤어? 돈 아깝게! 그리고 돈만 주면 되지 명함은 왜 줘? 누군지 알고?”
“돈 아깝긴. 널 치료해주셨잖아. 감사합니다, 꼭 연락하세요. 신세 갚을게요.”
이은이 나직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하지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마냥 좋은 세완은 화사하게 웃으며 굿바이 인사를 날렸다.
남자는 요구한 적 없는 수표 서너 장과 명함 한 장을 들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0이 여섯 개 박힌 수표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때린 뒤, 의뭉스런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 * *
남자와 헤어진 이은과 세완은 차로 향했다.
비는 내리고, 다리는 삐끗했다. 생각 같아서는 비가 그칠 때까지 콕 박혀 있다가 섬을 탈출하고 싶은데 이은이 세완의 제안을 거절했다.
“가. 무조건 가서 난 듣고 싶어.”
“살인자일 수도 있다고 하잖아. 위험할 수 있어. 우린 그 여자에 대해서도 모르지만 이 섬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몰라.”
남편과 자식에게 제 잘못을 밝히고 싶지 않은 모양이긴 했지만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여자 혼자면 또 모를까, 그 여자의 남편까지 있다고 했다. 소원인가 하는 그 딸은 그들이 펜션에 두고 왔으니 쉽게 따라오진 못하겠지만…….
“네가 나 지켜 줄 거잖아. 가자.”
그쪽도 둘, 우리도 둘인데 뭐가 문제냐며 이은이 세완의 옆구리를 찔렀다. 세완이 고민했다. 생각 같아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말라며 이은을 붙잡고 싶지만 말로 한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
세완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은을 바라보았다.
또랑또랑 맑은 눈이 그를 향했다.
참 이상도 하지. 왜 세완은 이은이 저렇게 바라보면 거절을 못 하겠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은에게 준다고 사놓은 것이 있었다. 세완이 뒷좌석을 뒤적였다. 치한퇴치 스프레이며, 전기 충격기 등이었다.
포항에 내려오느라 주는 것을 깜박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요긴하게 쓸 수 있을 듯하다.
세완이 뒷좌석에서 찾은 선물 상자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리고 의아하게 바라보는 이은에게 그것을 넘겼다.
“뭐야?”
“네 몸은 네가 챙기자.”
그가 최대한 노력은 하겠지만 혹시 모를, 만에 하나의 상황도 있으니까!
얼떨결에 선물 상자를 받아 든 이은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건 웬 거야? 왜 차에 이런 게 있어.”
“너 준다고 샀는데 깜박했어.”
“……그렇지. 네가 나 말고 줄 사람이 없긴 하지.”
방탕한 재벌 3세처럼 보이지만 저래 봬도 쓸데없이 성실해서 함부로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애는 아니다.
이은은 잠시 들었던 다른 여자에게 줄 것을 그녀가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세완은 호신용품을 바라만 보고 있는 이은을 보며 혀를 찼다.
“챙겨. 보지만 말고.”
그는 그의 손으로 직접 포장을 뜯어 이은의 손에 그것을 들려주었다. 양손에 호신용품을 안긴 세완이 말했다.
“뒷일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일단 때려. 뿌리든지 충격을 주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인데, 뭐! 여차하면 후라이팬 같은 것으로 머리를 때려.”
세완은 세세하게 이은에게 지시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당방위를 받아 줄 테니 안심하고 상대를 반죽음 상태로 만들라는 말에 이은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제 딴에는 도와준다고 하는 건데 왜 이렇게 믿음직스럽지가 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찮다 못해 팔랑팔랑 종잇장 같은 남사친을 보며 이은이 물었다.
“너 운동 열심히 배우지 않았어?”
나 하나 못 지킬 것 같냐며 이은이 노골적으로 질문했다. 세완이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히 운동도 열심히 배웠고, 요즘도 스파링이며 유도연습은 꾸준히 하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불안하다.
머뭇거리는 세완을 보며 이은이 고개를 저었다.
이은은 그에게 여자는 이런 잡다한 호신 무기 말고, 자신만만하게 나를 믿으라고 말하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조언했다.
“허세 부리다가 여자 친구가 다치면 어떻게 해. 차라리 조금 덜 멋있고 여자 친구가 안전한 게 낫지 않아?”
세완이 합리적인 반론을 늘어놓았다.
일리는 있지만…….
잠시 고민한 이은이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됐다. 의미 없어. 출발하자.”
자기 여자친구랑 알아서 하겠지, 뭐!
중요한 건 세완의 연애상담이 아니라 그녀가 곧 만나게 될 백희경, 그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은은 방금,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지키라는 세완의 말에 자신이 잠깐 서운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그것을 지우고 친모에 집중했다.
왜 서운했는지는 이은도 잘 모르겠지만 이은은 한시라도 빨리 이 수상한 휴가를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싶었다.
* * *
어느덧 해가 어둑해졌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다.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괜히 숙소를 나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어차피 출발한 걸음이었다.
네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친모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집은 그들이 나가기 전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활짝 열린 대문이 그들을 환영했다.
차에서 내린 그들을 세찬 비가 가장 먼저 맞이했다. 세완은 차량용 담요를 그들 위로 우산처럼 드리운 뒤 친모가 있을 본채 현관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벨을 눌렀다.
- RRR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저기요! 아주머니! 문 좀 열어보세요!”
세완이 문을 두드렸음에도 집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완과 이은이 서로를 보았다. 이대로 서 있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왔다.
“차 안에 가서 기다릴래?”
“아니. 별채에 가보자.”
만에 하나의 확률로 그곳에 있을 수도 있다며 이은이 세완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도망치듯 떠났던 별채는, 현관이 훤히 열려 있었다.
세완과 이은은 홀린 듯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둥이 쳤다.
깜짝 놀란 이은이 세완 곁에 붙었다가 다시 떨어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깜짝 놀라 뒷걸음치다가 세완의 몸에 부딪혔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냐. 사람 미안하게.”
“……그러게. 미안.”
태연자약한 세완의 모습에 이은이 도리어 당황했다.
얘가 그래도 믿음직한 구석이 있구나, 싶어 이은이 세완의 옆에 바짝 섰다.
낯선 곳인 데다가 어두워서 그런지 이은이 겁을 먹은 듯하자 세완이 이은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 겁먹지 마.”
세완이 벽면을 손으로 훑으며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남의 집에 와서 이 무슨 무례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곳에 묵으라고 한 것은 백희경이었다.
세완과 이은이 뛰쳐나가긴 했지만 혹시라도 문제 삼는다면 그 말을 핑계로 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세완이 전등을 켰다.
그리고 세완과 이은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아까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밝은 불빛 아래에서 보니 그들은 생각보다 더 많이 젖어 있었다.
세완의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는 물론이고, 이은의 티셔츠 또한 제법 젖은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색까지 흰색이라서 비침이 너무 심했다. 세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여기 수건 없나?”
“남의 집에서 수건 찾긴 좀 그렇지. 왜? 많이 추워?”
이은의 순진한 질문을 뒤로 하고, 세완은 화장실로 직행했다.
가택침입으로 고소할 거면 하고, 도둑질이라고 신고를 할 테면 하라지!
화장실에서 수건을 찾은 세완이 일단 그것을 이은에게 덮어줬다. 두세 개의 수건을 한꺼번에 덮어주는 남사친의 행동에 이은이 의아해했다.
“너도 좀 닦아.”
“아니, 난 괜찮으니까. 그……. 옷이 좀 비치거든.”
겸연쩍은 세완의 말에 이은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속옷이 훤히 다 비치고 있었다.
깜짝 놀란 이은이 수건을 펼쳐 몸에 둘렀다.
“아, 그러네. 많이 젖었다. 그지?”
“그렇지. 비가 많이 왔으니까.”
세완과 있으면서 이렇게 대화가 어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어차피 세완인데 뭐 어쩌냐 싶긴 하지만 그래도 괜스레 멋쩍어 이은이 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어디 갔지? 집을 비워두고.”
“그러게.”
어색한 대화의 끝은 침묵이었다.
평생을 남매처럼 자랐는데 이 무슨 당혹스러운 상황인가 싶기는 한데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자니 젖은 옷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세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뭐라고 말할 거야?”
“……?”
“만나면 말이야. 그 여자.”
이젠 친모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수상한 그 여자’라는 표현으로 총칭되는 친모를 떠올리며 이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색함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이은은 세완의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민했다.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것부터 했는데 세완의 말대로 너무 경솔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말 친모가 아니면, 살인자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이은은 덜컥 겁이 났다.
염전 노예니, 섬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이니 하는 흉악범죄들이 떠올랐다. 고작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소원이 그들이 어디에 묵는지 알아내서 혼자 쳐들어온 것도 생각났다.
섬은 그 정도로 밀폐되고 폐쇄된 곳이었다. 그리고 주민들끼리의 관계가 유난히 끈끈한 곳이었다.
“……세완아 우리 그냥 갈까?”
이은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완이 말리든지 말든지 고집부려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 회장은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잔뜩 겁을 먹은 이은을 보며 세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겁나?”
“회장님은 너 하나만 보고 사시잖아.”
혈혈단신인 이은과 달리, 세완은 이 회장의 귀한 손자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세완을 저승길 동무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이은의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에 세완은 말문이 막혔다. 아니, 얘는 자기 목숨을 걱정해도 모자를 상황에 왜 남 걱정을 하나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은이 짠했다.
“인마, 넌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나 목숨 길다더라. 너도 그렇고.”
세완이 이은의 머리를 쓱쓱 손으로 헤집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르고 봤다.
“넌 네 걱정만 해.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제 몸 하나는 충분히 건사하는데 이은은 아직도 그가 어린 일곱 살 아이인 줄 안다. 세완은 그 사실이 새삼 서러워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그때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세완과 이은의 눈동자가 동시에 돌아갔다. 번쩍! 하며 천둥과 번개가 쳤다. 전등이 나갔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