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한참을 머뭇거린 세완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쟤 말고 너.”
“……?”
“네가 친딸이 아닐 수도 있어서.”
이은은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냐는 표정으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세완이 입맛을 다셨다.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은을 보던 세완이 말을 이었다.
“그……. 찬주가 아침드라마 얘기를 하나 해주더라고.”
세완이 찬주에게 들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그대로 늘어놓았다.
이은은 황당한 표정으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무슨 헛소리야?”
“찬주한테 들을 때는 쉬웠는데…….”
이은에게 유일하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은 아버지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 대한 기억마저 비틀어야 한다는 것이 세완은 참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성실하게도 이은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 대해 빠짐없이 설명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은이 세완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찬주 번호.”
여왕님의 지시에 세완이 옳다구나, 하면서 핸드폰을 대령했다.
이은은 태연하게도 통화기록을 뒤져 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 무슨 일이야? 통화한 지 10분이 지났어? 20분이 지났어?」
찬주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은은 찬주보다 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설명해봐.”
「김이은?」
혹시나 싶어 물었는데 이은이 맞았다. 찬주가 말했다.
「너네 보스한테 들어.」
“이해가 안 가니까 너한테 묻는 거 아냐. 애한테 또 무슨 헛소리를 했는데?”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면서 이은은 일단 찬주부터 타박하고 봤다.
하여간. 둘 다 마음에 안 든다며 찬주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조곤조곤 요약정리를 해줬다.
1) 너희 아빠가 바람피웠다는 이야기가 있음.
2) 교통사고 정황이며 사건처리에 이상한 부분이 있음.
3) 너희 엄마가 사망신고가 됐더라? 근데 지금 친모라며 등장한 그 여자는 다른 남자랑 애 낳고 잘 살고 있잖아. 그럼 누구 호적으로 사는 걸까? 우리는 그걸 네 아빠의 내연녀 호적이라고 짐작하고 있음.
4) 남의 호적으로 살 정도로 간 큰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음. 2번의 이유로 우리는 네 엄마가 네 아빠와 그 내연녀를 모두 죽였을 수도 있다는 가정도 하고 있음.
5) 그 와중에 너희 엄마가 자꾸 수상한 행동을 보이네? 남의 호적으로 살고 있는 친모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친엄마인 척 친모를 사칭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찬주는 조목조목 번호까지 매겨서 그들이 품고 있는, 그리고 파헤쳐야 하는 의혹에 대해서 설명했다.
「중간 중간 비는 건 알아서 상상하시고.」
건들거리는 목소리에 이은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
세완에게 들은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하지만 벌써 두 번째 듣고 있는데도 이은은 그녀가 들은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다 못한 세완이 이은에게서 핸드폰을 뺏었다.
“나중에 전화하자.”
인사 아닌 인사말로 전화를 끊은 세완이 핸드폰을 바닥에 던지듯이 내려놓은 뒤, 이은의 양어깨를 잡았다.
“이은아, 괜찮아?”
“……아니, 안 괜찮은 것 같아. 이게 도대체 뭐야? 진짜!”
헛웃음만 나온다.
이은이 쓰러지듯 바닥에 주르륵 내려앉았다. 세완도 함께 그 옆에 앉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냥 처음부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친엄마가 아닐 수도 있다잖아!”
이은이 세완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이내 사과했다.
“……미안해.”
세완에게 화를 낼 일은 아닌데 그녀가 잘못했다.
세완은 괜찮다는 듯 그녀의 등만 다독거렸다.
이은은 머리가 복잡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야, 도대체!
25년 만에 친모가 찾아온 것도 어이가 없는데 그 친모가 딸을 보고 싶어 하거나 반가워하는 것이 아닌, 수상한 모습을 보인다.
뭐 거기까진 그래도 수용 가능했다.
그런데 친모가 사망 처리가 되어 있단다. 두 사람분의 자동차 보험금과 유산을 가지고 친모가 잠적한 거란다.
뭐 여기까지도 좋다 이거야. 그런데 사고 경위며 처리에 이상한 정황이 엿보인대. 심지어 친모가 아닐 수도 있단다.
“이게 말이 돼?”
머릿속을 정리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던 이은이 벌컥 화를 냈다.
“보험사기꾼에서 살인자로 업그레이드 했네? 근데 진짜 엄마가 아닐 수도 있다고 플러스옵션까지 붙었어.”
이건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며 이은이 소리쳤다.
친모라면 최소 보험금사기꾼이고, 어쩌면 친부와 친부의 내연녀를 죽인 살인자일 수도 있다.
만약 친모가 아니라면 돈을 노린 사기꾼이다.
하지만 그것도 평범한 사기꾼은 아니다. 이은의 부모님과 그 어떤 관련도 없는 사람이 이런 사기를 쳤을 리는 없으니 그 내막에는 또 엄청난 음모가 들어앉아 있을 거다.
이은은 그녀가 자신의 친모이기를 바라야 하는지, 아니면 아니길 바라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죽기 전 고해성사는 개뿔이! 부모 복 없는 건 진작 알았지만 평범하게 돈을 노리거나 신장을 노리는 거면 안 되는 거였냐며 이은이 절규했다.
그게 평범한 것이었냐며 세완이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지. 네가 평범한 거라면 평범한 거지.”
이은의 말이 옳다. 무조건 옳다. 김이은의 말씀은 모두 다 진리다.
이은의 말이 모두 다 옳다는 이 시대의 호구를 보며 이은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세완을 뿌리치고 현관으로 뛰어가듯 걸어갔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현관을 벌컥 열었을 때, 이은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이은이 멈추는 것을 본 세완도 멈칫했다.
눈가가 붉은 소녀가 현관 앞에 원귀처럼 쪼그리고 있었다.
비를 맞아서 젖은 데다가 생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다. 게다가 배경으로는 폭풍이 치고 있었다.
놀라 기겁할 뻔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은은 화가 났다. 도대체 너희 모녀는 뭐가 그렇게 당당하니?
그녀가 달려온 것은 친모에게 따지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바로 여기, 그 딸이 있었다.
이은이 소원에게 물었다.
“여기 왜 왔어?”
“우리 엄마한테 뭐라고 협박했어요? 얼른 가서 사과해요. 우리 엄마 울었단 말이에요.”
아주 대단한 효녀 나셨다.
날카로운 신경이 하늘에 달해 빵, 터져버렸다. 이은이 따지듯이 물었다.
“니네 엄마 이름 뭐니?”
“몰라서 물어요?”
“그래. 몰라!”
“백희경이요.”
“백희……. 뭐?”
“백희경이요.”
소원이 답했다. 세완과 이은은 저도 모르게 서로를 돌아봤다.
백희경이면 이은 부모님의 사망신고를 하고, 보험금을 수령하고, 유산까지 챙겨서 잠적한 그 후견인이라는 사람의 이름이다.
게다가 찬주는 이 섬에 살고 있는 ‘엄마’가 만약 이은의 친모가 아니라면 그녀는 백희경이 친모사칭범인 동시에 그녀의 부모님을 죽인 살인범일 수도 있다는 말을 했었다.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의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이은아!”
세완이 서둘러 이은을 부축했다.
이은은 괜찮다는 듯 허공을 향해 손을 젓다가 이내 세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에게 기댄 채 소원을 바라보았다.
엄마를 찾으러 온 것뿐인데 이제 살인범을 찾아야 하는 여정이 되었나 싶어 눈앞이 막막했다. 이은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넌 내가 누군지 알고 여기 온 거니? 내가 정말 네 언니라고 생각해?”
이은은 소원에게, 그녀 자신을 향해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소원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너 몇 살이니?”
“열아홉 살이요.”
“너희 엄마 나이는?”
“예순세 살이요. 그런데 왜 이런 걸 묻는 건데요?”
이은이 세완을 향해 눈짓하려 했는데 세완은 이미 핸드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세완이 이은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왜? 나이가 안 맞아?”
“어머님과 백희경의 나이가 동갑이야. 미처 몰랐네.”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놀라서 비교‧대조‧분석은 해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동갑이었어?”
세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할 노릇이다.
마치 자신과 비슷한 구석을 찾는 듯 소원의 얼굴을 집요하게 바라보던 이은이 도무지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왜 일어나?”
“나 아무래도 가봐야겠어. 그리고 가서 물어야겠어.”
“위험해.”
상대는 어쩌면 살인범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위험해도 이렇게 답답한 것보다는 낫겠지.”
이렇게는 도무지 못 살겠다면서 이은이 세완의 만류를 거절했다. 그 말을 부정할 수만은 없어 세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잠깐만. 전화 한 통만 하고.”
무슨 조건을 걸지 몰라 주저했는데, 이쯤 되면 세완도 방법이 없었다.
- RRR
신호음이 계속해서 울렸다. 하지만 조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저녁잠도 없는 양반인데 왜 전화를 안 받으시나! 세완이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은은 그런 세완을 바라보다 뭔가를 결심한 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은아!“
세완이 놀라 이은의 뒤를 쫓았다.
이은은 못 들은 척 계단을 뛰듯이 내려갔다. 세완이 따라오리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그녀는 목표를 위해 전진했다.
그때였다. 빗물에 이은이 미끄러졌다.
“악!”
안 그래도 가파른 계단이었다.
이은이 소리를 지르며 계단에서 떨어지는 찰나였다. 세완이 사색이 되어 계단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이은은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괜찮으세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떨어지는 이은을 받았다.
자칫하다가는 크게 다칠 뻔한 것을 알기에 세완은 안심했다. 그가 그들을 향해 뛰어갔다.
1초가 한 시간 같은 시간이었다.
“이은아, 괜찮아?”
“발목이…….”
이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발목을 살핀 세완이 계속 물끄러미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우선 감사 인사부터 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당연한 거죠.”
남자는 인상 좋은 얼굴로 서글서글하게 답했다.
세완은 혹시 근처에 병원이 있나 싶어 위층의 소원에게 다그쳤다. 소원이 볼멘 목소리로 답했다.
“정형외과는 무슨 정형외과에요? 여기가 서울인줄 알아요? 보건소 하나밖에 없는데 보건소 쌤 휴가 갔어요.”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때 한 걸음 떨어져서 그들을 보던 남자가 말했다.
“제가 봐드릴까요? 정형외과는 아니지만요.”
“의사세요?”
“의대를 나오긴 했죠. 신경외과 전공입니다.”
정형외과나 신경외과나!
세완은 일단 아쉬운 대로 이은 발목을 남자에게 넘겼다.
남자는 이은의 발목을 찬찬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살핀 뒤 근육이 놀란 것 같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돌팔이 아니냐는 듯한 세완의 시선을 웃음으로 넘긴 남자가 이은을 부축했다.
“일어나보실래요? 지금 살짝 놀라서 그렇지 막상 걸어보면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세완이 모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의사라니 뭘 어쩔 수는 없지만 무슨 의사가 저렇게 느끼하냐며 세완은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의사면 진료나 할 일이지 왜 애를 일으켜서 걸어보라 하느냐 마느냐 하냐며 세완은 속으로 수없이 많은 욕설을 뱉었다.
뭐라고 콕 찍어서 말할 수는 없는데 미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김이은은 김이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