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폭풍이라 그러더니 대낮인데도 대낮 같지 않고 참 많이 어두웠다. 그리고 그놈의 비는 참 지긋지긋하게도 왔다. 마치 이 섬처럼.
헬기를 띄우든 배를 띄우든 비가 멈춰야 할 텐데 날씨는 점점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도대체 언제쯤 서울로 갈 수 있을지, 세완은 초조한 마음으로 하늘을 원망했다.
한참 동안 하늘이며, 이은의 친모, 급기야는 바람을 피웠다는 돌아가신 이은의 부친이며 이 회장까지 원망했다.
있는 원망, 없는 원망 실컷 해서 더는 욕할 존재가 없자 자고 일어난 이은이 배가 고플까 걱정이 되었다. 1층에 내려가 부르스타를 빌려오고, 라면을 사 왔다.
이 섬에서는 배달이라는 신문물은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 듯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유인도라고는 하지만 면적 24만 평에, 상주인구는 200명 내외다.
도심의 초등학교보다 못한 규모에서 맛집을 찾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세완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동네에서 나름대로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곳이 경양식 돈가스 가게라는 것을 알아냈다.
중국집을 가느니 차라리 짜장라면을 먹는 것이 훨씬 더 맛있을 거라는 조언도 얻어왔다.
잠든 이은을 혼자 둘 수 없어 다시 방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어쨌든 세완은 최선을 다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할 일이 없어 잠든 이은의 얼굴을 관찰했다.
“잠잘 때만 착하네. 나 같은 친구가 어디에 있냐? 넌 나한테 감사해야 해.”
세완은 이은의 얼굴이 있는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며 셀프 PR에 주력했다.
그러나 듣는 이 없는 공치사는, 정신이상자의 헛소리와 별반 차이가 없기에 세완은 이내 하던 말을 멈추고 다시 이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25년을 함께 했어도 정작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세완은 그의 기억보다 더 어리고, 순수한 이은의 얼굴을 보며 묘한 기분에 젖었다.
뭐라고 설명하거나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세완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친구를 믿는 건 좋은 일이지. 친구의 인품을 믿고, 그녀의 친모를 믿는 것도 그럴 수 있는 것이고? 정말 친구라면 말이야.」
그 와중에 갑자기 어제 통화에서 찬주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얘랑 나랑 친구가 아니면 뭔데? 25년 동안 같이 자랐는데!”
세완이 이 자리에 없는 찬주에게 변명하듯 소리쳤다.
김이은은 그를 구박하고, 그는 그 잔소리를 이리저리 요령 좋게 피해 가는 그런 삶을 살았다.
천방지축 시골개와, 개 목걸이 내지는 개 조련사.
대충 그 정도의 관계로 25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남녀관계가 되나!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이은이 보기 좋아서 조금 더 사고를 치고, 조금 더 말썽을 부린 측면이 없다고는 말 못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친구였다.
25년 동안 붙어살면 피가 섞여 없는 혈연도 생겨난다며 세완이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지. 당연하지.”
세완은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친구라면 말이야.」
그런데 자꾸만 그를 비웃는 찬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환청을 떨쳐내려 노력했지만 찬주의 그림자는 짙고도 짙었다.
* * *
- 쾅! 쾅!
이은의 얼굴을 보다가 깜박 잠이 든 것 같았다. 뭐가 시끄러워서 눈을 떴는데 누가 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나와 봐요. 여기 있는 거 아니까 나와 봐!”
세완은 자신도 모르게 이은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 자고 있었다.
이은의 잠귀가 어둡다는 것이 세완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은이 잘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세완이 짜증 섞인 몸짓으로 일어났다.
“도대체 누구기에…….”
세완이 벌컥, 문을 열었다. 낯선데 낯설지 않은 사람이 보였다.
비에 젖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것은 그 ‘친모’의 딸 소원이었다. 그녀는 막상 문을 열고 나온 세완을 보고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세완은 앞에 있는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다시 문을 닫았다.
“이봐요!”
소원이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얽히기 싫어서 문을 닫았는데 생각해보니 이은이 자고 있었다.
세완은 이게 웬 진상이냐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소원이 여기까지 온 이유도 모르겠고, 얽히고 싶지도 않지만 그대로 방치하면 이은이 깰 것이 분명해서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세완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문을 두드리는 소원의 손부터 제지했다.
“말로 합시다. 그리고 여긴 어떻게 알았…….”
어떻게 알았냐고 하려고 했는데 소원 옆에 민박집 주인부부가 있었다.
“아니, 나는 애가 그쪽을 찾기에…….”
오지랖 넓고 호기심 많아 보이는 중년의 부부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
세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숙박객 정보를 이렇게 알려줘도 돼요? 이거 숙박업자의 투숙객에 대한 보호의무 위반 아닙니까? 손해배상 걸어 볼까요?”
세완이 따져 물었다.
“아니, 시골 동네에서 무슨 법 얘기까지 하나. 그리고 내가 얘기 안 했어요. 얘가 알고 온 겁니다. 섬에 외부인이 잘만한 곳이 우리 집밖에 없다 보니 그런 거지.”
“아유, 암튼 소원아, 찾는 사람 맞지? 우린 내려간다. 여보, 갑시다!”
부부는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황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가는 그들 부부를 노려보던 세완이 시선을 소원에게 옮겼다. 소녀는 여전히 시근덕거리는 표정으로 세완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할 말 있어?”
“할 말은 그쪽이 저한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한 거예요?”
소녀는 엄마를 지키고 싶은 듯했다.
“그건 그쪽 어머님께 여쭈면 되지 않을까?”
“엄마가 얘기를 안 해주니까 그러죠.”
“그건 모녀간에 알아서 할 일이지. 본인 엄마도 얘기 안 해주는 걸 왜 생판 남인 나한테 와서 그래?”
성격 나쁜 것으로는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세완이었다.
나무늘보처럼 빈둥거리는 것, 좋아하는 것만 보고 그의 성격도 느긋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노회한 여우 이 회장의 손자이고, 평생 영혼의 단짝처럼 붙어산 것이 독설의 대가 김이은이었다.
세완에게는 뛰어난 핏줄과, 완벽한 주변 환경, 거기에다가 뛰어난 재능까지 있었다.
놀고먹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사람들이 많이들 잊고 있는데 그도 충분히 성격이 나쁘다.
세완이 빈정거리며 소원의 속을 뒤집었다. 소원은 눈가가 붉어져서 세완을 노려보았다.
“그쪽한테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언…… 니라도 보게…….”
소원의 입에서 이은을 지칭하는 단어가 나왔다. 세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말조심해. 누가 언니야?”
세완은 소원과 이은이 연결되는 것 자체를 발작하듯 거부했다.
“무슨 이야기가 나왔든 그건 그쪽 사정이고! 뭘 원하고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뭐든 간에, 우리 쪽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꺼져.”
세완이 대놓고 막말을 뱉었다. 소원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세완을 노려봤다.
세완은 그녀를 비웃으며 문을 닫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떠는 소원의 어깨를 가볍게 털어주며 작게 속삭였다.
“한 번만 더 시끄럽게 하면 네 엄마가 입을 다물었던 이유를 확실하게 알려줄 테니까 조용히 꺼져. 네 부모와 네 인생이 피곤해지는 꼴이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든지.”
세완은 말문이 막힌 소녀의 면전에서 문을 세차게 닫았다. 그리고 소원의 어깨를 털어주는 척하며 챙긴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말았다.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유전자 검사를 맡길 생각이다.
이것이면 쉽게 결론이 나오겠지! 불청객은 불쾌했지만, 세완은 의외의 소득에 흡족한 얼굴을 했다.
머리카락을 챙긴 세완이 우리 이은이 잘 자고 있나, 확인차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
세완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자는 줄 알았던 이은이 눈을 끔벅거리며 세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언제 일어났어?”
“지금. 밖에는 누구야?”
“……잡상인?”
“믿을 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이은의 낮은 목소리에 세완이 문밖의 소원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빨을 숨긴 세완이 천진하고 무해한 표정으로 이은에게 다가갔다.
“잘 잤어?”
“말 돌리지 말고.”
“야, 모르는 척 좀 해주라.”
“이미 들었잖아.”
이미 들었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할 수 있겠냐며 이은이 세완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뭐?”
“뭔진 모르겠는데 너 방금 뭔가 챙겼어.”
이은이 어서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세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지도 모르면서 달라고 해?”
“뭔지 모르니까 달라고 하는 거지.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땐, 꼭 나쁜 짓 저지를 때니까.”
25년이라는 세월은 농담 따먹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완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이은이 다시 한번 손을 까딱였다. 세완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다.
“내가 너한테 뭘 속이겠냐. 속일 생각도 없어. 근데 이건 내가 좀 챙기자.”
“……?”
“유전자 검사 맡기게.”
세완은 밖에 친모의 딸이 와 있다는 것과, 그녀의 어깨에 머리카락이 있기에 손수 쓱싹했다는 이야기를 요약정리해서 설명했다.
눈을 뜨자마자 불쾌한 이야기를 듣게 된 이은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더 불쾌했다.
세완은 심기가 안 좋은 듯한 이은을 보며 혀를 찼다. 이래서 알려주기 싫었는데…….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째서 이은 앞에만 서면 지나치게 솔직해지는지 모르겠다.
왜 얘한테는 거짓말을 못 하는 건지 스스로도 모르겠다며 웅얼거린 세완이 이은에게 가까이 가 그녀의 미간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인상 쓰지 마. 안 그래도 못생겼는데 인상까지 쓰면 어떻게 하냐? 누가 데려가라고.”
어느새 판판해진 이은의 미간을 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이은은 잘생긴 얼굴로 미남계를 쓰는 세완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은은 손을 뻗어 세완의 오른쪽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다른 손으로 세완 손에 있는 머리카락을 뺏었다.
못된 것만 배워서, 어디서 사람을 홀리려고…….
이은은 다른 곳으로 돌아갈 뻔했던 화제를 본궤도로 이동시켰다.
졸지에 머리카락을 뺏긴 세완이 소리쳤다.
“야! 버리면 안 돼.”
“안 버려. 유전자 검사 한다면서. 그런데 유전자 검사는 왜? 쟤가 친딸 아닌 것 같아서?”
별걸 다 알아보려고 한다는 듯 이은이 혀를 찼다.
하지만 세완이 알고자 했던 것은 소원의 친딸 여부가 아니라 이은의 친딸 여부였다.
세완은 이은에게 네 ‘친모’가 진짜 ‘친모’가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했다.
그러나 찬주가 내놓은 가정은 이은도 알아야 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