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희경은 마치 얼음 인형이라도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세완은 한량 같은 얼굴로 사람 좋은 양 싱긋 웃었다.
희경에게 타인의 입에서 들은 ‘백희경’이라는 이름은 그 존재 자체로 충격이었다.
어떻게든 이은을 잡으려고 발악을 하던 여자가 갑자기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그런 희경이 이상한지 소원이 먼저 제 엄마를 불렀다. 이은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친모를 돌아봤다.
“김이은 씨, 그대는 가던 길 직진하시고.”
뭘 또 뒤돌아보기까지 하느냐며 세완이 느물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갑작스런 희경의 반응이 이상하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방긋거리는 세완을 보고 이은은 애써 의구심을 속으로 감췄다. 그녀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세완은 이은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 뒤로도 속으로 열까지 센 뒤에야 희경으로부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옷에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탁탁, 떨어낸 세완이 의도적 경멸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아는 이름 맞죠? 적당히 하셨어야지. 그럼 대충 장단 맞춰줬을 거 아니에요.”
이은이 그 녀석이야 대놓고 마음이 약한 녀석이고, 조부나 그 또한 돈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며 딸을 사랑하는 척 눈물 몇 방울 찍어내는 흉내만 냈어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줬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오래 연락하게 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 몇 푼 흘러가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을 텐데.
세완이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잘 자란 부잣집 아들 같던 얼굴이 순식간에 악당처럼 변했다.
“너 누구야?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사색이 된 희경이 세완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엄마, 왜 그래?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했기에 그래?”
희경의 이상 반응에 소원이 제 엄마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희경은 그렇게 귀한 자신의 딸조차 무시하고 세완에게만 집중했다.
“그게 궁금해요? 나라면 그것보다는 다른 게 더 궁금할 것 같은데. 예를 들어 경찰에 전화를 했나, 안 했나 같은 것!”
세완이 자신의 멱살을 잡은 희경의 손을 떼어내면서 말했다.
희경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세완은 옷을 탁탁 털고, 깃을 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었다.
세완은 고의적으로 느릿느릿 악당처럼 움직였다.
희경은 숨죽이고 세완을 응시했고, 소원은 도무지 상황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선의 주인공이 된 기분은 꽤나 묘했다. 생각 같아서는 더 놀려주고 싶은데 밖에서 이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해서 세완은 짧고 간단하게 끝내기로 했다.
“아직 따님은 모르죠? 뭐, 모르니까 우리한테 이러는 거 같기는 한데……. 그러게 조용히 사는 사람은 왜 건드립니까.”
각자도생으로 자기 인생 알아서 잘 살면 될 것을 꼭 이렇게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면서 세완이 혀를 찼다.
세완은 그에게 달려드느라 다소 옷이 흐트러져 있는 희경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털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섬에 들어와서 살 정도면 여기저기 깔아놓은 것도 많을 텐데 우리 피차 인생 피곤해지지 말아요. 사채 쪽은 조폭들도 많이 껴 있잖아요. 따님도 있으신데 조심하셔야지. 나도 내가 어디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지 모르니까 적당히 합시다.”
희경이 입을 꽉 다물고 세완을 노려봤다. 세완이 방긋 웃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앞으로 볼 일 없길 바란다는 말은 덤이었다.
돈이 도는 동네에서는 혼자만 깔끔하게 살 수 없다. 이은이 상무 업무의 태반을 총괄한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은 몰래, 세완 혼자만 알아야 하는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천생한량 세완에게 허락된 마지노선이고, 동시에 세완이 동의한 유일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에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더럽고 치사하고 음흉한 방법으로.
본의 아니게 가끔 제3금융권 쪽과도 연관이 됐던 과거를 떠올리며 세완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희경을 뒤로하며 상큼하게 현관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래? 저 사람이 한 말이 무슨 뜻이야? 설마 아빠 또 도박했어?”
뒤에서 소원이, 그러니까 희경의 딸이 엄마를 잡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딸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기야. 알면 맨정신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아비는 도박꾼, 어미는 사기꾼…….
“자기 딸이 귀하면 우리 애도 귀한 걸 알아야지.”
나이는 동갑이요,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김이은은 그를 사고뭉치 막내 정도로밖에 인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세완이 인식하기로 이은은 그가 보호해야 할 존재다.
때문에 그는 이은을 박대하는 희경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내 참아왔던 일부나마 복수를 했다는 생각에 세완이 발걸음도 가볍게 현관문에 다가섰을 때였다.
정확하게는 문고리를 잡아 밀어내서 바깥을 일부나마 봤을 때였다.
“……!”
저승사자처럼 앞에 서 있는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세완은 자신도 모르게 문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은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을 보고 부질없는 희망을 버려야만 했다.
“나와.”
작게 입 모양만 벙긋거리는 건데도 마치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절망 어린 욕설을 중얼거렸다.
* * *
태풍주의보.
육상에서 풍속 21m/s 이상 또는 순간풍속 26m/s 이상이 예상될 때 내려지는 기상특보.
산지나 해상에서의 기준도 있긴 하던데 그건 알 바 아니고!
재난문자에 따르자면 최대순간풍속이 초속 35~40m에 달할 정도로 거세니 산사태, 상습침수 등 위험 지역은 대비하고, 특히 노약자는 외출을 자제해달라고 한다.
노약자이고 싶은 30대 건장한 청년이 옆에 계신 여왕님의 눈치를 살폈다.
차에 올라탄 것까지는 좋았는데 인적 없는 곳으로 가자더니 도착해 차를 세운 다음부터 계속해서 침묵시위였다.
세완은 사고 친 애완동물이 된 기분으로 여왕님을 바라보았다.
더도 덜도 말고 딱 10분까지는 버티겠는데 그 이상은 못 견디겠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그러는 거냐며 발끈하고 싶기도 한데 그러기에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살아온 25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원래 주인님이 화나면 노비는 잘못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법이다.
침묵을 견디다 못해 세완이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잘못했어.”
“……뭐가?”
“그냥. 전부 다. 뭐가 됐든 내가 잘못했겠지.”
그가 아는 한 무조건 김이은이 다 옳다.
이은이 화가 났으면 무조건 그가 잘못한 거다. 세완이 아는 세상의 진리는 그랬다.
머리에서 딸리고, 말빨에서 딸렸다. 잔머리는 세완이 이은보다 조금 더 잘 돌아가지만 그거 자랑해서 뭐하나. 어차피 질 건데!
물론 그 대상은 김이은 한정이다.
“잘못은 했는데. 사과는 안 해.”
“…….”
“야, 솔직히 그 아줌마 너무 했다고.”
세완은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냥 가볍게 살짝, 나는 네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다는 것 정도만 언급했을 뿐이다.
채권을 사들여 협박하지도 않았고, 사채업자들에게 희경의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알린 것도 아니다.
사기꾼이 있다며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고, 직접 실력행사에 나서지도 않았다.
세완 정도면 법정으로 가도 완벽하게 무죄였다.
내가 깡패를 불러 난동을 부리라고 했어, 아니면 그 남편을 도박의 세계로 화끈하게 이끌기를 했어!
더럽고 치사하고 음험하게 가자면 끝이 없다. 보아하니 희경의 남편이 도박중독이던데 딱 삼 일이면 작업 걸어서 전 재산에 신체포기각서까지 다 받을 수 있었다.
직접 해본 것은 아니고 경력자에게 들은 것인데, 그 얼음덩어리가 못할 것 같지도 않다.
세완의 위치라면 그런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안 했잖아! 나는 무죄라고!
하지만 마음의 소리는 마음에서 끝내야 한다.
“그래. 알았어. 미안해.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화 좀 내지 마.”
세완은 남사친이 아니라 사고 친 남친처럼 사력을 다해 이은에게 사과했다. 이은은 멀뚱거리며 그런 세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 화 안 났는데.”
“……?”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그랬던 거야. 생각할 것도 있고.”
이은이 말간 얼굴로 말했다.
세완의 뒤에 숨어 별채에서 도망친 것까진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세완은 차 안에 있으라고 했지만 차 키가 없었다.
밖에 서 있기엔 비가 너무 많이 왔지만,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현관문 근처에 서서 세완을 기다리다 본의 아니게 안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뿐이다. 그 뒤에 세완이 나온 거고.
“화 안 났어? 정말이야?”
세완이 살살 이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 모습이 꼭 세완이 키우는 반려견과 비슷해 보여 이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정말 닮았다. 세완의 반려견은 조용하면 꼭 사고를 치는데 그 모습이 지금의 세완과 많이 닮았다.
이은이 물었다.
“내가 왜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뭐, 이것저것 여러모로?”
이은의 친모를 협박했고, 협박도 했고, 못된 말을 했고…….
이은이 질색하는 그의 친구, 캐쉬 관련 제3금융권 종사자인 얼음덩어리 찬주에게 빚을 질 생각도 했고, 여차하면 정말 엎어버릴 생각도 했다.
세완은 정말 그 정도로 화가 났었다.
하지만 그것을 다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세완은 일단 밖으로 드러난 것만 사죄했다. 그리고 변명도 했다.
“사고 칠 생각은 아니었어. 정말 협박뿐이었어. 그래도 널 낳은 사람인데 내가 설마 정말 깜빵에 처넣기라도 할까.”
물론 넣으려고 했다. 더한 생각도 했다. 하지만 세완은 일단 잡아뗐다.
그러나 신뢰도는 0%였다.
얼굴에 나 거짓말을 하고 있소, 라고 쓰여 있는 것은 같은 세완을 보며 이은이 기운 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왜? 그래도 난 기분 좋았는데.”
세완의 고개가 빛의 속도로 돌아갔다. 이은이 쓸쓸한 눈을 하고 말을 이었다.
“내 편이 있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았어. 고마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생각도 많았지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그것이었다.
이은은 세완에게 고마웠다. 편을 들어줘서.
그녀를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주제에 딸이라는 아이를 챙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은은 가슴이 시렸다.
티는 안 내도 그랬었다. 그런데 세완이 그녀의 편을 들어줬다.
희경의 거친 손길을 막고, 그녀의 억지스런 말들을 막아줬다. 내 사람을 왜 괴롭히느냐는 듯 세완이 든든한 가림막이자 버팀목이 되어 줬다.
어릴 때의 그가 그랬듯이. 슈퍼맨처럼. 히어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