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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22)화 (22/100)

22화

있는 것도 뺏고 싶은데 책임은 무슨…….

지나치게 선을 그었나 싶긴 한데 친모가 무릎을 꿇고 매달릴 정도로 한 달이라는 시간을 갈구한 이유를 찾다 보니 사람이 이렇게 모질어졌다.

친모가 어쩌다 이렇게 독한 사람이 됐나 싶어 가슴 어딘가가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 딸은 내가 챙긴다고 부르르 화내는 엄마가 없어 이은은 이렇게 알아서 그녀 살길을 알아서 강구해야 한다.

소원을 두고 ‘내 딸’이라고 언급하는 모습이, 마치 이은은 그녀의 딸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 같았다.

직접 키운 딸과, 그렇지 않은 딸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소위 기른 정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덜 아픈 손가락과 더 아픈 손가락은 존재한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이은은 괜스레 가슴 한 구석이 휑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로 인해 새삼 상처를 받을 정도로 말캉말캉한 심장을 가진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은은 건조한 눈으로 희경을 바라보았다.

희경이 서둘러 변명했다.

“나쁜 뜻은 아니었어. 너한테 피해줄 생각이 없다는 말이야.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러겠니.”

이은의 눈치를 살핀 희경이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친하게 지냈으면 해서 그러는 거야. 나 죽고 나면 쟤도 그렇지만 너도 세상천지 혈육 하나 없잖니.”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제 딸을 이은의 옆에 들이려고 설득하는 듯했다.

“…….”

“이은아…….”

“네. 알았어요. 이해했어요.”

이해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동의는 해줬다.

이은은 일곱 살 때부터 25년 동안 하늘 아래 그녀 혼자였지만 친모가 그렇다고 말하니 그런 것이겠지.

한숨을 쉬며 친모의 시선을 피하는데 세완과 눈이 마주쳤다. 세완은 이미 잔뜩 열이 받은 표정이었다.

‘화내지 마.’

이은이 세완을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나는 괜찮다는 듯 이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세완은 그 모습이 더 속상했다.

정말 친모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녀가 사기꾼이라 그런 것이 아니다. 이은의 친모에겐 처음부터 이은에 대한 모성애가 없어 보였다.

재혼해서 낳은 딸을 챙기는 것을 보면 원래 모성애가 없는 것도 아닌 듯했다. 그런데 왜 유독 이은에게만 야박한지 세완은 너무 화가 났다.

생각 같아서는 냉큼 이은을 끌고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태풍 때문에 배며 헬기가 안 뜨면 어떤가! 아무리 섬이라고 해도 민박집 하나 없겠어?

바다펜션인지, 하늘펜션인지 그들이 하선할 때 보았던 곳도 있지 않은가!

최대한 그녀의 의견을 지지하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세완이 이은의 방문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섬을 벗어나진 못해도, 이은을 데리고 이 집에서 탈출할 수는 있겠지.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희경이 세완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쪽은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네?”

몸을 일으키던 세완이 멈칫하며 반문했다.

“아니, 보다시피 여긴 여자 둘만 사는 곳이잖아요.”

그녀는 세완이 이 집에서 나가길 바라는 듯했다. 무례할 정도로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물론 그 무례가 세완의 입장에서는 원하는 바였다. 그러나 혼자는 아니었다. 아니 이은만 이 집에 뒀다가 무슨 짓을 당하라고!

일단 명색이 친모고, 사기를 치긴 했지만 범죄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네 앞에 세 명이 있거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까지 네 명을 의심하라는 말을 듣고 성장한 세완이다.

세완은 아무래도 이은의 친모가 수상했다.

“안 그래도 곧 나갈 생각이었어요.”

친모가 반색했다. 하지만 한국말은 원래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거다.

“이은아, 준비 다 했지?”

“아! 어. 그렇지.”

준비랄 것이 있나. 몸만 왔는데.

세완은 차키와 핸드폰, 이은은 그나마도 없이 핸드폰만 하나 달랑 든 채 별채에 던져진 참이었다.

사전에 짠 것은 아니지만 척, 하면 척인지라 이은이 세완에게 장단을 맞췄다.

흡사 세완이 나가면 이은도 나가겠다고 협박을 하는 꼴인지라 희경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긴 어딜 가? 한 달 동안은 이곳에서 지낸다며?”

다급한 나머지 희경은 그악스럽게 이은의 팔부터 움켜쥐고 말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저희가 한 쌍이어서요.”

팔을 잡힌 이은이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희경의 손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은을 보다 못한 세완이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직접 이은의 팔에서 희경의 손을 떼어냈다.

“아파하잖아요. 말로 하세요.”

세상 가벼운 모습으로 언제나 허허실실 웃는 세완이지만 때때로 그도 진지해질 때가 있다.

이은에게서 희경을 떨어뜨린 세완이 냉큼 이은을 자신의 등 뒤로 보냈다. 그리고 그제야 세완은 겨우, 이전처럼 가벼운 모습을 가장할 수 있었다.

이은은 희경에게 잡혔던 팔뚝을 연신 손으로 주물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희경이 다시금 이은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세완은 팔을 뻗어 희경의 접근을 막았다.

“어머님, 미안하지만 말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요.”

세완은 부드러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세완의 등 뒤에서 이은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가는 한숨을 토해냈다.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한 것이 이은의 특징인데 어지간히 놀라고, 어지간히 당황했나보다.

이은의 친모만 아니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다.

세완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이은에게 말했다.

“먼저 나가. 현관 지나면 바로 내 차 있어.”

희경의 핸드폰이 정지되어 있었을 때, 이은이 다시 서울로 가자고 했을 때, 그때 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은이 아닌 그 어느 누구라도 25년 만에 나타난 친모 앞에서 갈피를 못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바보 같은 그는 이은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핑계로 계속 뒤에 물러나 있기만 했다.

세완은 자신의 몸으로 희경을 막았다. 그리고 그렇게 이은이 현관으로 향하는 길을 확보했다.

“이봐요! 그쪽이 뭔데 이래?”

희경이 세완의 몸을 밀치며 소리쳤다.

세완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에 이은의 얼굴이 굳었고, 갑작스런 소란에 방 안에 있던 소녀도 밖으로 나왔다.

“엄마, 왜 이래? 무슨 일이야?”

아프다고 하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절대 그런 사람 같지 않았다.

소녀는 제 엄마를 지키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이봐요, 남의 집에서 도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

“소원아, 아니야. 들어가 있어.”

“뭐가 아니야? 저쪽 때문이지?”

소원이라고 불린 소녀가 이은과 세완을 번갈아 노려보면서 말했다.

얌전하게 생긴 데다가 희경이 언니 운운하는데도 별다른 말이 없이 인사를 하기에 순한 줄 알았는데 이쪽도 꽤나 성격이 있는 듯했다.

“이봐요, 왜 잘 살고 있는 집에 와서 분란을 일으켜요?”

소원의 말에 세완이 그녀를 제지했다.

“저기요, 학생! 그쪽은 좀 들어가 있어요.”

“들어가긴 뭘 들어가요. 남의 집에 마음대로 쳐들어온 건 그쪽들이면서. 빨리 우리 집에서 나가요.”

그녀의 말만 들으면 세완과 이은이 마치 불법가택침입이라도 한 것 같았다.

이은이 어이가 없어 하면서 답했다.

“우리가 가려고 하니까 지금 그쪽 엄마가 막는 거잖아요.”

내 엄마 아니고 그쪽 엄마.

희경과 소원이 이렇게까지 선을 쫙쫙 긋고 있다 보니 이은도 덩달아서 선을 열심히 그었다.

“말리긴 누가 말려요? 얼른 우리 집에서 나가요. 진짜 어디서 개뼈다귀 같은 것들이 굴러들어와서는.”

“소원아, 왜 그래? 그러지 마.”

이은과 소원이 날을 세우며 싸우자 희경이 아차 싶어 딸을 말렸지만 이미 감정은 격해진 뒤였다.

가족은 무슨! 

그래도 제 핏줄이라고 꾸역꾸역 돈까지 찾아서 달려온 자신이 정말 너무 바보 같아 이은은 날 선 눈으로 모녀를 노려보았다.

“이은아! 진정하고. 어차피 다신 안 보면 되잖아.”

세완이 서둘러 이은을 진정시켰다.

감정을 삭이려는 듯 허공을 향해 몇 번 숨을 토해낸 이은이 친모를 보지도 않고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희경이 이은의 이름을 불렀다.

“엄마 왜 그래? 그러지 마. 왜 굳이 연관되려고 해. 저쪽도 싫다고 하잖아.”

엄마가 결혼 전,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그 사이에서 아이를 하나 낳았다는 것은 소원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래도 부모님이 원하시니 어떻게든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질 나쁜 사람인지는 몰랐다.

오자마자 싸움에 분란이라니, 그깟 이부자매 따위 필요 없다며 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희경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이은이 너 정말 이렇게 갈 거니?”

그녀의 목소리에 이은이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걷는 속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은은 말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언젠가, 죽기 전 일말의 순간 정도는 이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는 전혀 그럴 일 없었다.

25년 전에 서울 아파트값 한 채나 되는 보험금을 챙겨서 자식도 버리고 떠났던 어미가 이제 와서 그 자식을 찾는 거면 상황 뻔하지.

잘 먹고, 잘 살았고 감정적으로도 큰 결핍이나 결함 같은 것은 없었다. 연관이 되면 이은 인생에 마이너스면 마이너스지 플러스가 될 일은 없었다.

“네 아빠에 대해서 궁금하지도 않아?”

저승에 있는 아빠도 딸이 사기꾼 친모에게 휘둘리는 것보다는 자신을 모르는 것이 낫다 생각할 거다.

이은이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던 순간이었다.

“넌 널 낳아준 사람에 대해서 궁금하지도 않아? 네 비밀이 뭔지 궁금하지도 않지?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희경은 이은 가까이 가려다 세완에게 막혔다. 그녀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지금 떠나면 내가 서울로 갈 거야. 너 찾아서 갈 거라고!”

이게 웬 미저리인가 싶었다.

역시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자식 버리고 간 부모가 개과천선해서 찾아올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확률보다 희박하다.

“이은아, 신경 쓰지 마. 차에 먼저 타 있어.”

세완은 일단 이은과 희경을 분리한 후, 필요하면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남편이 도박으로 집까지 날렸다는 것을 보니 그리 변변한 양반은 아닌 건 분명하고, 아마 여기저기에 빚도 꽤 있을 듯했다.

아마 이런 쪽으로는 이은보다 세완이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다. 당근도 주고, 채찍도 쓰면서.

양지만 보고 자란 이은과 달리, 세완은 본의 아니게 음지쪽도 보고 자랐으니까.

이은은 아직 모르지만, 늙은 너구리 같은 그의 집 노인네가 손자를 마냥 해맑게 키웠을 리는 없지 않은가!

표정이 서늘해진 세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희경 씨라고, 아는 이름이죠?”

희경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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