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비바람이 몰아치는 하늘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희경이 힐끔 별채 쪽을 바라보았다.
이은과 그 남자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비가 오는 것은 알려나?
가서 귀띔이라도 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건 아니고 이렇게 비가 올 때는 배가 못 뜬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이다. 배가 뜰 때까지 남자가 묵을 숙소 정도는 알아보게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쩌려는 거지? 묵을 곳은 알아보고 온 건가.”
희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가끔 초보 낚시꾼들이 이 섬에는 배가 하루에 한 번밖에 운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오는 경우가 있다.
그 남자도 혹시 그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희경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희경은 남자가 정말 자신이 묵을 곳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온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은이 묵을 별채에는 그녀의 딸 소원이 지낼 방도 있었다.
그녀는 아직 결혼도 안 한 딸의 방 옆에 낯선 남자를 재울 정도로 개방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가서 남자에게 뭐라고 하자니 이은이 또 뭐라 대거리를 할 것이 분명해 희경은 이래저래 가슴이 답답했다.
이은은 마치 싸우려고 온 사람 같았다.
25년 만에 이은을 불러들였을 땐, 희경도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원망으로 꽉 찬 아이에게 욕설을 들을 각오도 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들의 첫 만남은 무던했고, 그래서 희경은 잠깐 방심했었다.
일곱 살짜리가 보육원에서 잘 지내 봤자 얼마나 잘 지냈겠냐며 쏘아대는 말에 헉, 소리를 냈던 것은 그 이유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밉지 왜 안 밉겠어.”
기억도 나지 않은 오랜 과거에 그녀도 그랬다.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이 세상에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저주했었다.
남들은 다 있는 부모가 없다는 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정말 커다란 흠이었다. 그래서 희경은 오랜 세월 고아인 그녀 자신을 원망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은의 맘도 이해가 간다. 그녀 또한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은은 모른다. 그녀가 얼마나 힘든 선택을 한 것이었는지.
보육원에 데려다준 뒤 몇 번이고 그곳에 다시 갔다는 것을 이은은 모를 것이다.
보육원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 아이를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다시 데리고 올까 수십, 수백 번도 더 고민했는데 그 아이는 모르겠지…….
희경은 숨 쉬는 것조차 고통이었던 그 당시를 생각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돈이 있으면 뭐하나, 숨 쉬는 것보다 괴로운 배신감이 그녀를 옥죄었는데. 제 부모를 꼭 닮은 그 아이를 보고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얼굴도 바꾸고, 이름도 바꾸고, 과거조차 바꾸어가며 사는 삶 그 이상으로 이은의 존재는 희경에게 고통이었다.
사기꾼인 것을 알면서도 있는 돈 없는 돈 다 내밀어 재산을 탕진한 것은 이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잘 자랐어. 다행이지.”
희경은 가느다랗게 품고 있던 죄책감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이은은 귀하게 자란 티가 난다.
위탁이 되었다고 해도 남의집살이니, 눈칫밥 어지간히 먹고 컸겠다 싶었는데 그 아이는 잘 자란 것 같았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정면으로 상대방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 어디서든 어깨를 펴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그 정도의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이은에게는 그녀가 보육원에 데려다준 것이 복일 수도 있다. 희경 밑에서 자랐으면 지금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눈치 보고, 그악하다 못해 강퍅한 모습으로 삶에 찌들어 있었을 거다.
누가 봐도 잘 자란 것 같은 이은을 떠올리며 희경은 아주 잠깐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은을 생각하니 이은 옆에 있는 남자도 덩달아 떠오른다.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하는 생각이 희경의 머릿속을 스쳤다.
연인은 아니지 않느냐는 그녀의 말에 왜 아니라고 생각하느냐면서 이은이 발끈하긴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남녀관계 특유의 끈적끈적함이 없었다.
서로에게 꽤나 신뢰와 믿음이 있는 듯,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두 사람의 스킨십은 놀라울 정도로 담백했다.
연인은 아닌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아예 깔끔한 관계인가 하면 남자 쪽은 조금 마음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은은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그들을 떠올린 희경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고, 있어도 없어야 한다. 그녀의 손으로 직접 키우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은이 상처받는 것을 보고 싶진 않다.
희경은 혹시 모를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남자가 돈푼이나 있는 집 자손인 것 같았다.
포항식당의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겉모습이 워낙에 화려해서 처음에는 여자 등쳐먹는 제비가 아닌지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귀하게 자란 티가 났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녀도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은 아니니 딱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짐작이 간다.
돈푼이나 있는 집 자손으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란 사람! 이은이 데려온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정확하게 말해 그런 사람들의 부모들은 자신들이 사는 바운더리 밖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무시한다.
희경은 이은이 백희경이라는 어느 불쌍한 여자의 전철을 밟지 않길 원한다.
미운 건 미운 거고, 걱정스러운 건 또 걱정스러운 거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그 이상을 바라면 사달이 나는 법이다.
이은을 떠올린 희경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참 힘들었다. 이은도 그렇겠지만 이은을 보는 것 자체가 희경은 정말 힘이 들었다.
방긋방긋 웃으며 머리를 묶어달라고 하던 어린 날의 이은이 생각난다.
당근이 싫다고 그것을 골라내던 어린아이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것을 희경은 이은을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녀의 선택이긴 했지만 그게 왜 이렇게 가슴 시린지 모르겠다.
첫 만남에서, 작은 주먹을 쥐고 빨간 얼굴로 울던 그 꼬마가 갑자기 눈물 나게 보고 싶어 희경은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선택을 한 것은 그녀였고, 그 결과와 책임도 그녀의 몫이다.
희경은 꿀떡꿀떡 과거의 잔상을 하나하나 삼켜 나갔다. 그리고 때맞춰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그녀의 딸 소원이다.
* * *
남의 집에서 그 집의 주인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들은 정말 최고의 불청객이었다.
배와 헬기를 수배하던 이은과 세완은 갑자기 들리는 현관 문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곧 희경과, 그녀의 딸 소원을 별채 현관 앞에서 마주해야만 했다.
“이쪽은 소원이야. 네 동생.”
희경이 제 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쪽은 이은이. 네 언니!”
이번엔 이은을 가리켰다.
소원과 이은은 어색한 눈인사를 했다.
“안녕…… 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소원의 인사에 이은도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를 건넸다.
시에서 주는 상도 받았다고 하더니 애는 착해 보였다.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지만.
아직 미성년자의 티를 벗지 못한 말간 얼굴이 이은은 참 낯설고 불편했다. 소녀도 그런 듯 자꾸만 이은과 희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바람난 남편의 불륜 상대를 소개받아도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잘도 동생이며 언니라는 말이 나온다며 이은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런데 인사만 하고 갈 줄 알았던 희경이 쭈뼛거리며 이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쓱 하고 딸의 등을 밀며 말했다.
“너는 일단 네 방에 들어가 있어.”
“내 방이 왜 여기에 있어? 내 방 본채에 있잖아. 나 오늘부터 여기에서 자?”
이은 방의 옆이 재혼해서 낳은 딸의 방이라고 하더니 원래 별채에서 지내던 것은 아니었나보다.
희경의 눈짓에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은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한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제 방이 어디인지 인지는 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아예 한 번도 안 묵었던 곳은 아닌 듯했다.
이은이 무색의 눈으로 친모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친모에게 질문을 해야 하나 싶어 그녀가 극심하게 갈등했다.
희경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자매지간이잖니.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아버지가 다르잖아요.”
“아버지가 다르니까 더 친하게 지내야지.”
이은은 아버지가 다른데 자매는 무슨 자매냐고 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희경은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가 달라 소원해질 수 있으니 더더욱 친하게 지내야 한다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순간 이은은 설마 딸을 맡기려고 자신을 부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미는 아프고, 그 아비라는 자는 아직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도박으로 집을 날릴 정도의 위인이면 충분히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이야기할게요. 난 쟤 못 맡아요. 몇 살인지는 모르겠는데 저 정도면 다 큰 거지. 자기 몸은 혼자 잘 건사하겠네.”
일곱 살에 버려진 그녀도 혼자서 잘 살아남았다. 고등학생 아니면 대학생. 그 정도면 충분히 제 몸 알아서 잘 건사할 거다.
야박한 소리라는 건 알지만 말도 안 되는 기대는 처음부터 그 싹을 잘라 버리는 게 맞았다.
차라리 보육원의 다른 아이들을 돌보지, 친모의 귀한 딸을 모시고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서울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이후였다. 이은은 필터 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은 친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도 그럴 생각 없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딸은 내가 챙겨!”
“그럼 다행이고요.”
이은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잘못 짚었나 싶긴 한데 그래도 이런 일은 사전에 언급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볼 것, 못 볼 것 할 것 없이 오죽 많이 봤어야지. 경험상 자식을 버렸다가 뒤늦게 찾아온 부모들은 꼭 골칫거리를 끌어안고 오더라.
어릴 때 버려놓고 보육원 퇴소를 얼마 남기지 않고 다시 찾아오는 부모들은 100이면 99는 자립정착금과 자립수당, 지원금을 노렸다.
나머지 1은 보증이라든가, 장기기증이라든가, 보호종료아동에게 주어지는 LH 임대주택 등을 노렸다.
어쨌든 순수하게 연락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다.
부모에게 얽히는 아이들을 보며 어리석다고 혀를 찼는데 어쩌다 보니 그녀가 그렇게 됐다.
하지만 돈을 주는 것과, 어느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은 다르다. 심지어 그 아이가 그녀를 버리고 모친이 재혼을 해서 낳은 아이라면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