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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20)화 (20/100)

20화

이은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없다. 이 회장께는 몇 번이고 절을 올려도 부족할 만한 은혜를 입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지금은 그런 말들이 사라졌지만 노 회장이 어린 여자아이 위탁을 맡았다는 이야기에 좋지 않은 말들이 숱하게 나왔었다.

이 회장이 유명한 고승처럼 고매한 인격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범부의 인품은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대로 이 회장을 어린 여자애에게 흑심을 품는 음흉한 노인네로 만들었다.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음에도 누구 하나 사과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친모가 인터넷에 이상한 글을 올려 온갖 악의적인 이야기를 섞어낸다고 가정하면, 그때와 같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어 이은은 극도로 몸을 사렸다.

그때, 핸드폰으로 배편을 검색하던 세완이 나직한 탄식을 터트렸다. 이은이 물었다.

“왜?”

“배가 없네. 하루에 한 번 운행하는 거였나 봐.”

이상할 정도로 시간이 딱딱 맞아떨어져서 별반 기다리지도 않고 섬에 들어왔었다.

때문에 배가 없는 상황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이은도 당황했다.

“그럼 어떡해?”

“어떡하긴. 부르면 되지.”

배를 아예 한 척 빌리겠다며 세완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이은과 통화했던 윤 비서에게 전화해 배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배의 크기나 금액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최대한 빨리 보내 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세완이 전화를 끊었다.

이은은 망연한 눈으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쉬운 인생이다. 같은 집에서 같은 밥 먹고 살았는데 쟤는 참 인생이 쉬웠다.

“얼마나 들 거 같아? 할부로라도 갚을게.”

그녀로 인한 것이니 세완에게 금전적 피해만큼은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완은 언제나 그렇듯 해맑았다.

“에이, 얼마 한다고.”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 세완의 등짝을 때리고 싶었다.

‘네 돈이야? 네가 벌었어?’

잔소리를 하고 싶지만 원인 제공자가 그녀이다 보니 이은은 할 말이 없었다.

이은은 애써 세완을 머리에서 지우고, 그녀의 연봉을 훌쩍 뛰어넘을 것 같은 배 대여료를 어떻게 납부할 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파트 중도금 때문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쏟아붓고 있어서 여윳돈이 없긴 한데 적금을 몇 개 깨고, 대출을 받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은이 조심스럽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찰나였다.

“태풍주의보라구요?”

이은이 놀라 세완을 돌아보았다. 통화를 하는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헬기도 힘듭니까? ……네. 알았습니다. 풀리는 즉시 부탁드릴게요.”

“왜? 지금 비 온대?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

“잠깐만.”

통화를 끝낸 세완이 방을 나서 거실로 걸어갔다. 이은도 그를 따랐다.

잠시 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멈췄다.

거실 창밖으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방에 창문이 없다 보니 비가 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세차게 비가 내리는 거실 창밖을 보던 이은과 세완은 서로를 향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 * *

되는 일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없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에서 우박 같은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기상청 일기예보가 종종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폭우도 아니고 태풍이라니, 웬 날벼락 같은 일에 이은과 세완이 방에 주저앉아 똑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맞댔다.

“어떻게 하지?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에 있을까?”

“언제 그칠 줄 알고?”

“…….”

“기다려봐. 배 수배하는 대로 연락 달라고 했으니까.”

헬기는 도무지 위험해서 안 되고, 그나마 만만한 것이 배인데 폭풍이 워낙 세다 보니 배도 전부 운항 정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선주가 승낙을 한다고 해도 위험 구역 출입 통제로 인해 진입 선박에 안전 해역 이동 및 대피 명령이 떨어지다 보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변덕스러운 건 봄 날씨 아니었어?”

“여름으로 바뀌었나 보지. 지구온난화잖아. 걔도 한 번쯤은 변화를 주고 싶은가 봐.”

말인지 막걸린지 필터 없이 터져 나오는 세완의 근본 없는 농담에 이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탄식하는 이은의 모습에 세완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별로야? 나름대로 농담이라고 한 건데.”

“내가 누누이 얘기하지만 넌 여자 만날 때 그냥 입 다물고 있어. 그럼 충분히 인기 있을 거야.”

이은이 마치 호적메이트 같은 매정한 평가를 내렸다. 너랑 나는 호적메이트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점수가 박하냐며 세완이 투덜거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은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은이 핸드폰으로 연신 무엇인가를 검색하고, 정리하는 사이, 세완은 턱에 손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다. 아니, 관찰했다.

머루알처럼 까만 눈동자가 영민하게 반짝이고, 작고 동그란 입술이 쉴 새 없이 오물거렸다.

커튼처럼 드리운 칼 단발이 느슨하게 흔들려 이은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열심히 일하는 여자는 아름답다. 이은이 얘가 이런 얼굴이었나? 세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석 같은 미녀의 모습은 아니지만 이은에게는 그녀 특유의 활기참과 매력이 엿보인다.

“네가 예쁜 편이었구나.”

세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은은 얘가 어디서 헛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잠시 그에게 시선을 두다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냥, 나는 뭐…….”

무엇을 의도하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세완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가 더 당황했다.

뭐라고 수습해야 하나 끙끙대고 있는데 이은이 그를 대신해 상황을 정리했다.

“이제 알았어? 나 이래 봬도 인기 많아.”

자랑하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말이 튀어나왔다. 사람을 호환마마 보듯 바라보는 친우에게 이은이 진실을 알렸다.

“……네가?”

멋도 모를 땐 이은에게 첫사랑 비슷한 뭔가를 느끼기는 했었다.

하지만 사람을 사흘들이로 쥐 잡듯이 잡는데 로맨스는 무슨.

그들 사이에 로맨스가 있다면 그건 로맨스로 가장한 스릴러일 것이다. 어쩌면 공포영화일 수도 있다.

뜨악한 표정의 세완을 본 이은이 발끈하며 말했다.

“이름 얘기 해줘? 들어본 사람 많을 텐데?”

“에이, 설마.”

그와 이은을 동시에 아는 사람이라면 이은에게 반할 리가 없다. 있다면 최소 마조히스트다. 그러니까 피학성애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변태는 없을 거라며 세완은 당당하게 이은을 보았다. 하지만 이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이름을 들을수록 그의 당당함이 점차로 무너졌다.

“성준이 형이?”

“민기가?”

“방학준 걔는 미치기라도 한 거야?”

세완이 절규하며 부정했다. 이은은 그런 세완을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네 친구들 전부 다 나한테 한 번씩은 고백했는데?”

친구들보다는, 그 친구들 부모님의 비율이 높긴 하지만 이은은 당당하게 진실을 왜곡했다.

망나니 조련에 일가견이 있다는 정평에 이은의 몸값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이은은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나한테 잘하라 말하며 그의 볼을 장난스럽게 두드렸다.

도도한 여왕님, 아니 그보다는 모 도박영화의 이대 나온 여사님 같은 모습에 세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누워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은의 얼굴은 역시 뭔가 묘했다.

“왜?”

또랑또랑한 눈을 반짝이는 이은의 모습에 이내 털어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묘한 감정이었다.

에이, 에비!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세완은 이은 몰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연애를 한 지 너무 오래되긴 했나 보다. 가족 같은 김이은에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아니, 가족을 떠나 이은은 죽었다 깨도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세완은 착하고 얌전한 여자가 좋았다. 이은보다 덜 폭력적이고, 이은보다 덜 경쟁적이고, 덜 치열한 사람이 좋았다.

굳이 구분하자면 세완은 초식동물이고, 이은은 육식동물이었다.

그라고 스릴을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은처럼 온몸을 내던져 야망을 불태우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에겐 사회적 성공보다 가족, 휴식, 평화, 취미와 같은 삶의 여유가 훨씬 더 중요했다.

세완 같은 남자가 이은 같은 여자를 만난다면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죽어라 싸운 뒤 종전선언 같은 이혼을 하거나, 전리품처럼 디스플레이되어 산 채로 박제가 되거나.

박제되는 것이 남자 쪽인지 여자 쪽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이세완일 거다.

세완은 그녀와 싸워서 이기는 건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지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그들이 결혼을 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세완은 상상했다.

토끼 같은 아빠와 사자 같은 엄마를 두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살쾡이 같은 딸? 늑대 같은 딸? 어쩌면 배트맨 같은 딸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발 조커 같은 딸만 아니면 좋겠다.

지구를 정복하겠다고 하는 딸이 생기면 어째야 할지 세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회장은 딸의 호전성에 매우 높은 점수를 줄 테지만 그는 태생부터가 평화주의자였다.

“나는 전투 쪽은 안 맞는데…….”

이 회장의 강권으로 대한민국 육군 병장으로 전역을 하긴 했지만 그는 정말 평화주의자였다.

세완이 육아의 방향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이세완!”

우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완은 깜짝 놀랐다. 말 그대로 팔다리를 흔들어 몸서리를 쳤다.

기겁하는 세완의 모습에 이은이 더 놀란 듯했다.

“깜짝이야! 왜 이렇게 놀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사람이 몇 번이나 불러도 몰라?”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망상을 했었기에 세완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냥. 비가 언제 그치려나 싶어서. 여기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잖아. 비가 와서 그런지 기분도 이상해지는 것 같고.”

그러고 보니 어떤 논문에서 본 것 같다. 비가 오면 정신이상이 생길 확률이 높다고.

없어도 있는 거다. 세완은 강력하게 우겨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은은 반론하지 않았다.

“그렇지. 비가 와서 그런지 기분이 이상해. 우울하고, 짜증나고, 답답하고. 어서 비가 그치면 좋겠다.”

이은이 쓸쓸하게 말했다.

망상에 빠져 잠시 잊고 있었다. 이은의 상황을 떠올린 세완은 어쩐지 자신이 인간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미안하다.”

“뭐가?”

“그냥. 무조건. 전부 다.”

세완이 고개를 박고 제 잘못을 사죄했다.

이은은 세완의 행동에 배를 못 구해서 그런 것이리라 지레 짐작하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별것 가지고 다 그런다. 비가 와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이은답지 않은 다정한 위로에 세완은 더 미안해졌다.

만약 서울로 돌아간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소개팅을 받아 솔로를 탈출하겠다며 세완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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