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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19)화 (19/100)

19화

25년 만에 찾아왔다는 것 자체도 의심의 여지가 다분한데 심지어 그 주인공이 보험 사기꾼이다.

한량 같은 짓은 많이 했지만 그래도 법과 원칙의 테두리 안에서 큰 사고는 안 치고 살아온 세완이 이은에게 말했다.

“난 언제나 네 선택을 지지하지만, 이건 좀 불안한 부분이 없잖아 있어.”

다른 건 걱정이 안 되는데 이은이 마음을 다칠까 그게 가장 큰 걱정이다.

걱정스런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던 것은 언제나 이은이었다. 입장이 뒤바뀐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이은이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욱하는 심정으로 일단 지르고 봤는데 확실히 친모에겐 뭔가 불안한 측면이 있긴 했다.

그녀가 이은에게 어떤 의도로 연락을 했는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그리고 돌아가신 부친이 어떤 분이었는지가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이은은 저울을 놓고 비교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언제나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그중에서 나은 것을 택했다.

A회사와 계약을 하느냐, B회사와 계약을 하느냐!

C상품을 주력으로 밀 것인가, D상품을 주력으로 밀 것인가!

E직원을 선택할 것인가, F직원을 선택할 것인가!

세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태반이 이은의 손에서 결정 났다. 그녀의 이름으로 결정한 것도 적지 않았고.

그런 그녀임에도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복잡한 표정의 이은을 보며 세완이 그녀의 머리를 헤집었다.

“마음대로 해. 강요하는 건 아니야. 있어 보자. 휴가 왔다고 생각하지 뭐.”

문제가 생겨봤자 돈밖에 더 떼이겠냐? 휴가비 바가지 썼다고 생각하자.

돈 많은 금수저의 말에 이은이 그를 흘겼다.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는 게!’

이 회장의 품 안에서 어려운 것 모르고 자란 것은 이은도 마찬가지지만 세완과는 급이 달랐다.

친손자와 위탁 아동의 차이가 아니라 이건 그냥 태생의 문제였다.

태어날 때부터 숨 쉬는 것만으로도 재산을 불려온 금수저는 돈의 가치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질투와 시기심으로 이은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고, 세완은 맹수를 조련하듯 그녀 옆에 나란히 누워 이은의 머리를 토닥였다.

“쉽게 생각하자고. 그냥 돈 주고 산다고 생각해. 네 엄마와 관계된 부분을. 그럼 쉬워지는 거야.”

너의 심장은 돈보다 가치가 있다며 세완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달콤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손길이 부드러워서 그런 것인지 사나운 맹수는 발톱에서 힘을 빼고 사르르 눈을 감았다.

너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귀한 존재라는 말이 귓속을 통과해 심장에 박혔다.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닌데 오늘따라 이은은 평소답지 않은 행동만 계속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교정이 안 된다. 바보같이.

“아빠에 대해서는 기억이 안 나.”

“……전혀?”

“응. 전혀.”

친모가 꺼낸 부친의 이야기에 이은의 발걸음이 잡힌 것은 그래서였다.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나?”

“없었지. 너나 나나, 옛이야기 떠올려서 편한 사람은 아니니까.”

세완이 이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답했다.

하나는 부모를 모두 잃었고, 하나는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에게 버려졌다. 누구도 옛이야기를 달가워할 처지의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의식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피했는지도 모른다.

25년 동안 함께 살면서도 이은과 세완은 아직 서로를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내 부모님은,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나 때문에 속 썩어 하신 건 알아.”

“왜?”

“내가 개가 되고 싶다고 했거든. 개는 먹고 자고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편하냐고.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한 번은 개집에서 잤거든. 나는 잘 잤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온 가족이 다 날 보고 있더라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지.”

어릴 때 기억은 흐릿한데 그중에서 얻어맞은 기억만 선명했다.

이은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남자를 보며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세완을 향해 몸을 돌린 이은이 물었다.

“아니 개집에서 왜 잔 건데?”

“나야 모르지.”

세완이 눈썹을 으쓱, 하면서 답했다. 그게 기억나면 스물일곱 살 때 기억이지 일곱 살 때 기억이겠냐며 반문했다.

세완의 말에 심각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우리 애물단지, 할아버님께서 25년 동안 널 키우느라 정말 고생이 많으셨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라도 효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데려갈지 참 심란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은은 흐린 눈으로 세완을 바라봤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차마 네 미래 와이프를 동정했다는 말은 못 하고 이은이 어설프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 RRR

이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회사였다.

누워있던 이은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왜?”

“회사.”

입모양으로 대답한 이은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과장님, 저 비서실 윤 대리입니다.」

그녀가 없는 비서실을 채우기 위해 상무실로 임시발령된 회장실 선임비서였다.

“무슨 일 있어요?”

이은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언젠가 연락이 오리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는지라 이은은 회사에서 터질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윤 대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일이기에 그래요?”

수습비서도 아니고 선임비서가 말을 채 잇지 못할 정도로 큰일이 뭐가 있을지를 상상했다.

‘혹시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나?’

이은은 정말 최악의 상황까지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그녀보다 세완에게 먼저 연락이 갔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은은 미동 없는 세완의 핸드폰을 힐끗, 보며 다시 한번 채근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래요?”

윤 대리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어머님과 통화하셨어요?」

“네?”

「회사로 어머님께 전화가 왔는데 과장님이 정말 회사를 그만둔 게 맞느냐고 물으셔서요.」

회사 번호는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회사로 전화를 했나 싶어 이은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친모와의 통화를 위해 볼륨을 높여 놓은지라 이은 옆에 있던 세완도 윤 대리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세완도 놀라 몸을 반쯤 일으켰다.

“회사 번호 알려줬어?”

알려준 적 없다고 고개를 저어 대답한 이은이 윤 대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그런 적 없다고요. 그런데 이상해서요. 어머님이신데 과장님이 휴가를 내신 것도 모르신다는 것도 그렇고, 과장님은 회장님께서…….」

윤 대리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은을 키운 것은 이 회장인데 어떻게 친모라는 존재가 갑자기 나타날 수 있냐는 것이다.

회사의 모든 사람이 그녀의 출신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윤 대리는 원래 회장실 선임비서였다. 그녀가 누군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안 했어요?”

「언제부터 회사에 안 나왔는지, 혹시 그만둔 건데 제가 모르는 건 아닌지를 물으시더라고요. 그리고 흘리듯이 하신 말씀이시긴 한데 동생 분이 취업을 하려고 하는데 혹시 신입사원 연봉이 얼마인지도 물으셨고요. 입사할 때 스펙이랑.」

이것저것 곁다리를 붙여넣긴 했지만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신입사원의 연봉이 아니라 그녀의 연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눈치코치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회장실 비서라는 것이 친모의 패착이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회사에는 별일 없죠? 수고해요.”

「죄송합니다.」

“뭘요. 고마워요. 수고하세요.”

자세한 것은 몰라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아챈 모양이었다.

윤 대리의 사과를 들으며 전화를 끊은 이은의 표정이 황망했다. 세완이 이은에게 통화의 내용을 물었다.

“몰라. 잠깐만. 나 머릿속 좀 정리하고.”

“정리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회사 번호는 도대체 왜 알려준 건데?”

“알려준 적 없어. 그걸 왜 알려줘. 핸드폰이 있는데.”

“알려줄 만한 사람은? 아까 식당 아주머니도 너보고 서울에서 성공했다면서 돈 많이 번다고 했잖아. 너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머니 연락처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구야?”

“직장인이 성공해봤자 거기서 거기지 무슨 돈을 많이 벌어……. 아! 원장님!”

그러고 보니 보육원 원장이 있었다.

일곱 살 때 이 회장의 집으로 들어간 이후 이은과 개인적인 연락을 한 적은 없지만 청평보육원 자체가 이 회장이 도맡아 후원하는 곳이다.

회사에 입사한 이후 몇 차례 봉사활동을 갔고, 이 회장의 지시를 받아 후원 물품 전달하러 여러 번 갔었다.

그러면서 회사 전화로 통화를 한 적도 있었다.

회사 번호는 그때 알게 된 것일 거고, 이은에 대한 이야기도 오랜만에 연락이 된 친모에게 그녀가 버린 딸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원장이 했다고 생각하면 퍼즐이 맞았다.

갑자기 찾아온 부모로 인해 골치 썩거나 상처받은 애들을 한두 번 보신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그녀에게 묻지도 않고 회사 번호를 친모에게 알려준 원장도 짜증이 나지만, 무엇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굳이 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녀가 정말 회사를 그만둔 것이 맞느냐고 물어본 친모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기에…….

이은이 복잡한 머리를 손톱으로 벅벅 긁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김이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괜찮지만 그 범위가 회사까지 넓어지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그녀 개인의 커리어적인 측면으로 봐서도 그렇지만 혹시 이 회장에게 어떤 피해라도 끼칠까 이은은 그게 가장 두려웠다.

친모가 그녀에 대해서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이 회장에게 손톱만큼의 구설이라도 생기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녀의 과거에 어떤 히스토리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든, 그 모든 것이 이 회장보다 우선하진 않는다.

그렇게 오래도록 고민했었는데 결론은 참 쉽게 내려진다.

‘미안. 최대한 피해 안 주도록 노력할게.’

이은은 세완의 말간 눈을 마주 보며 다시금 다짐했다.

그런 이은의 마음을 모르는 세완이 그녀를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야지 뭐 어쩌겠어.”

부모 복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옛날이 더 행복했던 것도 같다.

“배부터 알아보자. 그냥 바로 떠나.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이은은 이곳을 떠나 친모와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가 회사까지 알고 있는데 그게 어디 쉬울까마는 여차하면 부서를 옮기고 이름을 바꿀 생각까지 했다. 피치 못할 상황이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고려해볼 거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친모가 보험사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정체를 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주소지 등을 알 수 있는 주민등록등본을 떼는 것은 친부모만 가능한데 현재 이은의 친부모는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혹시 인터넷에 무슨 글을 올려 분탕을 치려고 해도 죽었다 알려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면 친모는 행동에 제약이 생길 거다.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스스로가 참 어이가 없어 이은은 헛웃음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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