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은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저기요!”
“고작 한 달이야. 내가 아무리 모진 어미라도 한 달도 투자 못 하니?”
이은의 친모도 맞대응하며 소리쳤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더니 지금 이은의 모습이 딱 그 꼴이었다.
“가자! 더 이상 나 여기 못 있겠어.”
이은이 세완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세완이 이은의 뒤를 따르려던 찰나였다.
친모가 이은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욕하고 싶으면 욕해. 때리려면 때려. 이것도 저것도 다 싫으면 그냥 낳아준 거 갚는다고 생각해.”
이은에게 매달리는 그녀는 어딘가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2년이라고 했던 걸 한 달로 줄였어. 그럼 그 한 달은 들어줘야지! 어쩌면 그렇게 사람이 독해?”
친모는 그녀에게 빚진 걸 내놓으라 따지는 사람처럼 대거리를 했다. 이은은 너무 기가 막혀 웃음 밖에 나오지가 않았다.
도대체 그놈의 한 달이 뭐기에! 2년만 같이 살자고 하더니 이제는 한 달!
정말 무슨 시한부 목숨이라도 되나 하는 생각이 이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 사람이 많이 아프다는 친모의 남편 말이 생각났다. 그는 친모에게 신장이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었다.
다소 마른 편이긴 하지만 아픈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은데…….
‘이대로 떠난다’와, ‘잠시라도 그녀 곁에 머문다’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이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아프다 한들 신장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녀에게 이식을 부탁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죽기 전, 자신이 버린 딸과 함께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욕심도 많으셔라. 그런 거면 버리질 말지. ……자식까지 버린 거면 잘 살기라도 하지!
자식 버리고 돈 챙겨 사라진 친모가 잘 먹고 잘 살았다면 그것도 짜증 나겠지만, 누가 봐도 힘들게 살고 있는 별 볼 일 없는 시골 아주머니라는 사실은 더 짜증이 났다.
이은은 자신이 도대체 어떤 심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다 짜증 났다.
주체할 수 없는 심기 불편 속에서 이은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친모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이은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뚫어져라 보는 세완의 눈빛도 느껴졌다.
이대로 떠난다면 평생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뒤끝 하나는 끝내주게 긴 자신을 아는지라 이은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은의 눈에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친모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세완이 들어왔다.
이은의 눈동자가 갈등 속에서 방황했다. 그런 이은을 눈치챈 것인지 세완이 자신의 몸으로 슬쩍 이은의 친모를 가렸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굳이 지금 결정 안 내려도 돼.”
그는 네가 뭘 선택하든 그녀를 지지한다고 했다. 조심스레 이은의 눈치를 살피는 세완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동시에 궁금증도 생기게 했다. 얘는 도대체 뭘 알아낸 것일까!
찰나에 든 수없이 많은 생각과 고민이 이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그녀에게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면 다른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부터 친모의 곁에 머물기로 결정하고 온 걸음이었고, 무엇보다 친모의 이상한 태도가 이은은 자꾸 거슬렸다.
이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래요. 한 달. 여기 있을게요. 하지만 한 달 뒤에는 알려주셔야 할 거예요. 도대체 뭘 감추고 있는지, 나를 왜 여기까지 불렀는지, 그리고 나한테 해줄 이야기가 뭔지!”
그 안에는 죽은 부친에 대한 것도 있을 거고, 지금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친모에 대한 것도 있을 거다.
뭐가 됐든 이은은 그녀를 탈탈 털어버릴 거다. 그리고 후회 없이 뒤돌아설 거다
* * *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자 친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은을 방으로 안내했다.
이은이 머물 곳은 별채라고 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해놨었다는 방은 오래된 티는 지울 수 없지만 깔끔하고 정갈했다.
“옆방은 우리 딸 방이고, 좀 있으면 들어올 거야. 들어오면 애 아빠랑 같이 소개시켜줄게. 쉬어.”
이 방에 남아 있으면 이은이 다시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 것 같은지 친모가 도망치듯 밖으로 나섰다.
세완을 보며 잠깐 머뭇거리긴 했지만 이은을 자극하고 싶지 않은지 그녀의 친모는 말없이 방문을 닫았다.
“하나, 둘, 셋.”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딱 셋까지 센 이은이 세완에게 다가와 그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불어.”
이은이 운다면 가슴을 빌려줄 각오를 되짚고 있던 세완이 당황했다.
“……뭐, 뭘?”
지나치게 자주 보던 모습인지라 세완은 순간 이곳이 회사인 줄 착각했다. 자신이 또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돌이켜보는 한량을 보는 이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알아낸 거야?”
“아!”
세완은 그제야 이은의 말뜻을 알아챘다.
얘는 왜 뭘 물어도 이렇게 살벌하게 물어보나 싶어 세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김이은은 태생이 맹수과였다. 사자나 호랑이처럼 뭐든 걸리기만 하면 숨통을 물어뜯는.
한때 재계 사람들이 세완이 아닌 이은을 이 회장의 친손주로 알았을 정도로 그녀의 성질머리는 이 회장을 꼭 닮아 있었다.
위아래로 시집살이…… 까지는 아니고 층층시하로 전부 다 맹수과인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떠올리며 세완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요한 건 이은의 종족이 아니라 그녀의 친모다.
“앉아. 얘기가 길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세완이 이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세완은 그가 들은 짧은 보고를 요약정리해서 들려줬다. 이은은 그때의 세완이 그랬듯이 지독하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죽은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세완도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그건 그가 답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함께 돌아가신 것으로 나와. 기록엔.”
멀쩡히 살아 있는 친모를 세완과 그녀, 두 사람이 모두 보았다.
“……유령 아닌 거 맞지?”
이은이 그녀의 모친이 있을, 본관이 있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지.”
그녀답지 않은 멍청한 질문에 세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의 질문이 어처구니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은이 손가락을 내리며 세완을 곱게 노려봤다.
그 서슬 퍼런 모습에 세완은 미안하다며 양손을 모아 사죄했다. 이은은 한 번만 봐준다는 듯 재차 눈을 흘기며 손을 내밀었다.
척하면 척인지라 세완은 핸드폰을 켜 그가 받은 보고서 파일을 연 뒤, 그것을 이은에게 넘겼다. 이은은 천천히 보고서를 훑었다.
95년 8월에 책임보험 보상한도액이 대폭 상승했는데, 모친은 그 상승의 직접적 수혜자였다.
가해자 자동차보험에서 지급된 것만 1인당 3천만 원씩 총 6천만 원, 부모님의 자동차보험에서 나온 것까지 하면 거의 1억이었다.
보고서의 아래쪽에는 당시 대기업 신입사원의 연봉이며 각 지역별 아파트 가격을 정리해놓았다.
당시 S전자 신입사원의 연봉이 1800만 원 정도로, 1억이면 서울의 평범한 25평 아파트는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이은은 보고서를 읽다 말고 덮어버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세완에게 핸드폰을 던지듯 건네준 이은이 바닥에 몸을 펴고 드러누웠다. 오래된 백열등 전구가 아프도록 눈을 찔렀다.
“닮았어?”
주어, 목적어가 없는 질문이었지만 세완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너랑 닮은 건 모르겠고, 사진이랑은 똑같더라.”
사실은 많이 닮았다. 그리고 사진 속의 모습과는 더 많이 닮았다.
그녀의 모친은 이은이 어릴 때 함께 찍은 사진 속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별반 차이가 없었다.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예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귀신 말고 사람 맞지?”
“암만.”
“보험금 사기로 확 신고해버릴까?”
“할 수 있겠어?”
“못 할 것도 없지.”
이은은 세완과 시시껄렁한 헛소리를 하며 울분을 풀었다. 직접 112에 신고를 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말이라도 해야 화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은은 치솟는 울화에 벌떡 몸을 반으로 접으며 소리쳤다.
“아니, 그럼 그 돈은 다 어쩌고 이러고 살아!”
남편이 집을 도박으로 날렸다는 것은 들었다. 하지만 천덕꾸러기 같은 딸년까지 버리고 갔으면 잘 살아야지 왜 이러고 살아!
별채까지 있다고는 하지만 다 쓰러져가는 시골집에, 심지어 변변한 전등도 없어서 천장에는 백열등 전구 두 개를 붙여 놨다.
누가 봐도 전 재산 다 날리고 오랫동안 비워놨던 시골집에 들어와서 사는 풍경이다.
“릴렉스. 릴렉스.”
세완이 장난처럼 토닥이며 이은을 달랬다. 그런데 그게 더 짜증 났다.
“아니, 릴렉스가 아니라! 내 말이 틀려? 딸까지 버리고 갔으면 잘 살아야지 왜 이러고 살아? 날 버렸듯이 지금 남편이랑 딸도 버리면 되잖아. 야반도주라고 좋은 거 있잖아. 그런데 왜 이러고 살아? 나는 별로 안 예뻐서 버리고, 그 딸이랑 남편은 죽어라 사랑스러워서 끼고 사는 거야?”
세완이 그녀의 모친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어쩔 수 없어서 이은은 다다다 세완에게 쏴붙였다.
그렇지, 그렇지, 만만한 게 나지.
이은 한정으로 최강의 호구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은의 등을 토닥였다.
그 손길조차 짜증 난 이은이 세완의 손을 뿌리쳤다.
머리 아파 죽겠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 이은에게 세완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백희경이라는 사람은 알아?”
“그건 또 누구야?”
“네 후견인.”
“내 후견인은 할아버지잖아.”
네 할아버진지, 내 할아버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회장이 내 후견인 아니냐며 반문하는 이은에게 세완이 핸드폰 액정의 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보험금 받아간 네 후견인.”
이은이 세완에게서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알아?”
“전혀.”
이은은 다시금 보고서를 정독했다.
그러나 뚫어져라 봐도 그녀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백희경이라는 석 자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아는 게 있을 리가 만무하다.
“가서 물어볼까?”
돈 다 어쨌느냐며 가서 2차전이라도 하려는 듯 이은이 싸움닭처럼 물었다.
“그보다는 가방을 싸는 게 먼저 아닐까?”
세완이 이성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가족이라는 것 때문에 쉽게 말을 못 꺼내서 그렇지 세완은 정말 이은의 친모라는 사람이 수상했다.
말이 쉬워 보험금 사기지, 보통 사람은 그런 건 생각도 못 한다.
도대체 뭘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25년 동안이나 신분을 속이고 산 것 자체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다? 도대체 누구의 신분으로 살고 있는 것이기에!
세완은 당연한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이은에게 불안함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