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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17)화 (17/100)

17화

방금까지만 해도 모친과 함께 포항의 앞바다며, 과메기며, 그녀가 키우는 텃밭의 채소 이야기를 했다.

비즈니스 가면을 뒤집어쓰고 매너 있는 척을 했다. 하지만 여기가 회사도 아니고! 이은은 그냥 본인의 성격 그대로를 가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혈육은 무슨 혈육. 안 보면 그만인데. 2천만 원은 개뿔이!

만약 친모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면 조금이라도 보태주고 싶다며 돈을 찾아온 스스로의 머리를 한 대 세게 때려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잘 지냈다고 들어서.”

“……부모 없이, 일곱 살짜리가 잘 지내면 얼마나 잘 지냈겠어요.”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자도 언제나 가슴이 허허로웠다.

누구보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서.

아니, 사실은 그것보단 세상천지 혼자라는 것이 가장 외롭고 쓸쓸했다. 뒷말하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은 덤이었고.

“아까 엄마도 고아셨다고 하셨잖아요. 엄만, 잘 지내셨어요? 보육원이 편하셨어요?”

이은은 작정하고 모진 말을 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온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던 것은 거짓말이다.

그녀도 몰랐는데, 이은은 친모에게 원망을 하고 싶어서 온 것 같다. 그 어렸던 나를 도대체 왜 버렸냐고!

죽음까지 가장하면서 버린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묻고 싶었다.

죽기 전에 얼굴 한 번 보고, 버린 이유라도 묻고 싶어서! 날 버리고 행복했냐고 묻고 싶어서!

그래서 이은은 다시 한번 물었다.

“저 왜 버리셨어요?”

그녀가 남편을 잃었다면 이은은 부모를 동시에 잃었다.

남편이 죽자마자 보육원에 바로 데려다 놓을 정도로 자신이 그렇게 짐이었냐고 이은이 다그치듯 물었다.

가장된 평화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은은 지금 누구보다 마음이 편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비즈니스 마인드는 무슨!

세완이 도대체 뭘 알아냈든, 그건 이은이 친모와의 관계를 이어갈 때만 의미가 있는 거다.

이대로 판을 깨버리면 친모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은에게 연락을 했든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돈이든 뭐든 그녀가 아무것도 안 주고 안 보고 안 듣겠다는데 뭐! 왜! 뭐!

후원자의 손자를 두들겨 패던, 이 회장조차 혀를 내두르던 이은의 성질머리가 폭발했다.

멍하니 있던 세완이 발끈한 이은을 보고 피식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은은 친모만 뚫어져라 보았다. 친모는 멍하니 그런 이은을 보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뭐가요?”

“너는 모르겠지만, 나도 힘들었어.”

열 달 동안 배 속에 품었던 자식을 두고 오는 건데 난들 쉬웠겠냐며 친모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은은 자꾸만 그 말이 변명처럼 느껴졌다.

TV를 보면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부모도 있던데 어째서 이은의 모친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걸까?

단순히 태어날 때 뽑기를 잘못했던 것치고는 너무 운이 나쁜 것 같다.

“아빠는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기억 안 나니?”

“일곱 살이잖아요. 나는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그쪽이 울던 것만 기억이 나요.” 

정확하게는 엄마가 우니까 이유도 모르고 겁이 나서 함께 울었던 것이 기억난다.

싸늘한 이은의 말에 그녀의 친모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어렸으니까. 그땐 너도 어렸지.”

누구와 비교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재혼해서 낳은 친딸인가? 이은의 심장이 조금 더 차가워졌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머뭇거린 친모가 답했다.

“교통사고였어.”

“오래 아프다 돌아가셨어요?”

“아니, 바로…….”

“그럼 보험금이 나왔겠네요? 얼마가 됐든 유산도 있었겠고. 길바닥에서 살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전세든 월세든 보증금은 있었겠지.”

이은은 작정하고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친모가 놀란 표정으로 이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친모의 눈을 마주 보았다.

사람들이 그랬다. 부모가 없어 맹랑하다고. 부모가 없어 그런지 애가 참 독하다고.

이은이 어떤 행동을 하든 거기에는 언제나 “부모가 없어서”라는 말이 꼭 붙었다.

상을 받으면 부모가 없어 애가 독하다는 말을 했고, 상을 못 받으면 부모가 없어 애를 제대로 케어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이은은 그들이 말했던 독한 모습으로 친모를 응시했다.

“그 돈으로, 어떻게든 자식이랑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게 부모 아닌가? 하다못해 일주일이라도 데리고 있지 그랬어요.”

이은이 절규하듯 말했다.

매일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모를 기다리는 이은을 보며 보육원 사람들은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 라면서 함부로 털어놓는 이야기를 이은은 상처투성이 가슴으로 흡수했다.

“애 엄마가 남편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데려다 놨다며?”

“참 모질어. 이런 거 보면 사람이 젤 무섭다니까.”

“불쌍해서 어떡해. 애가 포기를 못 하는데.”

“내버려 둬. 지가 고생하고 싶어 하는 건데. 지 엄마가 다시는 안 오는 줄 알아야 안 그러지.”

자다가도 일어나서 보육원 대문 앞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던 그녀를 두고 직원들이 하던 이야기다.

세완을 만났을 때는 슬슬, 이제 정말 엄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갈 때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함께 가자는 이 회장의 말에 우리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오면 어떻게 하냐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세완도 부모를 잃었다는 것을 모르고, 버림받은 스스로가 미워 세완을 무던히도 괴롭혔다.

갑자기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이은이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괜찮아. 이은아. 진정해.”

세완의 팔이 그녀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이은은 모질었던 25년을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자신에겐 감정 같은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울던 건 언제나 세완이었지 그녀가 아니라서, 이은은 제게 흘릴 눈물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다.

“나는, 나는 그러니까……. 미안해. 그런데 나도 어렸어. 나는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자식을 버린 부모와, 버림받은 자식이 만났다. 미안하다는 말 외에 그 어떤 말이 필요할까마는 이은은 친모의 그 말이 참 가볍게 느껴졌다.

이은의 친모가 주춤거리며 다가와 어설프게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 어떻게 살이라도 맞대면 감정이 가라앉지 않을까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은이 거부했고, 세완이 막았다.

“이만 갈게요. 죄송해요. 나는 여기 왜 와서 이러고 있나 몰라. 다시는 안 만나길 바라요. 안녕히 계세요.”

이은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왜 연락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의 존재도 모르고 살았던 25년이다. 그리고 없어도 잘 살았다.

내가 뭐 모자란 게 있어서!

상사가 일을 좀 못하는 게 거슬리긴 하지만 잘릴 위험 없고, 직장 빵빵하고, 통장 빵빵하고, 여차하면 써먹을 수 있는 빽도 있었다.

보험도 빵빵하게 가입해놨고, 연금도 매달 200만원씩 불입하고 있다. 작년엔 아파트 청약도 당첨됐다.

2천만 원으로는 세완이랑 맛있는 것이나 사 먹을 테다!

당신 없이도 나는 지금처럼 잘 살 수 있다며 이은이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갈 때였다.

“이은아!”

친모가 달려와 이은의 팔목을 잡았다.

이은을 잡는 그녀의 모습이 간절해 보였다.

“이렇게 가는 법이 어디 있어.”

“우리 사이에 더 할 말이 있긴 해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친모의 손을 잠시 내려다본 이은이 그 팔을 뿌리치면서 말했다.

친모는 다시 이은의 팔을 잡았다.

“그래도! 궁금한 거라도 있을 거 아냐. 여기까지 왔을 땐!”

“없어요.”

애초에 그녀도 왜 왔는지 모르는 여정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병원비라도 보태주기 위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 판에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진 않았다.

피 같은 돈이다. 쓰레기통에 처박는 한이 있어도 모친에게 주고 싶진 않다.

싸늘하게 돌아서려는 이은에게 친모가 소리쳤다.

“나는 몰라도, 네 아빠한테도 그럴 수 있니?”

이은이 멈칫했다.

“네 아빠, 그래도 너한텐 끔찍했어! 그것도 기억 안 나니?”

“…….”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니네 부녀 정말 그러는 거 아니야.”

쪼그리고 앉은 친모가 꺽꺽 울음을 토했다. 남들이 보면 이은이 무슨 짓을 한 줄 알 정도로 친모는 서럽게 울었다.

버림받은 것도 그녀고, 피해자도 그년데 친모는 왜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우는지 모르겠다며 이은이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엄마가 이래!

생각 같아서는 친모야 울든 말든 내버려 두고 갈 길 가고 싶은데 일곱 살 어린 시절의 김이은이 아직 그녀의 마음속에 있나 보다.

발목에 커다란 족쇄를 매단 듯 이은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세완이 가자고 이끌었지만 이은의 몸은 도무지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서러운 수요일이다.

* * *

한차례 운 친모와 이은이 한자리에 마주 앉았다. 세완이 이은의 옆에서 불안한 그녀를 지탱했다.

“여기서 한 달만 살아.”

친모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만뒀다면서. 저 사람이랑 같이 창업한다고 했잖니.”

“그건 일하는 사람 아니에요? 창업 준비를 한다는 게 백수라는 뜻은 아니죠.”

“가게는 여기에서도 차릴 수 있어.”

낚시 오는 손님들이 적지 않아서 식당도, 낚시용품 가게도 모두 잘된다며 친모는 자신이 사는 섬에 가게를 차리라고 했다.

회장님 아시면 기절하실 이야기를 참 태연하게도 한다 생각하며 이은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은의 반응에 친모가 변명을 주절거렸다.

“내 모습이 조금 그래서 그렇지, 여기 좋은 곳이야.”

친모가 머리며 옷 등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고구마 줄기를 까느라 까매졌다는 친모의 손끝이 눈에 들어왔다. 이은은 살짝 미안해졌다.

그런 뜻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폄하하는 것도 아니다.

식당도 좋고, 낚시용품 가게도 좋다. 다만 그것을 차리는 사람이 문제다.

이은이라면 모를까 세완이 그런 것을 차리면 이 회장은 탱크를 끌고 올지도 모른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 그럴 거다.

재벌가의 후손이, 그것도 딱 하나뿐인 직계손자가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둘 이 회장이 아니다.

어쩌면 섬을 통째로 사버릴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 섬 자체를 싹 밀어버릴지도 모른다.

불같은 성미의 회장님을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그분이 이곳에 와서, 속된 말로 깽판을 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이다.

세완은 동의하지 수도 있지만 노쇠하신 분의 혈압을 올리는 일은 금물이다.

다소 기분이 나아진 이은이 친모의 오해를 정정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라서 그러는 거예요. 재혼해서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으시잖아요. 저랑 얼굴 보기 껄끄럽지 않으시겠어요?”

모친이 멈칫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리다 다시 오므려졌다.

남편과 새로 낳은 자식은 걱정이 되나 보다. 어지간히 끔찍한가 보다.

누구는 끔찍이 귀한 자식이고, 누구는 끔찍한 자식이고.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은은 괜스레 씁쓸했다.

“여기까지가 가장 좋은 거잖아요. 아빠, 아니 그러니까. 그래요. 그분. 그분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으면 해 주세요. 사진이나 영상 같은 게 있으면 그것도 좋고요.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자식까지 버리고 갔으면서 재혼해서 사는 여자가 전남편 유품인들 가지고 있겠냐마는 죽은 전남편을 언급했던 친모를 생각해 이은은 우리 사이에 남은 마지막 관계마저 정리하자 말을 꺼냈다.

이은 생각에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친모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한 달. 한 달 동안 같이 살면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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