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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16)화 (16/100)

16화

부모 잃은 조카를 보육원에 맡겼다거나, 보험금을 찾아 편취한 것 등 꺼림칙한 부분이 굉장히 많지만 어쨌든 본인 입으로 말한 사실관계는 그렇다.

이은의 이모는 부모가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은이 상처를 받을까 봐 그 사실을 숨겼다고 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이은은 그녀 때문에 친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평생 모르고 원망만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회장이 비서실장을 시켜 그녀더러 보육원에 모친의 죽음을 전달하라고 한 기억이 있다.

“흐음.”

붓을 내려놓은 이 회장이 서안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박 팀장이 김 비서의 친모에 대해 조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청평보육원에 연락을 해보니 김 비서의 친모라는 사람이 연락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돈을 노린 게로군.”

비서실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동의를 표했다.

발인이 끝나기도 전에 어린 조카를 보육원에 던져놨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참 어지간한 여자다.

“그래서 두 녀석은 지금 그 여자를 만나러 간 거고?”

“그런 듯합니다. 위치추적을 하니 지금 포항에 있다고 나오는데, 원장이 이야기한 친모의 집도 그쯤이더군요.”

이 회장이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할까요? 귀띔을 해줄까요?”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 사기를 당할 수는 없었다.

비서실장은 당연한 물음을 던졌고, 그는 당연히 이 회장에게서 그렇게 하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이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그대로 두게.”

“네?”

“알려주면 냉큼 서울로 올라올 것 아닌가! 보안 쪽에 시크릿 걸고, 그놈 성격으로 보면 외부업체에 조사 맡긴 것도 있을 텐데 그것도 막아. 친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도 안 되고, 김 비서의 모친이 쌍둥이인 것을 알아서도 안 되네.”

이 회장의 지시에 비서실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반문 없이 수긍하고, 지시에 따르겠다고 하긴 했지만 비서실장은 여전히 의문에 찬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이 회장이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젊은 사람이 나보다 느려서야.”

비서실장은 이 회장보다 다섯 살이 어리다.

“네?”

“사기꾼인 것을 알면 냉큼 서울로 올라올 것이 아닌가. 속아봤자 돈밖에 더 날려? 돈은 좀 날려도 돼! 이참에 둘이서 시간 좀 보내라 그래, 뺏긴 건 내가 메꿔줄 테니. 나이 들어 바랄 것이 뭐가 있나! 노인네가 바라는 건 별게 없어요.”

돈은 벌 만큼 벌었고, 권력도 있을 만큼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깟 돈 몇 푼 날리는 것 정도는 괜찮다.

이 회장은 이참에 증손주나 만들어 오라며 신선 같은 웃음을 지었다.

단언컨대 비서실장이 최근 10년 안에 본 이 회장의 모습 중 가장 밝은 얼굴이었다.

속 시커먼 노인의 꿈같은 희망에 비서실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직급이 깡패고, 상대는 무소불위의 회장님이었다. 비서실장은 부하직원에 대한 미안함을 가슴에 품고 입을 다물었다.

* * *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낸 친모는 이은이 그때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에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과거가 뭐 그리 중요하냐며 말을 돌렸다.

이은은 말간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친모는 이은과 과거의 그 어떤 기억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친모의 태도만 보면, 이은이 마치 결혼 전에 몰래 낳아서 버린 사생아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은은 은연중에 본능적으로 친모가 두는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 저러는지, 이럴 거면 차라리 연락이나 하지 말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에게 연락을 한 것인지 이은은 정말 궁금했다.

정히 할 말이 없다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널 버렸다고 고백하는 신파극이라도 만들어 내면 좋겠다.

돈이든, 신장이든, 죽기 전 고해성사든. 뭐가 됐든 그녀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그게 훨씬 더 유리했을 거다.

하지만 친모는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도대체 왜 왔는지 그녀도 모르는 여정을 단행했을 땐, 이은도 사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왔는데 친모는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고 연락한 거예요?’

이은은 묻지 못할 질문을 마음속으로 던졌다.

그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금치산자. 너. 아무것도 결정하지 마.」

세완이었다.

내용을 확인한 이은의 눈썹이 쓱, 위로 올라갔다.

‘얘는 또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문자를 보낸 거지?’

고등학생 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때도 느끼지 못했던 혼란스러움을 이은은 지금 이 순간에 느끼고 있었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이은은 만약 둘 중 누군가 금치산자가 된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너일 거라 생각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이 집에 들어서기 전에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녀는 세완에게 자신이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주려고 하거나 신체포기각서를 쓸 거 같으면 말려달라고 했었다.

세완은 그녀에게 필요하다면 금치산자로 만들어서라도 말려준다고 했었다.

이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포항에 도착한 이후부터 세완이 손에 핸드폰을 달고 살았었다.

‘설마 얘가 나 몰래 엄마의 뒷조사를 했나? 도대체 뭐라고 나왔기에?’

척하면 척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붙어산 것이 25년이고, 직장동료로 손발을 맞춘 것이 8년이다.

세완의 뒤치다꺼리를 한 시간이 태반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들이 함께한 시간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친모에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 그러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왜 서울에 무슨 일 있어?”

문자를 봐서 그런지 그녀의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뭔가를 떠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혈육이라는 죄로, 잠시 눈이 어두워졌었다. 낳기만 했지 키워주지도 않은 어미다. 그런데 아무 꿍꿍이 없이 연락했을 리가 없다.

대한민국 최상류층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얻은 건 인간불신뿐이다.

바로 몇 시간 전에 하하 호호 웃던 회사 임원이 기밀을 빼내 외국으로 이직하려던 것만 몇 건이던가!

이은의 눈이 서글퍼졌다.

‘속을 각오, 손해 볼 각오도 하고 왔는데 당신은 도대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기에 내 친구의 입에서 금치산자 얘기까지 나오는 건가요?’

이은은 자꾸만 묻지 못할 질문을 속으로 삼키며 친모 앞에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심일 때는 나오지 않던 웃음이, 비즈니스 상대를 대하듯 가면을 쓰니 술술 튀어나왔다.

여느 첫 만남에서 그렇듯 날씨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다.

매너 있고, 매력 있는 대화 상대가 된 이은의 모습을 친모는 반색하며 반겼다.

친모가 시한부든, 아니든 이은이 친모를 만나는 것은 아마 이 자리가 마지막일 거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조차 친모와 이은은 평범한 모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는 참 슬펐다.

- 띵동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이은의 친모가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모친을 보며 이은은 잠시 흘렸던 감정의 한 자락을 애써 숨겼다.

내 주제에 무슨 가족이라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데 쓸데없이 기대가 너무 컸다.

* * *

통화를 끝내고 집 안으로 들어서니 이은은 철저하게 비즈니스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세완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가 보낸 내용을 봤음이 분명했다.

눈인사로 그를 반기는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늘 회사에서 보던 얼굴을 포항에 와서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쪽으로 앉아요.”

친모가 말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은의 옆에 앉았다.

“늦어서 미안해.”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야.”

이은은 부정했고, 친모는 궁금함을 담아 물었다.

“바쁜 통화였나 봐요. 서울에서 온 연락 맞죠?”

“아, 네.”

“그럼 서울로 올라가 봐야 하나?”

친모는 마치 그러기를 바라는 듯 보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니, 그래도. 바쁘니까 연락 온 거 아니에요? 회사인 거 같은데? ……직장인 맞죠?”

이은의 친모가 세완을 훑으면서 물었다.

쓸데없이 수려한 외모에, 화려한 프린팅의 하와이안 셔츠를 차려입은 남자는 의뭉스런 미소만 지었다.

“직장인 아닌가? 뭐해요?”

친모가 물었다.

“그게 뭐 중요한가요?”

“그건 아닌데…….”

친모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세완과 이은을 번갈아 보는 눈동자가 참 심란해 보였다.

목에 금목걸이 하나만 차면 조폭 조무래기요, 금목걸이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일반 직장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은의 친모는 지금 당장이라도 ‘직업은 있죠?’라고 묻고 싶은 듯했다.

딸 가진 엄마라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불안이었다. 하지만 이은은 괜스레 심통이 났다. 당신이 뭐라고!

“직장인 맞아요. 멀쩡하게 회사 잘 다녀요.”

우리 애가 뭐가 어때서! 때려도 내가 때리고, 구박도 내가 한다!

이은이 불퉁한 목소리로 세완을 옹호했다. 하지만 별로 옹호 같은 옹호는 아니었다.

“아, 그래?”

친모는 도무지 못 믿겠다는 눈으로 다시금 세완을 바라보았고, 세완은 내가 그렇게 이상해 보이느냐며 고개 숙여 스스로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아니 나는, 뭐, 그냥 걱정돼서 그랬지. 미안해요. 그냥 아줌마 오지랖이라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죠.”

세완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자기객관화가 잘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남들이 다 일하는 평일에 포항으로 찾아온, 날티 나는 옷차림과 얼굴의 남자는 누가 봐도 수상했다.

세완은 모친의 마음을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은은 공연히 짜증이 나서 세완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은이 눈을 부라리자 세완이 씩, 웃음을 지었다.

티격태격하는 그들의 모습에 이은 모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두 사람, 무슨 관계에요?”

이은과 세완이 동시에 행동을 멈췄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끔벅였다.

“연인은…… 아닌 것 같고.”

이은의 모친은 정말 그러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마음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평소라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했을 이은이 반문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너는 서울에서 성공했잖니. 좋은 회사도 다닌다고 하고.”

그녀는 세완을 여자 등쳐먹는 백수 정도로 보는 모양이었다.

미래의 빛나는 예비 백수는 내가 좀, 누가 봐도 그리 건실해 보이지는 않지, 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은은 지금이라도 세완의 등짝을 때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본 뒤 친모의 의문에 답했다.

“같은 회사 다녀요.”

“어머나! 회사 그만뒀니? 대기업 다닌다면서?”

어째서 방향이 그쪽으로 튀는지는 모르겠지만 친모는 이은이 회사를 그만둬서 어떻게 하냐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래. 보통 직장인이 평일에, 이렇게 수요일에 내려오는 게 쉽진 않지. 그 회사는 수요일에 쉬나 봐?”

자꾸 엉뚱한 곳으로 튀는 질문에 이은이 발끈하며 바로 잡으려는데 세완이 그녀의 손을 지그시 잡으며 이은의 입을 막았다. 그가 말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지는 않아서요. 저희 스타트업이에요.”

“스타, 뭔 업?”

“스타트업이요. 이제 창업한다고요.”

세완은 이은의 친모에게 그들 두 사람의 직업을 이제 곧 사업을 하려는 예비창업자로 정정해줬다.

친모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이은도 아연해졌다.

이은이 입을 열어 정정하려고 했지만 세완이 먼저였다.

“저희가 자본금이 좀 부족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사업할 걸 찾으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중이에요. 저희가 돈이 좀 없거든요.”

“……자네가?”

“둘 다요.”

“퇴직금은? 아니, 대기업은 퇴직금도 많이 주는 거 아닌가?”

“그거 해봤자 얼마 되나요?”

“좋은 집에 위탁돼서 갔다고 하던데 그 집에서 뭐 안 해줬어?”

친모는 참 돈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듣고 있다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이은이 날 선 목소리로 반박했다.

“먹여주고, 키워주고, 재워주고, 공부까지 시켜줬는데 뭘 더 해주셔야 해요?”

“아니, 뭐, 그거야 그렇지만…….”

“그런데, 궁금하지 않으신가 봐요? 제가 어떻게 자랐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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