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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15)화 (15/100)

15화

대성통곡을 하다가 혼절한 소년 때문에 보육원은 난리가 났고, 이은은 그날 처음으로 이 회장을 만났다. 보육원의 가장 큰 후원자라고 했다.

그때부터 이은의 인생이 풀렸다. 이은 없이는 집에 안 간다고 하던 소년 때문에.

이은이 그날의 세완을 떠올리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은의 친모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자신이 꺼낸 옛이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기억나니?”

친모는 화색을 띠며 물었다. 이은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망설였다.

“아니오.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러다 솔직함을 택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어릴 때니까.”

친모는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바로 바꾸긴 했지만 한순간 스쳐 지나간 그 얼굴에 이은이 의문을 가졌다.

‘……안도?’

친모는 여상스럽게 이은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은은 조금 전에 친모가 보여준 표정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 * *

같은 시간, 세완은 이은의 친모에 대한 조사결과를 듣고 있었다.

“사망 처리요?”

세완이 정보보안팀 박 팀장에게 반문했다. 그가 답했다.

「네. 25년 전에 이미 사망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지나치게 일찍 연락이 왔다 했더니 정말 이건 생각도 하지 못한 상황이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정말 죽은 사람이라면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존재는 도대체 뭔데!

이은과 닮은 얼굴, 그리고 그 여자가 이은을 보고 흘린 눈물들이 그녀가 이은의 모친임을 증명했다.

박 팀장은 25년 전, 이은 부모님의 사고에 대해서 설명했다.

부부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했다고 한다. 둘 다 혈혈단신 고아라서 장례식이며 보험금은 후견인이 해결했다고 한다.

이은과 그가 만나기 전의 일이니 이 회장이 후견인이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 후견인은 누군데요?”

「죄송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를 못 했습니다.」

식당 아주머니를 만나고 나올 때 조사를 부탁한 것이니 시간이 없어 조사를 못 한 것이라면 이해는 가지만……. 

“기록은 있죠? 보험사에 자료요청을 하면…….”

「죄송합니다. 25년 전이라서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보험사가 그룹의 계열사였다.

하지만 그 시기 자체가 자료가 문서에서 컴퓨터 파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 그런지 당시의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별다른 특이사항도 문제도 없는 사건이라 더더욱 자료보관의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 개인정보를 5년 이상 보관하지 못하도록 해놓았으니 있어도 없어야 한다고 해야 하는 실정이긴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세완은 골치가 아팠다.

“주소를 하나 알려드릴게요. 조사 부탁드립니다. 좀 있다가 핸드폰 번호도 하나 알려드릴 테니 같이 부탁드립니다.”

세완이 이은의 핸드폰이며 다이어리를 뒤져 모친의 번호를 알아낼 각오를 하고 말했다.

이은 몰래 번호를 알아내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만 갈수록 미궁으로 빠지는 상황에 세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박 팀장님, 혹시 할아버지 쪽에서 가지고 있는 건 없어요?”

일곱 살짜리 고아라고 하지만 그 노인네가 집안에 사람을 들이면서 조사 한 번 안 했을 양반이 아니다.

25년 전이긴 해도 이 회장이 혹시 유의미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세완이 슬쩍 운을 뗐다.

팀장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회장님 쪽 자료는 실장님 승인이 필요합니다.」

“……후승인으로요. 아니면 몰래 빼내든지.”

「죄송합니다.」

하여튼 합법적인 것 엄청 좋아한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세완이 물었다.

“그래도, 팀장님 말씀에 따르자면 뭐가 있기는 있다는 얘기네요?”

「혹시나 싶어 김 비서님의 이름으로 조회를 해보니 파일이 여러 개 나왔습니다. 접근자격이 없다고 나오기는 하는데 가족 관련이라면서 파일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조사를 하시긴 하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세완이 손가락으로 담벼락을 톡톡 두드렸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이면 아예 파일 자체를 꽁꽁 숨겨 놨을 텐데, 적당히 오픈한 비밀서류라…….

도대체 이은의 친모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세완은 궁금할 따름이다.

“일단 계속 조사는 해주세요. 제가 지시한 건 할아버지한테 비밀로 해주시고요. 할아버지 쪽 자료는 정 필요하면 제가 할아버지께 따로 요청할게요.”

워낙에 기브 앤드 테이크를 좋아하는 분이시다 보니 이 회장에게 자료를 요청하면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한다.

세완은 이은의 친모가 가진 진실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이 제 목에 목줄 채울 정도로 급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완벽하게 비공개가 아닌 것을 보니 이 회장 측에도 별다른 자료가 없을 수도 있고.

세완은 박 팀장과의 전화를 끊은 뒤,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업체에도 연락을 했다.

합법적이지 않은, 어둠의 경로인지라 돈이 좀 깨지긴 하지만 72시간 안에 조사결과를 가져다주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믿을만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식이며 업계 쪽 근황 외에 개인의 뒷조사를 맡기는 것은 그도 처음이지만 일 하나는 확실하게 한다고 알려진 곳이니 별로 걱정은 안 된다.

“며칠만 기다리면 되겠지.”

세완은 생각했다.

자칭 이은의 모친이 품고 있는 꿍꿍이를 알게 되면 미련 없이 이은을 데리고 떠날 거다. 그리고 아마 그 안에, 이은의 마음도 정리가 될 거다.

지금이야 친모를 만났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혼란스럽지만, 이은은 워낙에 똑똑한 사람이니 곧 제정신을 차릴 거다.

세완은 기꺼이 며칠 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에이, 아니겠지.

이은의 모친이 죽은 사람으로 나와서 이런 기분이 드는가 보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은의 모친은 최소가 보험금 사기꾼이었다. 그것도 그가 물려받을 회사에서 보험금을 뜯어간.

일하기는 싫어하지만 내 돈 나가는 것에는 예민한 세완이다. 그래서 자꾸만 이런 기분이 드는 것 같다며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세완은 이은 친모의 집으로 향했다.

* * *

난을 치던 이 회장의 손이 멈췄다.

“세완이가?”

비서실장이 답했다.

“죄송합니다. 보안을 걸어놨어야 했는데…….”

이 회장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으면서 말했다.

“아니, 그 뜻이 아니야. 뭐, 볼 수도 있지.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고. 어차피 껍데기만 봤지 내용은 못 봤지 않나? 그럼 된 거지. 그런데 내 말은 세완이가 정말 이은이에 대해서 조사를 지시한 게 맞느냐고 물은 거네.”

“정보보안팀 박 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그룹 내외의 정보보안을 총괄하는 것이 비서실장이었다. 소식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비서실장은 박 팀장이 몰래 진행하고 있는 조사에 대하여 이 회장에게 고했다.

“박 팀장이야 내가 이 상무에게 넘긴 사람이고, 제 사람 제가 쓰는 거니 할 말은 없네만…….”

이 회장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탐내서 집에 들인 아이였다. 처음에는 세완이가 하도 난리를 피워서 들인 것이지만 보면 볼수록 진국인지라 억지로 세완 옆에 붙여 놓은 측면이 없진 않다.

사돈댁 지위나 재산을 필요로 할 정도로 없는 형편은 아니다. 커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25년을 세완과 함께 키우다 보니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는 뼛속까지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심 이은을 손자며느리감이나 생각했다. 하지만 죽어라 티격태격하는 모양에 욕심을 버려야 하나 생각했는데…….

“뒤늦게 관심이 생겼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제 와서 왜?”

붙어서 산 게 몇 년인데 그 애를 아직도 몰라? 조사를 지시할 시간에 꽃이나 한 송이 사다주지!

웬만한 정보업체보다는 그들이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더 많을 거다.

한때 근방에서 제일가는 사랑꾼이었던 이 회장이 연애조차 어설픈 손자를 향해 혀를 찼다.

하지만 생각의 차이였다. 잠시 고민한 이 회장이 말을 바꿨다.

“아니지. 아니지. 원래 관심이 생기면 내 사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알고 싶은 법이야. 눈을 뜨고 있을 때나 감고 있을 때나 다 알고 싶은 법이지.”

“회장님, 그건 범죕니다.”

자문자답하는 이 회장의 말에 비서실장이 흠흠, 헛기침하며 그를 말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 회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놈이 동시에 휴가 내고 튀었기에 이은이를 따라간 것은 내 진즉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건 또 생각을 못 했구먼. 요즘 젊은 사람들 트렌드가 속도위반이라고 하던데…….”

이 회장이 얼마 전에 본 신문기사를 떠올리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하고 증손주를 안겨주든, 증손주를 먼저 만들고 결혼하든 순서가 무슨 상관일까!

김칫국부터 마시는 이 회장의 모습에 비서실장이 다시금 그에게 현실을 깨우쳐줬다.

“밀월여행을 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알지. 그러기엔 이은이가 너무 아깝지. 그래도 남녀가 단둘이 여행을 간 건데 뭐라도 생겨서 오지 않겠나?”

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종족이 다른데 붙여만 놓는다고 불꽃이 튀고 애가 생기겠냐며 비서실장이 직언을 올렸다.

이 회장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집안 빼고는 모자란 것이 없는 인재입니다.”

소속은 다르지만 차기 회장실 비서실장이라고 내정해 놓고 있는 인재인지라 이은에 대한 비서실장의 평가는 후했다.

“……내 손자는 집안 빼고는 볼 게 없는 놈이고?”

비서실장이 이 회장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제 밥벌이는 해. 생긴 것도 봐줄 만하고. 야망이 없는 게 흠이긴 한데 그러니 와이프 내조는 잘할 거야.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빨래도 할 수 있을 거네. 설거지도 잘해!”

이 회장이 미련을 못 버리고 손자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뒤로 갈수록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늘어났지만 그건 이 회장이 아니라 세완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니 이 회장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 회장은 어떻게든 손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비서실장은 내가 신붓감이나 그 가족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무엇 하겠느냐며 허허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이 회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박 팀장이 김 비서의 모친에 대해 조사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포항에 살고 있다면서요.”

나중에는 가족사 전체에 대해 조사를 지시했지만 처음 지시는 그랬다며 비서실장이 이상한 점을 이 회장에게 고했다.

단순히 이은이에 대해서 조사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모친의 존재를 콕 찍어서 이야기했다는 것에 이 회장의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은이 모친은 죽었을 텐데?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아니요. 정확하십니다.”

교통사고로 부부가 즉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 이은의 이모가 이은의 후견인으로 보험금을 수령하고 이은을 보육원에 맡겼다.

어릴 때 입양을 간 터라 성과 이름, 모두 이은의 모친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은의 모친과 쌍둥이인지라 얼굴을 보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다.

이은이나 보육원 원장이 이은의 친모가 그녀를 직접 보육원에 맡겼다고 알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25년 전, 이 회장의 지시를 받은 비서실장이 이은의 이모를 만나 물었을 때 그녀는 부모를 모두 잃은 아이가 충격을 받을까 두려워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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