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지역감정을 일으키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불안한 것만은 사실이다.
“……경호팀에 연락해서 신변 보호 요청할까?”
심각한 이은을 보며 세완이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이은은 습관처럼 세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운 없이 보조석 시트에 몸을 기댔다.
지친다. 진짜.
포항으로 오기로 했던 몇 시간 전의 자신에게 쌍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엄마’에 대한 의문이 자꾸만 피어난다.
“어떤 사람일까?”
주어 없는 물음에 낄낄대던 세완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왜 나를, 다시 만나려고 하는 걸까. 남들처럼 자식이 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는 아닌 거 같은데.”
세완이 손을 뻗어 이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줬다.
말 없는 위로에 이은의 표정이 조금 편해졌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과 혼란 그 자체였다.
김이은의 인생에서 엄마는 언제나 물음표였다.
길에 버려진 아이들과 달리, 보육원에 버려진 이은은 우리 엄마가 찾아올 것이라는 그 흔한 거짓말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일찌감치 현실을 깨닫고, 자력갱생에 힘 쏟긴 했지만 서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포항까지 내려온 것이 어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이런저런 명분이 있지만 결국 한번 얼굴이나 보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몇 날 며칠 철야를 해도 멀쩡하기만 하던 이은이 오랜만에 지치고 피곤한 얼굴을 했다.
이은의 민낯을 보며 세완은 속이 쓰렸다.
또다시 실없는 농담을 던져볼까 고민하다가 자신의 몸을 조수석 방향으로 확 꺾었다.
세완은 이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이은이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조용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깨 빌려줄게. 울어도 모르는 척해줄게.”
이은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얘는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바람둥이 같은 대사를 배워 와서…….
하지만 덕분에 조금 위로가 되긴 했다.
그래. 그렇지. 내 가족은 회장님과 세완이지.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고, 또 되뇌었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돈 뜯어가고 골치 썩이는 가족이 있는 것보다는 혈혈단신도 괜찮다. 아니, 차라리 혈혈단신이 나을 수도 있다.
이은이 마음을 다잡고, 눈을 떴을 때였다. 이제 괜찮다고, 고맙다고 말하면서 몸을 바로 세우려고 하는 바로 그 찰나였다.
‘근데 여기 차 안인데?’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는 콘솔박스가 있다. 비싼 차라서 그런지 콘솔박스 크기도 다른 차보다 1.5배로 크다.
‘얘는 도대체 어떻게 어깨를……’이라며 이은이 머리를 들고, 눈동자를 내린 순간이었다. 대문자 S로 휘어진 세완의 몸이 보였다.
이은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분명히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장르가 개그콘서트가 된 기분이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이은이 물었다.
“허리 괜찮아? 야, 고맙긴 한데……. 아우!”
세완의 어깨를 쳐서 그의 몸을 운전석으로 돌려보냈다. 세완은 허리를 두드렸고, 이은도 한 손을 거들었다.
이은은 미안함 반, 고마움 반을 담아 세완의 허리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됐어. 괜찮아. 뭐 이런 걸로.”
세완이 이은을 말렸다.
넌 괜찮아도 회장님과 네 미래의 와이프는 안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본인이 그렇다니 방법이 없었다.
“서울 가면 보약이라도 하나 지어줄게.”
구박도 좀 덜해야겠다.
이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결심했다. 그리고 그때 세완이 말했다.
“그래도 나 좀 멋있지 않았냐?”
그러고 보니 우리 세완이, 연애를 하긴 했나? 모쏠은 아니겠지?
이은이 짠한 눈으로 세완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디에서 이런 바람둥이 같은 대사를 배워왔나, 했는데 실전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았나 보다.
“세완아.”
이은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그를 불렀다. 세완이 이은을 응시했고, 이은이 말했다.
“이런 건 공원 벤치나, 의자가 이어져 있는 곳에서 하는 거야. 안 그러면 너 허리 나가서 장가도 못 간다?”
“인마!”
부끄러운지 세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은은 웃음을 터트렸다.
발끈하던 세완은 간만에 웃는 이은을 보며 자신도 연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웃어라, 웃어!
산 넘어 산이다. 왜 우리 이은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프냐.
세완은 쓰윽, 손을 내밀어 이은의 머리를 다시 한번 헤집었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깜박이는 이은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 패턴은 승리의 V!
말없이 문자의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하는 세완을 보며 이은은 문득, 그 어느 옛날에 ‘너희는 핸드폰 패턴까지 다 공유하느냐’고 묻던 고등학교 동창의 말이 생각났다.
별로 친한 아이는 아니었고, 세완과 함께 하는 이은을 보며 샘을 내던 그렇고 그런 동창생1이었을 뿐인데 왜 갑자기 그녀의 말이 생각났나 모르겠다.
이은의 핸드폰 패턴은 V, 세완의 패턴도 V!
세상이 워낙 좋아져서 핸드폰의 잠금 해제 방식도 지문인식이며 홍채인식, 안면인식까지 다양한 신문물이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 옛날, 서로가 서로에게 해주던 패턴 잠금 그대로를 유지했다.
십수 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의심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녀의 핸드폰을 마음대로 만지는 세완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드는지를 모르겠다.
왜 갑자기 고리짝 옛 기억이 떠오르는 거냐며 머리를 휘휘 저은 이은이 보조석 시트에 다시 몸을 기댔다.
“자게?”
세완이 뒷좌석에서 여름 담요를 꺼내 이은에게 던졌다.
“덮고 자.”
“안 추운데?”
“그래도 덮어. 에어컨 틀어 놨잖아. 한여름에도 만날 감기 걸려 콜록대면서 무슨.”
세완은 여상스레 타박하며 이은의 손에서 담요를 빼앗았다. 꼼꼼하게 담요를 덮어주는 세완을 보며 이은은 조금 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에이, 무슨.
이은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왜?”
세완이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지만,
“아니야. 아무것도.”
이은은 말을 얼버무리고는 냉큼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잘 자.”
세완의 굿나잇 인사를 들으며 이은은 잠을 청했다. 이은의 귓가가 살짝 붉었다.
* * *
국도로 30분. 항구에 도착한 뒤로 배를 타고 30분 더!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배도 바로 있었다.
엄마는 중간에 한 번 더 전화를 해 배 시간을 물어본 뒤 끊었다. 아마 배에서 내리면 바로 만날 수 있을 거다.
「곧 도착하니 차량을 가지고 오신 분들은 미리 탑승해서 기다려주십시오.」
차량을 타고 온 선객의 경우, 일반 여행객이 모두 안전하게 하선한 이후 천천히 내리게 된다.
안내방송에 따라 이은과 세완은 차에 올라탔다. 이은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잇살이나 먹어서 도대체 이게 웬 추태인가 싶지만 이제 정말 재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니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들숨과 날숨을 거칠게 반복하는 이은을 보며 세완이 혀를 찼다. 하지만 지금 이은은 세완을 타박할 정신도 없었다.
그저…… 아!
이은이 세완에게 물었다.
“세완아, 25년 만에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걸까?”
“양육비 청구.”
고민 없이 튀어나온 답변에 이은이 세완을 돌아봤다.
“뭐?”
이은의 눈초리에 세완이 태연하게 반문했다.
“맞잖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고의로 버리고 간 거면, 넌 양육비를 달라고 해야 마땅하지.”
세완의 말이 맞다. 그녀는 실종아동이 아니라, 엄마의 손으로 직접 보육원에 맡기고 간 아이였다.
세완의 말을 들은 이은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렇게 아니라며 몇 번을 생각하고, 후회하고 갈등하고 실망했으면서도 이은은 막상 엄마와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오자 다시 일곱 살 어린 아이가 되어 마음 설레했다.
시무룩해진 이은을 보며 세완이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쳤다.
“맹추야, 호구 되지 말라고. 네가 뜯어야지. 내가 꼭 이렇게 상기시켜줘야 해? 사막에 떨어져도 냉장고 팔아먹는다는 김 비서님 어디 갔어?”
호구가 되도록 내버려 둘 세완도 아니지만 어째 갈수록 기분이 쌔해서 이은의 단속을 하게 된다.
“알아.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이은이 불퉁한 표정으로 지으며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오늘따라 유난히 똑똑해 보이는 세완을 보며 이은이 입술을 삐죽였다.
이세완이 똑똑한 건 좋은 건데 어째 자꾸만 못마땅한지 모르겠다.
이것도 마음에 안 들고, 저것도 마음에 안 들고, 마음이 들쑥날쑥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 어떤 결심 없이 엄마를 찾아오기로 한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우!”
이은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차창에 머리를 갖다 박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유리에 금 가면 손해배상 청구한다.”
그의 밉살맞은 말을 핑계로 세완을 한 대 때려보기도 했지만 복잡한 마음은 그대로였다.
차가 서서히 움직이게 되니까 더더욱.
이은은 1초에 수백만 번도 더 갈등과 고민을 번복했다. 그것은 배에서 내려, 차가 멈추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무도 없네.”
이은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배에서 내린 사람은 여덟, 차량은 둘.
남녀 한 쌍을 태운 한 대의 차량은 알아서 사라졌고, 낚시꾼인 듯한 남자 네 명은 「바다펜션」이라는 글자를 새긴 승합차를 타고 사라졌다.
세완은 그녀의 친모를 돈을 노린 사기꾼쯤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무리 성공률 100%의 사기꾼이라도 기본적으로 마중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느냐 하는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다.
세완이 물었다.
“마중 나온다고 하신 거 맞아?”
“배 시간 물어보는 거면 마중 나오신다는 이야기 아니야?”
“……아까 그 문자에 주소가 적혀 있긴 하던데.”
이은이 막 핸드폰을 찾아 문자를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 RRR
전화가 울렸다. 엄마였다.
“여보세요?”
「도착했니? 아까 문자에 주소 있을 거야. 거기로 오면 돼. 내가 직접 가야 하는데 사정이 여의치가 않다 보니까. 차가 있다고 하던데…….」
누가 보면 오지 말라는데 억지로 찾아가는 줄 알 것 같은 상황이었다.
“알아서 찾아갈게요.”
엄마와 전화를 끊은 이은이 세완에게 말했다.
“오래. 주소 찍어서.”
“……지금이라도 서울로 갈래? 바로 헬기 띄울 수 있는데.”
“됐어.”
설렘과 복잡함은 이제 사라진 것 같았다.
정말 얼굴이 궁금했다. 좋은 의미 말고, 나쁜 의미로.
25년 만에 보는 엄마가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그녀를 보며 쩔쩔매는 것을 상상한 것은 오직 이은뿐인 듯했다.
“가자.”
이은이 힘없이, 그러나 어딘가 오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단란한 가족 놀이를 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도의적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 들어나 보고 싶어서 온 거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어쩌면 그녀가 조금은, 금전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딱 2천만 원이라는 상한선을 들고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래. 솔직하게 이은도 자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쨌든 왔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만나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이유라도 묻고 싶다.
그녀에게 전화를 한 이유든, 그녀를 버린 이유든. 뭐든 간에.
세완과 이은은 다시 여정을 시작했고, 그들은 곧 평범한 어촌의 시골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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